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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크리스 해리슨 목사 내적치유 세미나] 1강-6강

davidtheking 2011. 8. 23. 16:13

[크리스 해리슨 목사 내적치유 세미나] 1강-6강

 

 

제1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1)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사랑을 경험하기 원하십니다. 체험으로 아는 하나님 에베소서 3장 16~19절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속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을 돌보시며 우리가 속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18~19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서」아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많은 정보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알지 못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열망이기도 합니다.

 

모든 아기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이에게 자유함과 자신감을 줍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를 보호하며 아이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또 위로를 얻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다 필요합니다. 아기였을 때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1. 치유의 어려움 - 소극적인 태도

 

저는 먼저 왜 사람들이 치유되기 어려운지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신명기를 보겠습니다. 30장 19~20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아이는 자라기 시작하면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정하는 자들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올바른 것을 선택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보겠습니다. 10장 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성경은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속도로를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대구로 간다고 합시다. 대구로 가는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그 고속도로가 끝날 때까지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혹을 피할 길을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결정을 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우리는 이것을「소극적인 태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은 첫째, 결정하기 어려워하고 둘째, 결정한 것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셋째, 소극적인 사람은 「예」혹은 「아니오」라고 말을 해야 할 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소극적인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라고 말을 합니다.

 

넷째, 소극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다섯째, 소극적인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생각하고 말합니다.「그냥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났어요」.삶의 모든 일들이 살면서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고 거기에 대해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슬픔 속에서 살아가고 쓴 뿌리와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섯째, 소극적인 사람들은 종종 화를 잘 내고 좌절감을 자주 느낍니다. 왜냐하면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조차도 못하고 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종종 화를 내고 좌절감을 느낍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소극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기를 매우 힘들어 합니다. 대인 관계에서 문제가 있고 가족관계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역 속이나 일 속에서 문제들이 점점 더 커져만 가는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소극적인 문제들을 치유해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소극적이라면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되는 소망이 없습니다. 변화될 소망도 없습니다.

 

 

2. 소극적 태도의 원인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첫째는 개인적인 근원에서 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 우리의 의지가 깨어졌다면 소극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의 마음이 상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아이의 마음이 상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지가 어떻게 깨어지게 됩니까? 어렸을 때 「하지마」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자랄 때 그렇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뭔가 하지 말라는 말만 듣고 자라면 의지는 깨어지고 소극적이 됩니다.

 

또한 너무 많은 책임을 갖고 자라게 될 때 그렇게 됩니다. 아마 부모님들이 너무 바쁘셨거나 부모님들이 어려움을 겪었거나 가족 안에 큰 어려움들이 있었거나 가족 안에 사랑이 없을 때 의지가 깨어집니다.

 

 

둘째 근원은 환경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배우고 싶지 않다고 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모님에게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이 소극적이면 아이들도 소극적이 됩니다.

 

두 번째 환경적인 원인은 종교적인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다른 종교를 믿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믿던 종교가 아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종교라면 소극적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운명적으로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소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세 번째로 국가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해서 점령당한 적이 있다면 우리는 아주 소극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가 점령당할 때는 땅만 점령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도 점령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점령당하고 있을 때는 「예」와 「아니오」를 자유롭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결정권이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치유 받아야 하는지 모를 때 상처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우리가 화를 내면서 살다 보면 쓴 뿌리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유케 되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치유되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쓴 뿌리는 증오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상처를 받습니까? 아이들입니다. 부모의 고통은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부모님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들도 어쩔 수 없이 부모들의 패턴을 답습하게 됩니다. 고통당하고 분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다음 세대로 내려가 4~5대까지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3. 상한 심령의 치유

 

잠언 18장 1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제가 살던 곳에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몸이 아주 약한 친구였습니다.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몸도 아주 마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동차를 운전했습니다. 기독교사역의 리더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해외로도 다녔습니다. 비록 몸은 약하지만 그분의 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이 강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 말씀에「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합니다. 밑 빠진 컵에다 물을 부어 봐도 물은 밑으로 새고 맙니다.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으면 이와 같습니다. 세미나도 가고, 교회에도 가고, 어떤 훈련 프로그램에도 참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메시지에 대해서도 반응을 합니다.

 

어떤 분이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것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변화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몇 번 하다보면 나중에는 반응을 하기에도 지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불신」이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변화를 받을 수 있고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는 것도 믿지 않게 됩니다. 우리 안에 상한 심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상한 심령을 치유해 주기 원하십니다.

 

 

제2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2)

 

 

1. 내적치유의 첫부분 - 깨어진 영

 

1)계속되는 슬픔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됩니까? 잠언 15장 13절을 보면 마음의 근심 때문에 심령이 상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슬픔은 하나님이 주신 감정입니다. 우리는 슬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에게 슬픈 일이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합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슬픔은 이렇게 가끔씩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슬픔 속에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저도 전에 이런 상한 심령을 갖고 슬픔 가운데 살았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베가 어머니 태속에 있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태어난 뒤 조부모님에게 보내졌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퇴역군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표현할 줄 모르셨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무언가를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옷도 주시고 음식도 주시고 장난감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져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하기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으셔서 지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7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셨습니다. 새 아버지는 말 수가 적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한번도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저를 칭찬해 주거나 만져주지 않았습니다.

