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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음과 부활III

davidtheking 2008. 6. 22. 13:29

                                                                                죽음과 부활III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롬5:9-11)

9절과 10절은 신약에서 흔히 나오는 ‘이미’와 ‘아직’ 곧 그리스도께서 초림 시에 이루어 놓으신 일과 재림 시에 이루려고 남게 놓으신 일, 우리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간의 긴장에 대한 두드러진 예이다.

구원에는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뿐만 아니라 미래 시제도 있으며 이 두 절에서 공통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진술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급한 복음주의자가 우리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만큼이나 성경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죄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내주하는 죄에서 해방되거나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몸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너무나 오랫동안 멈추어 서 있었으며 사도 바울의 이 역설적인 선언의 의미를 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한 쪽으로 지우치게 된 영적인 원인은 속죄에 대한 그의 독점적인(배타적인) 강조와 속죄 받을 죄인의 발 앞에 놓여 진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실제적인 무시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속죄가 이루어져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였다.

그들에게는 속죄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보였다.

속죄와 구속은 자주 교체되어 사용된 단어들이다.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그리고 구원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그 아들의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생명에 의해서, 곧 그의 생명에서 기인하는 능력과, 지금도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매 순간 우리의 영혼 속에서 계속 성취하시는 역사에 의해 받는다는 취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확언했던 것과는 다른 노선의 사상들로 분망해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오류에 의해 참된 기독교 신앙에서 거짓된 기독교 신앙, 활력을 결여한 기독교 신앙, 곧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서도 부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므로 신선함, 활기와 영감을 결여한 삶에서 부지불식간에 떠났다.

이러한 결과 그들은 잘못된 것을 강조하여 따라야만 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이 지나간 오래 전에 있었고 속죄는 성취되었으며 이 세상은 정복되어 왔다고 말했다.

따라서 자신들은 오직 속죄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 자들은 자신들은 오직 20세기 전에 지상에서 사시고 고난 받으신 역사적인 예수와만 관계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므로 이들은 단지 예수와 기억과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교제만을 가질 뿐 그 이상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교제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살고 번성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비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사람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이 일어나는 것,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자들로서 우리가 특별한 의미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그의 영향력을 발휘하심에 있어 매일 매 시간 분주히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그리스도를 결합하는 유대가 일순간이라도 끊어진다고 가정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는 그의 활발한 영향력을 잠시라도 억제하신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한 경우에는 신자의 어떠한 회중도 식별할 수 없게 될 것이며 기독교 신앙은 사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많은 기억과 전통이 한갓 비문으로 남을 뿐 더 이상 생명의 원천으로는 남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인간의 형상을 취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그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로써 현재 그가 성취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들을 할 수 있으셨다면 왜 두려운 중간 시기가 있었을까?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 성취 간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 전의 영원한 말씀의 역사와 승천후의 그리스도의 역사 간을 면밀히 분별해야만 한다.

여기서 본질적인 차이는 물론 성육신 자체에 있다.

성육신 전에 지상에서 자신의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이 세상과 자연스런 관계에 계시며 우리들 중 한 분으로서 우리의 자연스런 머리와 왕으로서 그의 역사와 영향력을 우리에게 일으키시는 분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제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 속하신다.

그는 잠시 동안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에서와 그 후에는 여전히 인간으로 계셨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인간으로서였을뿐더러 그는 인간으로서 하늘에 오르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인간으로서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형제들인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가 인성을 취하신 것은 다시 곧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그의 신성과 불가분리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서 연합시키기 위해 곧 그것을 영속적으로 보유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여기에서 생각하고 있는 미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소극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적극적인 것이다.

소극작인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9절)

물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그 진노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지금 그분과 화평을 누리며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있다는 의미에서 이미 그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역사가 끝날 때 바울이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 (2:5)이라고 부른 결산일이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그 분의 진노가 쏟아 부어질 것이다.(2:8)

앞으로 닥칠 그 진노로부터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신자들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이미)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표현으로 우리는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10절)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자기 백성들이 스스로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 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으며 마지막 날에 그 분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현재의 반쯤 구원 상태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구원될 때를 간절히 고대한다.

하지만 그 최종적인 구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바울이 9절과 10절을 쓴 이유는 주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둘 다 ‘한 층 더한 이유로’ 혹은 ‘더욱...할 것이다.’는 논증이다. 두 구적의 기본 구조는 똑 같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다른 어떤 일은 더욱 일어 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대답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9절) 화목 되었다(10절)이다.

둘 다 십자가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9절상) 다른 한편으로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다.‘(10절상)

그러므로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셨으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집으로 맞아 들이셨다.

그렇다면 논리는 이렇다.

만일 하나님이 어려운 일을 하셨다면 그 일을 완수하는 비교적 간단한 일도 하시리라고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라는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의 칭의를 이루셨다면 더욱 그분은 의롭다함을 받은 그분의 백성을 자신의 최종적인 진노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의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자신과 화목 시키셨다면 화목을 이룬 친구인 우리의 구원을 더욱더 완성하실 것이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근거이다.

