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과 육신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어떤 자매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살면서 외동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아들이 십대가 되면서 소녀들과 데이트 하자 그것마저 못마땅했다. 그녀는 이 핑계 저 트집을 대면서 아들이 사귀는 소녀들을 떼어 놓았다. 자기 삶의 유일한 지주인 아들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즈음, 그녀는 아들이 집 근처의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아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입학했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과 간섭에서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이렇게 행동하자 그녀는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으로 인해 한동안 자신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내가 어떤 고생을 하면서 길렀는데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 .”
그러던 중 이 자매는 모처에서 영성 훈련을 받으면서, 아들에 대한 모든 집착이 옛 사람의 잘못된 행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훈련을 한 결과 아들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마침내 자아의 집착으로부터 아들을 떼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으니 아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기는커녕 아들에 대해 성숙한 애정과 관심이 더욱더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이제 아들은 더 이상 그녀의 대리 만족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기업이 된 것이다.
이후 아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는 아들과 더욱 성숙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아들도 어머니의 변화를 알아채고는 더욱 성숙한 자녀이자 신자로서 이전에는 나누지도 않았던 깊은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놓아줌으로써 더욱 멋있는 아들을 얻게 된 것이다.
다음의 간증도 비슷한 내용을 말한다.
“마음의 죄를 내려놓으려니까 회개를 해도 끝이 없던 것 같았는데, 마치 회개만 영원히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이제야 조금씩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깨달음이 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눈이 떠지기 시작한다.
정말 부드러운 마음, 새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깨달아진다. 새 마음이 드니까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다. 마치 어두움에 있다가 빛으로 나온 것 같다.
내 속에서 소용돌이 치던 것들이 죽고 주님의 맑음이 다가온다. 나에 대하여 걱정하던 것들이 헛되었음이 깨달아지며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이 밝히 눈앞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남편에 대한 집착조차 바로 나에 대한 집착이었음을 깨달았다. 남편이 아니라 남편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니까 얼마나 마음이 자유로워지는지 모르겠다. 이제야 남편을 위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자식에 대한 집착이 벗겨져서 그들이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들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긴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새 마음, 이것은 바로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군요. 부드러운 마음, 말로만 알던 것이 저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네요. 새마음 제자훈련의 가장 귀한 결실은 바로 새 마음 그 자체이군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려 합니다.
주님, 더 크고 더 놀라운 주님의 자유의 세계로 나아가려 합니다. 성령님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런 진리가 어디를 통해서 깨달아지는가? 새 마음 곧 속 사람을 통해서 깨달아진다.
겉사람이 깨어지고 속사람이 형성되는 과정
일반적으로 겉사람이 깨어지고 속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은 몇 가지가 있다.
속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적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다.
거짓말쟁이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기 보다 더한 삼촌 라반을 만나 20년 동안 연단되는 과정에서 겉사람의 거짓 자아가 깨어지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갔다.
모세는 40년, 요셉은 십수 년, 다윗도 십수 년의 연단을 통해 겉사람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둘째 하나님의 갑작스런 은혜로 겉사람의 강한 껍질이 깨어지고 속사람이 형성되거나 성숙된다. 자기 의에 차서 예수님을 대적하던 청년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대적자에서 예수님의 전파자로 변신했다. 강한 성령 체험을 통해 자아의 단단한 껍질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속사람이 생긴 것이다.
셋째 경건의 훈련을 통해 속사람이 영글어져 간다. 거짓된 자아의 겉사람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속사람은 갑자기 형성되기도 하고 점진적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가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경건의 훈련을 지속할 때 우리의 겉사람이 서서히 깨어지고 속사람이 영글어져 간다.
마지막으로, 새마음 제자훈련을 통해서이다. 경건의 훈련이 콩나물 시루 방법이라면 새마음 훈련은 외과 수술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콩에 물을 부으면 물이 밑으로 빠지지만 물을 품은 콩이 자라서 콩나물이 되듯, 우리는 경건의 훈련이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속사람이 자란다.
그러나 이런 방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상처나 죄악은 성령의 인도로 내가 은혜의 방편들(말씀, 기도, 찬양 등)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치유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다.
