부록-6A 죄와 회개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죄이다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의 제정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죄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그러므로 우리는 지은 죄를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난 후, 죄를 지은 형제 자매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또한 형재 자매에게 손해를 변상할 수 있으면 실제로 변상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지은 죄는 하나님께만 회개하라.
회개란?
회개와 믿음은 불신자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칭함을 받을 때 필수적으로 따르는 과정이다. 그러나 신자가 된 후에도 회개와 믿음은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계속하여 반복해 나가야 한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회개) 의에 대해서는 살아가는 것이(믿음) 곧 성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회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믿음은 제10과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란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 "회개하다"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 단어는 히브리어 슈-브'이다. 슈-브는 "--으로부터 돌아 서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슈-브는 죄에서 돌아서고 죄악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슈-브는 나쁜 길에서 돌아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바른 길인 하나님께로 나아 가는 것을 말한다(turn from sins to God).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51: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렸느니라"(호
신약에서는 회개의 결과 사람이 내적으로 변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과 내적인 변화로 인해 외적인 삶이 변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
첫째 회개의 결과 내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살펴보자.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명사인 '메타노이아'와 동사인 '메타노에오'이다. 메타노이아의 '메타'는 변화란 뜻이고 '노이아'는 마음(mind)이란 뜻이다. 따라서 회개(메타노이아)는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회개라고 하면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이유는 회개라는 말이 과거의 죄에 대한 비탄한 감정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이다. 후회하고, 회한하고, 병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간주해 온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적인 면, 생각하는 면만을 강조하여 감정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헬라 철학에서는 마음을 의미하는 '누스'를 인간의 논리적 사고, 이해력, 판단력, 이성 등 지적인 측면에서 이해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마음을 변화시키는 회개(메타노이아)를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메타노이아(또는 메타노에오)는 생각을 바꾸는 것 이상이다. 성경에서 누스는(mind)는 사람의 지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는 사람의 태도, 인식, 이해, 감정, 판단 및 결정 등 지, 정, 의의 전 인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누스)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이와 같이 누스가 전인격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지, 정, 의의 자리인 마음(heart)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회개는 지, 정, 의 모두가 변하는 것을 말하며 단순히 생각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회개는 자신의 옛 누스(old nous)의 결과 나타나는 죄된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싫어하고 슬퍼하고 변화되어서 새로운 누스를 입는 것을 말한다(롬
둘째 회개의 결과 내적인 변화로 인해 외적인 삶이 변하는 것을 살펴보자. 이 단어는 '에피스트레포'이다. 에피스트레포의 에피는 "--쪽으로", 스트레포는 "돌다"는 뜻이므로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말이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며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행
죄악과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Life style이 바꾸어 진 것을 말한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 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그러나 메타노이아나 에피스트레포는 때로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거나 또는 동시에 사용되기도 하므로(행
이처럼 회개하는 것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말은 생각은 물론 감정과 의지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변화를 말한다.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변화된 전인격이 죄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회개는 지, 정, 의의 요소가 있는 전인격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죄인이며(롬
회개는 동시에 마음 깊숙이에서 죄를 미워하는 감정이 생겨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며(고후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또한 회개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해야 할뿐만 아니라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단의 의지를 요구한다. 죄를 알고 고백하며 죄를 미워하기는 하지만 결단이 없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되풀이한다면 진정한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없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마음이 변하고 행동이 변해야 한다.
죄인 줄 알고 죄를 고백을 하면서도 똑 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벧후
이처럼 회개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전인격적인 것이지만 사람이나 형편에 따라 때로는 지적인 면이, 때로는 감정적인 면이, 때로는 의지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
자백과 회개
우리는 죄를, 예수님 이름으로 회개하고, 보혈로 씻고, 십자가에 못박는다. 이것들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 둘째 죄를 인정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는 것을 ‘자백,’ ‘고백’이라고 한다. ‘자백하다’는 말은 ‘인정하다, 고백하다’는 말이지만 신약의 헬라어로는 “동일한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즉 자백하다 는 말은 누구와 동의한다 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죄를 자백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죄라고 정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과 동의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자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는 사람은 “주님, 저는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Lord, I have sinned)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 죄송합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죄를 자백할 때는 “주님,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깨닫고 자백한 죄를 회개하라. “주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한 후 이어서 “예수 이름으로 회개하니 용서해주시옵소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시옵소서” 또는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언제까지 회개할 것인가?
