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라(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엇을 안다고 하는 말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내가 무엇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생각이나 이념으로 아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삶을 통해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똑똑한 소경 과학자는 책을 통해 과학이 빛에 대해서 말하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빛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일지라도 똑똑한 소경보다 빛에 대해 더 많을 것을 알 수 있다. 소경 과학자는 생각을 통해 빛에 대해서 알지만 어린 아이는 실제로 빛을 보고 즐김으로써 빛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인격체를 아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고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것이 있다. 그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지식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가? 성경 말씀을 많이 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성경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착각할 수 있다. 성경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상고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섬기기 보다는 대적하고 핍박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성경 박사들이 성경이 지향하는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다니! 왜 그런가? 성경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인격적인 체험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처럼, 성경 지식은 많지만 정작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모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가?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 많이 알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소경인 학자가 빛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아도 빛을 실제로 보지 못하면 빛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는 것처럼, 필자가 아무리 노 대통령에 대해서 많이 알아도 노 대통령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성경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모를 수 있고 성경 지식이 별로 없어도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
‘앎,’, ’지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학력 수준이 낮은 사람도 읽고 예수를 통한 구원을 알 정도로 쉽게 기록되었지만 성경을 깊이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성경 자체가 수천 년 전에 우리와 전혀 언어나 문화가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어떤 한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언어나 문화적 습관을 제대로 알아야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2천 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수많은 주의 종들이 뛰어난 이성과 논리를 사용하여 성경을 체계적이고 주제별로 잘 정리해 놓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성경을 객관적이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들의 안내자이자 선생으로 사용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구하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야 한다.
하나님은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여서 무엇을 계획하거나 행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삶은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하고 실질적인 종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과 합쳐진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둘째,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 지식은 물론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면서 말로는 체험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문자 세대는 이성적 논리적이기 때문에 성경 내용을 이해한 후에 믿는다. 그러나 감성 세대는 느끼고 체험한 후에 믿는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알다’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성경이 말하는 ‘알다’라는 단어는 이성적 이고 논리적 지식은 물론 감성적이고 체험적 지식을 포함한다. 헬라적이고 서구적 사고는 이성적, 논리적, 분석적이지만 히브리적이고 동양적 사고는 경험적, 직관적, 통전적(전체적)이다.
‘알다’의 히브리어인 ‘야다’는 그 말 자체가 경험적으로 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창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지식,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에 더하여,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관계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은 이성적 논리적 지식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람의 교제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의 결과이다.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J. I.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이렇게 구분했다.
그는 말하기를,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다. 신학, 신앙 고백, 하나님에 대한 주제들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많은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친교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도 경건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외적인 경건이나 선행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란 단어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적 경험적 측면에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다. 이때의 하나님은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양이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 다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다. 이때 하나님은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는 분이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하나님을 배웠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관계가 더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이다.
필자가 조금 전에 말한 3 가지 관계가 주로 상하 관계라면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는 연인 관계, 수평적인 관계이다. 우리는 이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그 다음 한 가지는,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체바오트)이신 하나님은 죄와 마귀의 권세에 대해 영적 전쟁을 치르시는 군대 장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영적 군사들이다. 이 주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성적 논리적으로 알아야 함은 물론 체험적이고 관계적으로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의 체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상당히 이기적이 되기 쉽다.
“나는 금식 기도 며칠 해서 이런 은사 받았다”, “나는 작정기도 얼마 해서 이런 문제 해결 받았다”와 같이 하나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만능 벤딩 머신, 내 요구를 채워주시는 로토 복권처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성령의 능력과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경향이 짙다.
이들은 은사 체험, 은혜 체험 많이 하고, 기도 응답 많이 받으면 신앙 생활 잘하고 신앙의 수준이 높은 것으로 착각한다. 과연 그런가? 필자가 ‘육신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에서 다루었듯이, 내 은사 자랑, 내 기도발 자랑 하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은 내 은사, 내 체험을 뽐내면서 교만하다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쉽게 시기하고 질투한다. 필자는 이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자기가 체험한 것이 캇트 라인이고, 다른 사람이 자기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했다고 하면 깎아 내린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식으로만 하나님을 아는 분이 있는가? 만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문제라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성경 내용을 많이 알아도 주님은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아무리 기사와 이적을 행하더라도 삶 속에서는 불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을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인도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과연, 여러분은 내 자신이 주님을 알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님께 알려졌는가? 나는 주님을 잘 아는데 주님이 날 모른다고 하시지나 않는가?
내가 주님에 대해서 알 뿐만 아니라 주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알아야 한다. 동시에 주님도 나를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아실 때 내가 주님의 양이 된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과 이런 관계에 있는가?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우리는 흔히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럴 때의 믿음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이 하신 일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란 말은 예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돈 나와라 뚝딱, 문제 해결되어라 뚝딱, 병 나아라 뚝딱, 교회 성장 되어라 뚝딱 이란 식으로만 예수님을 알아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소유, 사역, 관계, 존재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원하는 것을 가지고(소유, having) 원하는 일을 하는 것(사역, doing)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다 보니 더 중요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relating)나 인격과 같은 성품 계발과 같은 존재의 변화(being)는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지만 나중에는 고급 기술개발을 해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우선 급하다고 소유와 사역에 치중하다 보면 결국은 기쁨이 없고 탈진되어 마침내 답보 상태에 빠지기 쉽다.
신앙의 지속적인 성장과 현세적 축복과 의미 있는 사역을 위해서도 관계와 존재를 계발해야 한다. 새마음 훈련은 이 분야의 계발을 도와준다. 관계와 존재가 신앙의 본질이며 소유와 사역은 이것들을 위한 수단이자 이것들에서 파생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순서가 바뀐 신앙 생활을 해왔는가? 관계나 존재는 소홀히 한 채 소유와 사역을 위해 얼마나 몸부림쳐 왔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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