의사가 상처 부위를 찾아내어 필요 없는 것은 잘라내고 고름이 있으면 짜낸 후 치료하듯, 새마음 제자훈련은 내가 잊고 있지만 내 속에 쌓여있는 상처나 죄악을 성령의 도움으로 찾아내어 치유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회개와 채움의 새마음 훈련과정을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행할 때,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놀라운 영적 진보를 맛볼 수 있다.
진리가 주는 자유함
새마음 제자훈련을 많이 하여 마음이 새롭게 되고 죄의 껍질이 벗겨져서 속 사람이 강건해지면 이 모든 것들이 죄악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이전에 그렇게 집착했던 학식, 은사, 사역, 자녀 등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 욕망의 산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들이 나를 자유케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멍에와 속박이었음을 알게 된다.
새마음 제자훈련을 하노라면 마음이 점점 새롭게 되면서 이런 욕망의 집착의 껍질이 벗겨지는데, 이런 것들이 겉 사람이 되어 나의 속 사람이 드러나는 것을 가로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엇을 많이 가지고 무엇을 많이 하면 자유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에 속고 있다. 존재 자체의 변화가 없는 소유나 성공은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내가 어떤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통제하고 조정하게 된다. 사람도 통제하고, 물건도 통제하고, 다른 것도 통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허전하고 허탈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런 것들에 대한 집착이 바로 영적 진보를 가로 막는다.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그러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충성스럽게 섬겼고 열심히 봉사했는데 내가 다시 자유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자유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잠에서 깨어나봐야 내가 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내가 진정한 자유함을 맛보아야 이전에 내가 멍에와 속박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은 이성과 논리로 오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어떤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체험으로 오는 것 같다. 내 마음이 새롭게 되어 속 사람이 강해질 때 갑자기 무엇인가 뻥 뚫리거나 답답한 뭐가 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낀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말한다. 해탈이란 도를 닦는 중 ‘속세의 번뇌와 속박을 벗어나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전의 기독교 영성가들은 이것을 아파티아(apatheia), 또는 애퍼시(apathy)라고 불렀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냉담,’ ‘무관심’이란 뜻이지만 다른 뜻은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필자가 앞에서 설명한 ‘솔 타이’(soul tie)를 끊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하나님 보다 더 좋아하고 시간을 투입하고 마음을 두면 그것과 영적 ‘솔 타이’가 생겨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솔 타이는 사람은 물론, 마스코트나 애완 동물 같은 것, 좋아하는 스포츠 관람, 영화 연극 관람 등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그것에 마음을 둘 때 생긴다. 그 결과 그것들을 하지 않으면 금단 증상이 생겨 견디기 힘들게 된다. 쉽게 말하면 나도 모르게 그런 것들에 ‘중독’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솔 타이를 끊으면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나 타이가 끊어져서 자유함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 욕망이나 집착이 강하면 솔 타이 끊는 것만으로는 잘 해결되지 않는다. 회개와 믿음의 과정인 새마음 제자훈련을 지속적으로 할 때, 어느 순간엔가 내가 이전에 그렇게 소원하고 집착했던 것과 타이가 끊어져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욕망과 집착, 그로 인한 염려와 두려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대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불교가 말하는 해탈은 그로 인해 세상과 멀리 하는 것을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이것과 다르다. 이런 자유를 통해 내가 더 이상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현실적이고 육신적엔 것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져서, 내 심령에 안식과 평강이 넘치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고 사물이나 이웃을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전에 돈에 집착했던 사람은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자녀에게 집착했던 사람은 자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명예나 사역에 집착했던 사람은 명예심이나 사역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집착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거두어 가시는 것은 아니다. 마치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가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신 것같이 우리의 마음이 이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돈, 자녀, 사업, 사역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아신 후에는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신다.
그런데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내가 집착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순간, 이것들이 나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초탈하고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객관적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런 것들을 더 잘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 잘 관리하고 더 잘 대한다는 말이다.