물론 어떤 죄에 따라서는 한번에 되지 않고 여러 번에 걸쳐 회개해야 할 때가 있다. 죄의 강도가 심하거나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번 지은 죄는 한번 회개한다고 해서 금방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나쁜 기질-성격-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회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성령님이 회개를 그만두게 하시거나, 환경이 현저하게 개선되었을 때, 다음 죄로 넘어가면 된다. 한 가지 유의할 사실은 우리가 회개를 해 감에 따라, 이전에 잊고 있던 죄들이 생각난다는 사실이다.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계속 회개하라. 평생에 걸쳐 지은 죄들이 마치 껍질처럼 층을 이루어 쌓여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종류의 회개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회개(회심의 회개)와 신자로서 하는 회개(성화의 회개)가 있다. 먼저, 불신자가 하나님 앞의 죄인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의인으로 신분이 변하는 회심의 회개가 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그러나 신자가 되어서도 회개는 계속된다. 이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는 ‘성화의 회개’이다(요일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이것은 곧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성화의 과정의 일환이다(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신자는 한번 회개하여 거듭난 후에는 더 이상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잘못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또한 회심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신자는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신자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신자의 신분적이고 종말론적인 상태를 말하는 구절이지, 현실적이고 실존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죄는 불신자에게는 왕노릇을 한다. 불신자는 죄의 힘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죄가 신자에게는 더 이상 왕노릇을 할 수 없다. 신자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이것을 죄의 두 가지 요소인 죄책(guilt)과 오염(pollution)의 관점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죄책은 죄를 지은 자가 받아야 할 형벌을 의미하고(롬
죄의 3P’s는 죄의 형벌(penalty of sin), 죄의 능력(power of sin) 및 죄의 존재(presence of sin)를 말한다. 불신자는 죄의 형벌 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는 예수를 통해 죄의 형벌에서는 벗어나지만 여전히 죄의 능력 아래 있다. 그러나 죽어서 천국에 가면 죄의 존재로부터도 자유케 된다.
후회와 회개
회개는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고 후회는 죄에 대한 회한으로 그치는 것이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경우에서 이를 살펴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정하고 저주했지만 곧 회개하였으며(마 26:75), 나중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요
유다의 경우는 다르다. 유다는 노예의 몸값에 불과한 은 30십 량에 예수님을 배반한 죄를 뉘우치고 죄를 자복했지만(마 27:3-4), 죄사함의 은총을 받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예수님은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제게 좋을 뻔한(마 26:24),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르셨다(요
진정한 회개,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미워하고 비통해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후회나 다름이 없다. 예수님을 팔고 비통해 한 유다나, 팥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후회는 했지만 진정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죄사함의 은총을 누릴 기회를 놓쳐 버렸다(히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기만 하면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 용서 받지 못하는 죄는 단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다(마
반면에 다른 사람은 죄에 대한 개념을 잘못 알아서 사소한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작은 죄도 지옥에 갈 만큼 중대한 죄가 된다.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죄라도 그것이 너무 적은 것이기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않아도 되는 죄가 없는 것처럼 아무 죄라도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정죄를 가져오는 죄란 없다.
죄의 고통과 사죄의 기쁨
죄는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준다. 그러나 회개를 통한 사죄의 은총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을 준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죄를 숨기고 자백하지 않을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1-5).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3-4).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죄의 은총이 주는 자유와 기쁨과 평강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지저분하다. 그러나 목욕하면 상쾌해진다. 몸이 지저분하여 찝찝한 만큼 목욕이 주는 상쾌함은 더욱 크다.
