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II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죄는 종이에 엎질러진 기름과도 같다.
종이 위에 엎질러진 기름은 계속 퍼져나가 종이에 점점 스며든다.
또한 그것은 점점 몸을 파괴시키는 암과도 같다.
죄는 오직 자체가 우리 속에 온전히 침투한 후에만 우리 속에서 자체의 활동을 멈춘다.
죄는 우리의 생명에 영향을 미칠뿐더러 그것은 우리의 성격을 해치고 우리의 인간성을 망친다.
죄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인간 잔부를 점유해 나간다.
인간의 모든 지체와 부분은 죄가 서식하고 번성할 최 적소들이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 감정과 의지, 양심과 상상력, 모든 재주와 재능, 모든 경향과 성향 및 모든 고통과 기쁨이 모든 것은 바로 죄의 활동 영역들이다. 죄는 이러한 각 부분에로 자체의 독소를 투입시키고 파괴시키며 그것을 사단의 도구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전 자아가 죄로 삼투되기까지는 그것은 자체의 암적인 성장을 멈출 수 없다.
사단은 오직 우리 자신들이 모두 죄가 될 때에야 우리를 방임할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죄의 마지막 포화점에 이르기 되기까지 죄를 영원히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그 존재 자체가 완전히 죄가 되어버린 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언제나 점점 멀어져 가고 사단에게 언제나 점점 가까워져 가는 것이 지옥의 형벌이다.
“하나님과 교제를 구하라.”
현재 이러한 교제를 구하지 않는 자들은 후에 사단과의 교제를 영원히 지속해야만 한다. 현재 주를 가까이 하여 살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사단을 가까이 하여 살 것인가 양자택일의 문제이며 결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제 당신은 “예수가 당신을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이 말은 당신이 죄와 완전히 동일시되었을 만큼 당신의 전존재가 완전히 죄로 침투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예수께서 당신의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완전히 죄가 되어 지기까지 죄가 당신의 전 존재에 계속 퍼지고 있었다. 당신은 죄와 동일시되었을 뿐 아니라 죄와 통합되어 있었다.
죄인이란 육신을 갖춘 죄가 아니라 죄에 의해 포위되어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에 의해 무기력한 대상이 되는 자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그러한 죄로 삼으신바 되셨다.
그는 결코 죄인일 수도 없으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로 삼으신바 되기 위해 자신의 거룩한 존재 속으로 죄를 허용해야만 하셨다. (우리의 육체는 죽어 부활 시에만 바꿔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일 수가 없으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바 되셨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영혼으로 죄의 가장 두려운 요소 (죽음) 속으로 가라앉게 하셨으며 그러한 중에 그는 저항하기를 전혀 포기하고 그의 기민하게 민감한 인성으로 그러한 죽음에 삼키어지도록 허용하셨다.
그는 지옥의 맨 밑바닥도 더 이상 그가 겪으시기에 두렵거나 무시무시한 것은 아무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을 만큼 가장 흑암한 죄의 심연 속으로 자신을 빠치셨다.
그는 죄의 그러한 요소들을 받아 들이셨으며 그것의 어느 부분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러한 요소에 자신을 복종시키시고 그러한 것을 겪으셨다.
수난 중에 예수께서는 모든 죄인이 구주이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죄 값에 포함될 만큼 완전히 잃어진바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심에는 어떠한 꾸밈도 없고 오직 완전무결만이 존재한다.
주께서 죄에 양도하신 것은 죄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멸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을 공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운 이질적인 세력으로써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바 되도록 온전히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그에게는 실로 죄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느 특정한 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죄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셔야 만 했다. 그 죄는 바로 온 인류의 죄였다.
인류가 정죄 받은 것은 한 번의 범행 곧 우리 조상이 낙원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범한 단회적인 원죄 때문이다.
그 죄는 양적으로 측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피택자들이 백만이며 각자는 백만의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백만의 죄의 짐을 지셨다..”
죄의 영적인 성질이 이와 같이 양적으로 측량될 수는 없다.
우리의 모든 죄는 한 근원에서 유래한다.
모든 범행은 한 범행에서 일어난다.
예수께서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께는 그의 수난과 죽으심에서 죄의 본질적인 것 중 어느 것으로부터도 피할 수가 없으셨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셨더라면 그는 그의 피택자들 중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는 것은 어떤 특수한 죄들 때문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범한 이러 저러한 죄나 이 모든 총괄적인 죄 때문이 아니라 죄란 단어의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죄 자체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보증의 말씀을 듣게 되기까지 곧 그 엄청난 긍휼에 대해서 순전한 사랑과 감사한 마음으로 당신의 구주시오 피난처이신 중재자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과 그가 죄의 특성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 그가 당신을 위해 죄가 되셨다는 것과 이러한 놀라운 이적에 의해 예수 안에 있던 의가 당신의 것이 되었다는 보증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당신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없고 당신의 영혼을 위한 어떠한 해방감이나 자유 함을 얻지 못한다.