내 사업도 하나님의 것이요, 내 자녀도 하나님의 것이요, 내 재능이나 은사도 하나님의 것이요, 내 사역이나 목회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는 말이다. 겉으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대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진리가 어디를 통해서 깨달아지는가? 새 마음과 속 사람을 통해서 깨달아진다. 겉 사람이 강하게 역사하는 한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죄의 영향권 아래 있는 겉 사람은 소유하고 움켜쥐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원숭이가 자기 죽는 줄 모르고 손 안에 든 과자가 아까워서 움켜쥐고 있다가 사냥꾼에게 잡혀가듯, 돈이나 사역이나 자녀가 자기의 분신이 되어 있는 경우에는 남들이 아무리 비난하거나 욕해도 내려놓지 못한다. 놓아야 사는데 겉 사람이 강하기 때문에 놓으면 죽는 줄 안다.
그러나 마음이 새롭게 되어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면 이런 것들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마음이 새로워진 새 사람은 이런 것들 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아직 하나님께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 자아 집착, 자아 실현, 사업, 가족이나 자녀, 돈, 명예, 사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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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 충만과 내적 충만
물론 이런 체험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온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경우이다. 어떤 집회에 참석하거나 기도 중에 갑자기 은혜가 강하게 임하여서 세상의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infused grace), 즉 외적 충만이다. 이런 것은 대부분 소낙비가 퍼붓듯 갑작스럽고 강하게 임한다. 마치 폭포수가 흐르듯 강하게 임한다.
이런 체험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잠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고 세상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런 은혜는 시간이 지나면 죽, 죽 빠지고, 그 결과 다시 겉 사람이 드러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전의 감격을 쉽게 잊어버린다. 왜, 그런가?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기 못했기 때문이다.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그 은혜가 계속 우리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도 있다. 우리가 한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잘 사용하여 은혜의 통로가 막히지 않고, 받은 은혜가 빠져 나가지 않도록 내 마음 동산을 지키고 내 마음 밭을 잘 경작한다는 말이다.
이때 우리는 갑작스럽고 강렬하게 임하는 부어주시는 은혜와는 달리, 내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은혜(effused grace), 즉 내적 충만을 누릴 수 있다. 흘러나오는 은혜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듯(요
이 은혜는 봄 눈 녹아 흐르는 물이 얼음 사이로 흐르듯, 새 마음을 통해 강건해진 속 사람을 통해 흘러나온다. 이 은혜는 내가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겉 사람이 깨어지는 정도에 따라 끊임없이 내 속에서 흘러나온다.
때로는 부어주시는 은혜인지 흘러나오는 은혜인지 구분의 안 될 정도로 위에서 쏟아지고 아래서 흘러나오기도 한다. 새 마음을 통해 나의 속 사람이 강건해지면, 위에서 부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은혜의 강물이 흘러나온다.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죄이다. 자아(“I”)가 중심에 있는 것 곧 SIN(죄)이다. 그러나 속 사람이 강건해져서 내 속에서 계속 성령의 생수가 흘러나오면 속 사람이 강건해져서 겉 사람인 나는 온데간데 없고 예수만 보인다. 나의 속 사람은,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고(고전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예수님 발 밑에 앉아 주님과 달콤하고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포근하고 따뜻한 이타적인 마음으로 내 이웃을 섬길 수 있다. 내가 완전히 죽을 때 내 안에서 주님이 주인이 되시고 그런 나를 통해 주님이 겉으로 드러나실 때 온전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삶이 바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우리는 이런 체험을 통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안의 나”(Me in Christ)에서 만족하지 말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Christ in Me)로 성장해 가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나” 밖에 모른다고 한다. 신앙인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내 체험, 내 가족, 내 은사. 내 사역, 내 교회, 내 교단 밖에 모른다고 한다. 이것은 신령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 육신에 속한 사람의 태도이다. 신령한 사람의 태도는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살아야 한다. 나를 통해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나야 한다.
물론 믿는 자에게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어떻게 사시느냐 가 중요하다. 내가 주인이 되어 예수님은 한쪽 구석에 사시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가 가 중요하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말로는 주님(Lord)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주인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말은 물론 행동으로도 예수님이 삶의 모든 분야의 주인이 된 사람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목표를 향해 신앙 여정에 오른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내 마음은 물론 삶의 전 분야에서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사는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외적 충만과 내적 충만을 누리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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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내적 충만의 결과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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