 

결혼 한지 1년이 지나자 부모님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주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자주 술에 취하셨습니다. 아이는 부모님들이 싸우는 말을 들을 때면 언제든지 불안해합니다.

 

부모님들이 말다툼을 할 때마다 아이는 상처를 받습니다. 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갈 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술을 드셔서 얼굴이 굉장히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발 그만 좀 싸우세요. 두 분이 하시는 일이 제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줄 아세요?

 

그랬더니 부모님들께서는『너는 가서 잠이나 자.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야!』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부터 저는 부모님들이 싸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베개를 뒤집어쓰고 자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삶의 문제를 처음 갖게 되었습니다.『분노』라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제 자신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폭발해서 저는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을 때려주곤 했습니다.

 

잠언 15장 4절에 나오는 『패려한 혀』는 히브리어로 『거칠고 악하고 거짓말하는 혀』입니다. 이러한 혀가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보통 이러한 혀를 가진 분들이 권위를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심령은 갑자기 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상합니다. 부모님들이나 형, 언니, 오빠, 선생님, 상관, 지도자, 남편 등이 이러한 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영을 상하게 합니다.

 

 

3. 문제가정의 「상한심령」

 

상한 심령을 갖게 되는 세 번째 이유를 골로새서 3장 21절을 통해 보겠습니다. 상한 심령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문제가정 때문입니다. 가족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렇게 됩니다. 만약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으면 어머니가 짐을 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부담을 갖게 됩니다.

 

 

저는 문제가정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 가정은 부모님이 너무 바쁘시거나 어떻게 자녀는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는 가정입니다.

 

이럴 때 부모님은『사랑은 돈이다』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너에게 돈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언가를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가족으로서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대화하고 부모가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만져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아이들을 제자화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은 아이들을 주 안에서 온유하게 양육하라는 말입니다. 어머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해야 합니다.이것은 공동의 책임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부드럽게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자화가 교회에서 시작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자화가 가정 안에서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제자화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러한 가정에서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를 배우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가정에서 이 아이들을 제자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부모의 부모도 그러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세대를 거쳐 반복됩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벌만 주려 합니다. 『이것 하지마! 저것 하지마! 이런 것은 잘못된 거야!』라고만 합니다. 이것은 제자화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아이들에게 심한 상처를 줄 뿐입니다.

 

성경은 아비들에게 자녀와 상담하고 가르쳐주고 훈련시킬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정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천 가정에 복을 주시기 원하시고 치유하고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대화가 없을 때

 

두 번째 예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가정입니다. 저와 제 아내는 영국에 간호사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크리스천이고 말레이시아계 중국인입니다. 이 자매는 굉장히 수다스러웠습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자매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인이고 간호사였습니다. 그녀는 말이 없는 자매였습니다.

 

이 두 자매가 우연히 휴가 기간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인 자매가 중국인 자매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이 영국인 자매의 집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중국인 자매에게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습니다. 중국인 자매는『산도 아름다웠고 나무도 굉장히 컸고 공기도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데 영국인 가족들이 굉장히 이상해요

 

그 영국인 가족은 크리스천 가정이었습니다. 아침에 아버지가 일어나서 아무말 없이 혼자 식사한 후『안녕』하고 출근을 한 후 밤늦게 돌아옵니다. 그러면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한 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혼자 식사를 합니다. 그 후 TV를 보다 『잘 자』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어머니는 아주 착하고 조용하신 분이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사람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연약함이 있었는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똑같은 방에 앉아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의 영은 상하게 됩니다. 아이들도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 줄 모르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갈등과 좌절을 가지고 자라게 됩니다.

 

조용한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 안에는 많은 갈들이 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모든 것들을 가슴에 담아두고 삽니다. 그들의 부모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 문제가 자녀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리

 

세 번째 예는 무책임한 아버지가 있는 가정입니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가족과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로서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분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이들은 슬픔을 갖게 됩니다.

 

네 번째 예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경우입니다. 아버지가 멀리서 근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끔 아버지가 오시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제 경우처럼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경우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원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외도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경우입니다. 어릴 적에는 『신실하지 못하다』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그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것이 신뢰를 깨뜨려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고 혼자 외로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가정에서 자랐다면 그것이 우리의 영을 상하게 합니다. 상한 심령은 밑 빠진 독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고 변화되기도 성장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쉽게 불신을 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6장 2,3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척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부모님을 공경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부모님을 공경하지만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부모님을 공경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완전한 인간 완전한 하나님

 

우리가 많은 상처를 받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문제가정 속에서입니다. 이런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겪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십니다. 성경을 봐도 완전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당신, 내 동생이라고 해야 해!』자신이 살려고 아내를 누가 데리고 가도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도 그렇게 합니다. 노아는 술에 취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순한 사실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사람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문제 가정의 아픔을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치유하고 회복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은여생을 고통 가운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 생활에서도 이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자녀들의 세 가지 기본적인 필요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무조건적인 용납입니다.