온 영혼을 다 바친 헌신이 언제나 당시의 영혼의 경험이 되어 왔는가?
낮이나 밤이나 쉴 때나 일 할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무리와 함께 있을 때나 당신의 영혼의 온전한 정감이었는가?
슬프게도 이렇지 못한 인간의 마음은 실로 초라할 뿐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깊고 검푸른 바다가 파도칠 때와 물결들은 게으름의 자기 본위와 오만함의 물결들이다. 이 물결들이 때로는 깨끗하고 투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생의 갈등의 폭풍이 그 물결들을 격동시키는 순간 그 물결들은 거품을 일으키고 들끓게 하고 맨 바닥에 깔린 더러운 것들을 표면에 떠오르게 한다.
구주에 대한 당신의 사랑의 열정이 언제나 뜨겁게 명시되어 있는가?
당신이 지금까지 언제나 그분을 기억해 온다는 것이 가능 했는가?
당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식하여 당신이 특별히 괴로운 때에도 그를 부인하기란 실로 불가능 했는가?
한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의 힘으로 구주를 가장 잘 믿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도들이 표현했던 감정이 당신의 입에서도 쇄도해 나왔다.
“모든 사람이 예수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예수를 위해 내 생명을 제물로 바치리라.”
하지만 당신의 경험은 그러한 낙관이 보증되었음을 입증해 왔는가?
당신이 예수에 대한 사랑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러우며 그를 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는가?
십자가는 당신에게 단지 보복을 요구하는 폭행이나 잔악한 만행을 암시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은 분명 징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의에 대한 실례와 영원하고 불가해한 하나님의 사랑 에 대한 증거를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해 암시되는 두 가지 유형의 반응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십자가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한 그 잔인한 군인들이 넌더리나게 구는 자들로 느껴지는 한, 그 제사장들이 당신의 피를 끓게 하고 그 모든 자들이 당신의 의분을 일으키는 한 바로 당신은 제사장들과 이들로부터 파송되었던 자들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살해당한 무죄자의 편을 드는 선하고 고결한 사람인양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예수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시게 하기보다는 당신이 예수를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 당신은 골고다에서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를 고결한 자로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정죄하기 보다는 예수를 잘 못 해했던 자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십자가에 대해 그러한 반응을 용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 자신이 골고다에서 회개하고 그 군인들과 그 동조자들의 죄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죄를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당신이 두려워해야할 것은 예수의 죽음에서 나타난 잔학성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죽어야 했을 영원한 죽음의 가공성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이 예수께서 사람들과 천사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셨던 그 의미심장한 장면을 주시하는 동안 당신이 당신보다 거룩한 자세를 취하고는, 한 무죄 자에게 가한 폭행의 비속성에 대해 불쾌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과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공의를 장엄하게 명시해 주고 있음을 깨닫기를 요구한다.
예수의 죽으심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고 외부적인 것들로 판단할 때 그것은 단지 잔인하고 포학한 비행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단순한 불의가 아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예수께서는 무죄한 자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분 이전이나 그 후 어느 죄인에게서 보다도 죄가 더욱 무겁게 지워진 자로 죽으셨다.
하나님의 진노 곧 예수로 피를 흘리게 했던 그의 두려운 진노는 죄 없는 자에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다면 거룩하신 자께서는 불의한 자가 되셨을 것이며 전능자께서는 의롭지 못한 하나님이 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는 폭행이 아니라 의를 나타낸다. 그가 지신 십자가는 엄청난 불의가 아니라 의로운 벌이었다. 당신은 이러한 사실을 기꺼이 인정해야만 한다.
그 십자가가 당신의 영혼이 골고다에서 죽음을 통과할 수 있고 죽음에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다면 당신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거나 그와 함께 정죄 받는다.
당신은 가장 구속력이 상한 심판 곧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판결을 받고 형을 선고 받았으며 당신은 이러 저러한 벌금이나 투옥을 위한 선고가 아니라 최악의 형벌 곧 교수형이나 화형에 의한 것 보다 더욱 격심한 죽음을 위한 선고를 받은 것이다.
당신은 격렬하게 이를 갈며 영원히 울게 될 흑암 중에서 영원한 죽음에로 선고를 받은 것이었다.
누가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나는 죄인이며 정죄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인정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누가 감히 “만일 온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창기와 세리들이 나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도 나보다는 덜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겠는가?
우리 중 누가 이런 마음 자세로 골고다에 오겠는가? 누가 그곳에 와 자신의 죄와 격심하게 고통을 받으며 야유 받는 예수에게서 지옥에 떨어질 자신의 영혼을 보겠으며 누가 그곳에서 “그 온유하고 거룩한 예수께서 나로 구원을 얻도록 하기위해 그 두려운 형벌을 받으셨다.”고 믿을 것인가?
이러한 것은 여전히 누구에게서나 그 십자가 앞에서 해야만 하기에는 마음 내키지 않는 고백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속죄 희생을 치르기로 하셨던 예수께서 당신에게서 그의 참된 영광을 얻으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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