죄의 고통과 사죄의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생각하면 고통스럽지만 사죄의 은총이 주는 기쁨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주눅들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회개한다.
시편 중에서 시편 6, 32, 38, 51, 102, 130, 143편은 회개시이다. 시인은 죄로 인해 당하는 마음의 고통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죄를 자백한 후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기쁨에 대해 감사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크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할수록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 체험한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또한 우리는 많이 사함 받을수록 은혜의 깊이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영적 명현 현상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싫어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죄를 찾아내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새마음 훈련을 하는 동안 죄가 드러나서 제거되는 동안 소위 말하는 ‘영적 명현 현상’을 동반하여 아픔과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한약이나 건강 식품 사용서에 보면 명현 현상 또는 명현 반응에 대해 소개한다. 명현(瞑眩)은 '눈감을 또는 어두울 명(瞑)'과 '아찔할 현(眩)'자를 합한 단어로서 약을 사용한 후에 눈이 캄캄하고 아찔한 상태를 말한다.
어떤 질병이 나으려 할 때 또는 자신도 모르던 질병 원인이 사라지기 전에 질병 부위가 정상 현상을 찾기 위하여 재구성되면서 자기도 모르던 고통스러운 현상(어두울 ‘명’)이 나타난다(나타날 ‘현’)고 하여 명현 현상이라 한다. 한편 좋아지는 단계에서 나타나므로 호전 반응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현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자기 속에 있던 것들이 빠져나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명현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보자.
단식 동안에 두통, 체취 등의 명현 반응이 오는데 이는 몸에서 독소가 빠져 나가는 데 따라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 그러므로 명현 반응이 클수록 더욱 마음을 굳게 먹고 단식을 완수해야 한다.
여드름이나 아토피가 있는 부분에 비누칠을 했을 때 인체의 독소가 배출되는 명현 반응이 나타나더라도 중단하지 말고 계속 사용하라. 사용을 중단하면 오히려 명현반응이 더 심해진다. 명현반응(적응반응) 을 겪은 후 장이 깨끗해지고 혈색이 좋아 졌다.
새마음 제자훈련을 하다 보면 때로는 이와 비슷한 '영적 명현 현상'이 일어난다. 평소 다루지 않던 상처와 죄를 깊이 다루다 보면, 어떤 죄들은 의식되지 않고 조용히 떨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죄들은 떨어져 나갈 때 다른 상처나 죄들을 건드려서 마음을 뒤틀리게 하여 평소보다 분노가 더 치밀고, 심통이 더 심하게 나거나 마귀의 공격으로 인해 마음이 더 힘든 경우가 있다.
이것은 영적 명현 현상이며 호전 현상의 징조이다. 내 속에 있던 나쁜 기질들이 떨어져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져서 새마음 훈련을 중지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중지하거나 포기하면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 의지를 굳게 하여 잠시 이겨나가면 놀랄 만큼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한두 번 겪은 후에는 새마음 훈련이 몸에 배이고 새마음 훈련에 재미를 붙이게 되어 이후에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된다. 죄에 대핸 영적으로 민감해져 있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회개와 믿음은 모두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 쪽으로 가는 것을 말하지만,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면을 강조하고 믿음은 하나님 쪽으로 가는 면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믿음을 동반하고, 진정한 믿음은 회개를 촉구한다. 우리의 회개는 믿음으로 하는 회개(believing repentance)요, 우리의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penitentiary faith)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죄에 대해 죽는 것은 회개이고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나는 것은 믿음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은 회개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믿음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의 행위를 벗는 것은 회개이고, 새사람을 입는 것은 믿음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나는 회개와 믿음의 연속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지속적으로 새로워진다. 결국, 새마음 제자훈련은 회개와 믿음의 연속 과정을 통해 마음이 새로워져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권, 인권, 물권을 회복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돕는 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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