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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음과 부활I

davidtheking 2008. 6. 22. 13:29

                                                                              죽음과 부활I

  “라마 사박다니”(시22:1)

무덤이 열리기까지는 목표에 이르지 못했던 주님의 수욕은 골고다가 아니라 구유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하게 된 것은 오직 그의 부활에 의해서이다.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의 수난은 오직 그 찬란했던 부활에서만 그 진가가 파악될 수 있다.

우리가 사도들을 주시해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이해할 수 있다.

겟세마네에서의 심한 졸음에 의해 사도들은 감각이 무디어 졌었다.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후 그들은 그가 모든 수난을 당하고 그의 영광에 들어 가셔야만 했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몇몇 사람이 예수의 죽음의 날인 즐거운 금요일 저녁에 성찬식을 거행하기 원했을 때 사도 요한과 하나님의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간의 분리 관계에 이의를 제기했다.

따라서 부활 주일 아침에는 그리스도의 부활 뿐 아니라 죽음을 상기하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의무이기도 하다.

즐거운 금요일이라는 것은 이 날이 영광스러운 부활 주일 아침에 이르는 방편으로 여겨질 때에만 그렇다.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을 충분히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괴로움과 슬픔의 범위와 그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카락을 세시는 만큼이나 확실히 우리의 눈물방울을 세신다.

우리는 우리의 눈물을 그의 병에 담으신다는 말씀을 읽게 되는데 그러한 진술은 하나님의 연민이 그 범위에 있어 너무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우리의 혹독한 괴로움을 동정적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언젠가는 그러한 괴로움을 영광으로 변화시키리라는 것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자녀들이 모든 고통을 낱낱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알고 계신다. 곧 그는 그들의 눈물뿐만 아니라 한숨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

지상에 있는 우리 친구들 중 가장 친한 벗이라도 우리의 슬픔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이해하시는 만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불어 은밀히 씨름하는 모든 근심 걱정을 익히 아신다.

우리가 형언할 수 없고 우리로서는 이유를 들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낄 때 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의 원인을 통찰하셨고 그것을 그 출처까지 간파해 오셨을 뿐더러 우리영혼의 은밀한 괴로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수난과 괴로움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괴로움을 아시는 만큼 상세하게는 결코 알 수 없다.

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혼이 결정적으로 기가 꺾이게 되는 말, 곧 그 말을 듣게 될 때 마음에 결정적인 충격을 주는 말을 한다.

비록 우리가 그 이유와 방법은 진술할 수 없지만 겟세마네에서 겪은 슬픔과 골고다에서 당하신 고통이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어느 인간의 것들 보다 심원했다는 것과 그것은 예수 외에 누구도 결코 경험한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고 직감으로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같이 알고 있을 뿐 그 수난의 심원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곧 그것은 여전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주님의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부르짖음을 읽어 볼 수 있다.(막14:36)

우리는 또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탄식을 듣는다.(마26:38,막14:34)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으로부터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다. 우리는 그로부터 “내가 목마르다.” 라고 헐떡이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가 그의 아버지께 라마 사박다니라고 발했던 두려운 부르짖음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로 일찍이 아무도 그가 엄격하게 겪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가 고통스럽게 겪었던 일을 겪은 자는 결코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수난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것은 “이러 저러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십자가의 죽음이 두려운 죽음임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더욱 참혹한 죽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순교자들에 대한 저서에서 그들이 얼굴에서 가슴에까지 피부가 벗겨져 왕벌 집에 가까이 놓여졌다. 는 것을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순교에 대한 이 음울한 책에서 또 다른 잔학행위에 대해 읽게 될 때 우리는 육신적인 고통에 관한 한 일찍이 아무도 골고다에서 예수께서 겪으셨던 것보다 더 가혹한 고통을 겪은 자는 없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셨던 육신적인 고통이 그곳에서의 그의 수난을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십자가가 그의 고통을 격화 시켰고 그것의 일부를 초래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지나가기를 기도하셨던 잔이 그분 곁에서 죽었던 강도와 같은 죽음 이상의 것을 내포하지 않았다면 주님의 고난은 엄청나고도 포괄적인 수난이라 불리어 질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은 포괄적이고, 필연적이며, 엄청난 것이었다.

시41:7“오 나의 하나님!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이와 같은 포괄적인 고난을 겪은바 없다.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다.

실로 그는 이 시를 자신에 대해 읊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예건으로 마음이 팔린 상태에서 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에게 알리고 사전에 증거 하신 분은 그리스도의 영”이었다.

거대한 파도들이 우리의 지친 머리를 향해 겹겹이 세차게 몰려오면 우리는 힘없이 머리를 숙이게 되고 요란하게 부셔지는 파도들 위에 다시 들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생각해 보라.

 

‘모든 하나님의 파도와 모든 전능자의 물결’이러한 표현이 암시하는 바는 이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 여하한 설명도 불허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에는 무한한 의미가 있듯이 하나님의 진노의 세찬 파도들에도 무한한 파괴력이 있다.

거품을 일며 소동하는 이러한 파도들은 죄에 대한, 소름끼치게 하는 영원한 격노를 나타낸다.

그 깊이를 잴 수 없고 폭의 무한한, 일정하게 집중적으로 몰려오는 거센 진노의 파도들이 예수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난의 근본적인 성격이다.

곧 이것이 슬픔의 사함이 겪으신 불가해한 신비에 속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알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셨다.

곧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로 하나님의 진노의 모든 짐을 지셨다.

그 짐은 당신과 나와 우리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되었을 진노로부터 모면케 하신 긍휼의 깊이 또한 측량할 수 없다.

그리고 한 죄인까지도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자를 정죄와 고난의 물결 속으로 떠 밀어 넣었던 죄악의 깊이 역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식물의 씨앗의 비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숨은 비밀과 예정설,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듯이 예정된 사람은 예정된 자로써의 그 열매가 예정자의 예정됨을 증명 되어야 하며 구원 받은 자는 구원 받은 자의 삶이 증명되어야 한다.

즉 구원의 황금사슬(롬8:29)의 각 사슬들이 그 열매들로써 엮어져 나가는 것이다.

근거 없는 이론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가 증거 되어져야 한다.

약2:17,18“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흑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와 같이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요1서2:21“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1서2: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토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1서2:27)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두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주께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사 게바에게 보이시고”(고전15:4)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행1:5) 성령 세례를 받은 제자들의 삶이

사도행전과 서신 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같이 변화된 삶을 살고 간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그들의 성정과 우리의 성정은 꼭 같이 창조되었으며 꼭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고 같은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같은 길에서 같은 인도를 받는다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믿음의 행위에는 차이가 있을 지언정 삶의 목표와 푯대는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분을 믿었다면, 그분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들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 말씀은 이 땅에서 필요하며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기록들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성경이 필요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할 말씀이다.

말씀이 오류인가 우리의 신앙이 오류인가? 개혁과 회개가 필요하다.

         

출처 : 마라의 웃물
글쓴이 : 이의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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