 

바울이 글을 쓰면서 자주 사용한 성경 해석 원리 가운데 하나가 더 작은 것이 참되면 더 큰 것도 틀림없이 참된다는 논리를 쓴다.

여기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오는 한 예가 있다.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분명히 우리가 악한자라도 우리와 친한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야할지를 안다면 (이는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가벼운 부분이다)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이는 무거운 부분이다)은 그 자녀에게 더 잘해 주실 것이다.

이 경중 논리와 관련된 두 번째 원리는 정 반대로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으로 전개하는 논증이다.

이 원리는 큰 것이 참되면 같은 범주에 속하는 더 작은 것도 분명히 참될 것이라고 논증한다.

화목에 대하여 말하는 10절과 11절의 원수에서 훨씬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권하시는 근거가 하나님이 그 사랑 때문에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원수라는 말은 우리가 거룩하신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어찌나 지독하게 대적하는지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이상을 숨김없이 철저하게 억누르고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멸망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거나 우리 삶과 관련하여서는 적어도 하나님의 영향력을 없애 버리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그와 같은 상태로 있을 때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신과 화목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화목 한다는 말은 서로 원수 되게 한 이유를 없애고 원수관계에서 친구관계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이 낱말은 우리를 원수 된 데서 벗어나게 하여 특권을 가진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권속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딸로 삼으셨다면 심판 날에 마지막 진노를 쏟으시는 데서 우리를 틀림없이 건지실 것이라고 추론한다.

만일 하나님이 더 큰 일을 하셨다면 덜 한 일도 하실 것이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셨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친구로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부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속죄하셔야만 하는 것이며 2부는 인간으로서 그가 속죄된 죄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첫째 사역은 예언 시대에 시작되어 성육신에서 현실화 되었고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들 째 사역은 첫째 사역이 완성된 후에 시작되었다.

벽들은 오직 기초 공사가 완성된 후에만 세워진다.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시작된 둘째 기능은 오순절에서 예정대로 시작되었고 기독교 교회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 왔으며 오직 주의 재림 시에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첫째 사역은 자체의 후편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1부 사역이 우리에게 축복임이 밝혀지는 것은 2부 사역에 의해서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에 대해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우리의 영혼을 위한 자양물로 바꿀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속죄를 예비하고 제공하신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우리의 마음의 만나로 바꿀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주셨다는 신앙고백으로부터 그로 이 세상에 단지 잠시 동안만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부당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주셨다는 것은 그로 이 세상을 위해 죽고 세상으로부터 다시 분리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주신 순간부터 그는 세상에 속해 오셨고 그것의 생명과 결합되어 오셨으며 그것과 결코 다시 분리되지 않으신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고 구속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타락하고 부단히 더욱 타락하여 마침내 멸망에 돌입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주심으로써 구속을 초래하셨다.

하나님의 그러한 한 행위에 의해 모든 것이 변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세상 안에 숨기어 계시므로 세상은 멸망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로 남아 계신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으로 우리의 인성을 그의 신성과 결합시키실 만큼 인성을 꼭 포옹하신다면 그와 우리의 분리될 수 없는 연합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인성은 멸망을 모면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전능하신 사랑은 그 무덤을 지켜보시고 “그의 힘의 강력으로”곧 그의 거룩한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그의 생각과 뜻에 의해서 뿐 아니라 그의 신성의 모든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완전함이 존재한다.

그의 존재 안에는 역사하는 부분과 역사 하지 않는 부분 간에 더 이상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전 존재가 부단히 활동하신다.

바울은 역사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생명 자체라 부른다.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그의 능력, 그의 의지, 그의 신성, 그의 인성, 그의 영혼, 그의 영화롭게 된 몸이 아니라 한 군 단위로서 역할 하는 곧 조화 있고 상호 일심으로 작용하는 이 모든 것-요컨대 그것은 그의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중생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러한 점(구원에 이르게 한 것) 으로부터 멋대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신의 구원에 관한 한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을 구원하는 생명은 당신이 구원에로 부름받기 전과 후와 그 동안에 당신을 영원한 하늘나라에 매어주는 모든 끈을 잡아 조종하여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신다고 할 때 이 단어는 만일 그가 당신에게 역사하는 그의 영향력을 잠시라도 철회한다면 당신은 회복 불가능하게 잃어지리라는 것을 함축한다.

주께서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당신의 인간됨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처음부터 손을 쓴 당신 속에 있는 멸망의 요소들을 점진적으로 더욱 강하게 배격함으로써 그리고 말씀과 성례에 의해 당신에게, 멸망을 피하고 당신으로 주 안에서 자라게 하는 영생의 능력을 계시함으로써 이다.

 

출처 : 마라의 웃물
글쓴이 : 이의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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