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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음과 부활IV

davidtheking 2008. 6. 22. 13:29

                                                                                  죽음과 부활IV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1,39)

1절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정죄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완전하고 영원한 안전을 말한다.

8;1다음에 나오는 모든 것은 실제로도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잇다.

무엇보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하는 사실이 이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정죄함이 없는가?

첫째 대답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롬8:2)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련을 보고서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것과 관련된 일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로마서 처음 장들에서 설명하였듯이 우리의 신분도 유죄 신분이었다.

우리는 정죄 받은 죄인이었고 하나님이 쏟으시는 진노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므로 이제 정죄함이 없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고 우리는 율법을 어겼다.

율법은 정죄 밖에 할 수 없었으나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고” 죄를 정죄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즉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첫 번째 해방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이다.

두 번째 해방은 우리를 누르는 죄의 세력에서 해방이다.

이절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 받았으면 반드시 그리스도에 의하여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받은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 생활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이는 우리가 온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거나 패배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전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성령으로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각성해야 한다. 우리가 새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며 우리가 더 이상 정죄아래 있지 아니하고 영원히 구원 받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우리를 죄악 된 자아로부터 건지셔서 우리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게 하신다.

전에 우리는 종, 즉 불의하고 정죄 받은 종이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며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와 가장 쓰린 상처와 가장 절박한 필요를 하나님께 내 놓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됨을 또 뜻한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며 예수님이 체험하신 모든 것을 우리도 어느 정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절들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을 회복하는 일은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며하고 계시는 일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우리의 구속 문제를 우주의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하나님은 자연도 역시 구속하고 계신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 계를 에덴에서 아담이 타락하여 생긴 결과로 겪었던 그 부패에서 구원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28-39절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주장이다. 그래서 구원이 “어떤 신자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은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목적”(28-30)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31-39) 29절 30절은 (각각 하나님이 신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을 가리키는) 다섯 고리로 된 황금 사슬이라고 불러왔던 내용을 담고 있다. 이고리들은 구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이고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써 이 황금사슬에 이어져 있다.

즉 예지와 예정과 유효한 부르심과 칭의와 영화이다.

바울은 이 행위들을 그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고정된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른다.

부인할 수 없는 확정은 다섯 고리로 된 끊어질 수 없는 사슬이다.

이 사슬은 선을 위하여 함께 작용하므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던 그 시초로부터 영원한 영광에서 절정에 이를 때 까지 나타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해서는 롬8:31-39에 나타난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많은 사람이 우리를 대적하며 그리스도인은 적이 많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들이 우리를 대적하는가? 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으리요”이다.

즉 그들이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럴 수 없다. 이다.

 

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그리스도의 은사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까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셧으므로 무엇을 주지 않으려 하실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모든 은사 가운데 가장 큰 은사를 주셨다면 틀림없이 그 보다 못한 은사를 모두 주실 것이다.

 

3,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33절)

이 문장에서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낱말이 없더라도 나머지 부분은 상당한 무게를 가질 것이다.

분명히 우리를 정당하게 송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우리의 양심도 우리를 송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는 송사할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고 그러므로 이미 아시며 예정하시며 부르시며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신 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송사도 할 수 없다.

 

4, “누가 정죄하리요?”(34절)

대속의 죽으심과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를 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니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

 

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절)

바울은 이 마지막 질문에 관련하여 자기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그리스도와 떼어 낼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환난을 시인한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는 시44:22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망이나 생명, 천사들이나 마귀들(한글 개역 권세 자들) 현재 일이나 장래 일 그 어떤 권세 (높음이나 깊음이나 전체 피조 질서 속에 있는 그 모든 것)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시 살핀 다음 그것들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그치지 않을 사랑 다음에 두고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올바른 결론을 내린다(39절)

 

바울은 다섯 가지 질문을 임의로 던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들은 한데 결합해서 아무것도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거나(그 분이 우리를 위하시므로)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억누르거나(그 분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으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혹은 정죄하거나(그 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의롭다 하셨으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없음을(그 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나타내셨으므로)확증해 준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다섯 개의 확신(28절)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다섯 개의 단언(29-30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다섯 개의 질문(31-39)이 나온다.

이들은 함께 하나님에 대한 열다섯 가지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

우리에게는 오늘날 그러한 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정은 모든 인간의 체험에서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유혹이나 환란이나 비극에서 면제될 것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코 우리를 그 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리라고 보증하셨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지고하게 나타났으며(5:8,8:32,37)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 부어졌고(5:5) 우리에게서 그에 반응하는 사랑을 이끌어 내었고(8:28) 그 본질적인 확고부동함으로 인해서 결코 우리를 놓아버리지 않는 -그것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굳건히 확신시키는 임무를 지니고 있으므로(8:35,39)-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곧 연약하고 변하기 쉬우며 비틀거리는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고부동하고 신실하며 끈기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우리는 율법을 갖고 있으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 여인처럼 우리 모두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우리는 율법에서 정죄를 받았다.

율법이 무력하므로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 사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심으로써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셨다.

그러나 롬8;3,4절을 볼 때 우리가 그저 율법의 정죄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새 마음과 새 영)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율법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지셨다.

그 분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대속하는 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려고 죽으셨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기초로 삼으셔서 신자들을 모든 죄에서 의롭다 하실 수 있었다.

 

“...육신에 죄를 정하 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3,4)

다른 말로 하면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모든 정죄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죄에서 떠나야 하리라.”

요한복음 8장은 칭의가 있으면 언제나 성화가 있는 법이므로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칭의는 성화가 아니다.

우리는 이룰 수 있는 무슨 선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죄악 된 생활을 떠나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기지 않으셨다. 정반대로 말씀하셨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나 그런 후에는 거룩한 생활을 하라.

그렇지만 칭의가 성화가 아니고 성화가 칭의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가 여하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품으신 바로 그 목적이다.(롬8:3,4절)

칭의는 죄의 형벌에서 해방이며 성화는 죄의 세력에서 해방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이 두 사역을 이루신다.

 

출처 : 마라의 웃물
글쓴이 : 이의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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