두 번째,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이 세 가지를 기본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물론 사랑도 포함이 됩니다. 제가 맨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모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크리스 해리슨 목사 내적치유 세미나]

제3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3)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

 

어떤 것이 우리의 삶을 막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막히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도 받을 수 없고, 또 다른 사람에게 사랑도 줄 수 없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4절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실수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제게 상처를 주었던 일 중의 하나는 어머니가 저를 보며 「내가 너를 원해서 낳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은 제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거절감.

 

우리 삶을 막는 것 중의 하나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거절당했을 경우입니다. 가족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남편과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직업을 갖고 있을 경우 계속 일을 하고 싶어서 아이를 낳는 것을 원치 않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대만에서 임신한 어느 자매를 위해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 자매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제가 임신을 했는데 저는 이 아이를 미워합니다. 이 아이를 낳으면 남편은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합니다.』그래서 시간을 가지고 그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에는 이 자매가 배에다 손을 얹고

아이를 축복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 자매의 삶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3년 후 다시 그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때는 아이가 둘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아기가 뱃속에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말했습니다.『저 이제는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어요.』하나님께서 그 자매의 삶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성(性)으로 태어난 아이

 

두 번째로 부모님이 기대했던 성과 다른 성으로 태어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태어나는 아이는 굉장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저와 제 아내가 인도네시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를 믿게 된지 얼마 안 된 가정에 가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그는 21살 된 자기 딸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딸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셋째인 17살 난 아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이 있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구석에 있었습니다. 소개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둘째에게 심각한 병이 있다거나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둘째를 소개해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30분쯤 지나자 둘째를 어머니가 소개해주었습니다.

 

첫째 딸이 태어났을 때 부부는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아들이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둘째도 딸이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그 딸이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딸에게 아들 이름을 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셋째는 그렇게 바라던 아들이었습니다. 첫째 딸과 셋째 아들은 사랑했지만 둘째 딸은「낭비」였습니다. 그렇게 17년을 살아왔습니다. 관계 속에 분노와 시기, 거절감 등의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둘째는 아들이길 바랐지만 딸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랑은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사랑한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순수하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되는 비난

 

세 번째는 계속적으로 비난받는 경우입니다. 잠언 18장 21절을 보십시오. 혀는 아주 강력한 것입니다. 죽고 하는 것이 혀에 달려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를 할 때 서로의 말은 굉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생명을 줄 수 있는 힘이 있고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아시아에 처음 왔을 때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 한 중국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젊은 부부에게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할머니가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아이를 하루 종일 안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어쩜 너는 그렇게 못생겼니. 너는 쓸모없는 아이야, 너는 바보야』이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이가 말 한 것과는 반대로 자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자라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자신이 못생겼고 쓸모없고 바보 같다는 것입니다.

 

또 어느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정에는 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화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말이었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듣지를 않았습니다. 대화는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범합니다. 남자 여자 남편 아내 할 것 없습니다.

 

 

불의한 처벌

 

불의한 처벌은 아이들에게 손상을 줍니다. 그런 것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가정 안에서 일어납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든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문제가 있다든지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다 실수를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어느 아이가 우유를 쏟았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엄마는 쏟아진 우유를 보고 불같은 말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아이가 그런 일을 하면 안에 있던 것들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게 되면 엄마와 아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엄마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경우도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는 편안히 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TV를 보고 있을 때 아이는 아버지를 방해하면 안 됩니다. 아이는 조용히 들어옵니다. 문도 살짝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열려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문을 쾅 닫았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아이를 때립니다. 이 아이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벌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하게 처벌을 받을 때는 많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부모는 홧김에 아이를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으로 아이에게 벌을 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화가 쌓이고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에게 벌을 주는데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는 이상하게 됩니다. 그 관계 안에는 분노가 있게 됩니다.

 

 

조건적인 사랑

 

우리 삶이 막히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조건적인 사랑」때문입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뭔가 상대방에 대해 기대하고 있을 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잘하거나 성취하게 되면 처음에는 부모님들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항상 자녀들에게 뭔가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이것으로 인해 큰 압박감을 느낍니다. 공부를 할 때도 자신을 위해 공부 한다기보다 가족을 위해 공부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레이시아의 한 크리스천 가정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었습니다. 이아들은 처음으로 싱가폴에 가게 되었습니다. 16세 정도였습니다. 싱가폴의 교육수준이 말레이시아보다 나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적표가 왔습니다. 성적이 아주 우수했습니다. 그런데 지리과목만 B+가 나왔습니다. 첫 학기였는데 아주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 아들이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받았는데 그 아들에게 『얘, 너 굉장하구나. 네 목소리 들으니까 참 좋다. 보고 싶다. 사랑 한다』그렇게5분간이나 아들에게 이야기를 한 후 아버지를 바꿔주었습니다. 아버지는『아들아, 너 지리공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말한 후 다시 엄마를 바꿔주었습니다.

 

이런 조건적인 사랑은 우리를 한계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이 부모님들은 아들을 그 한계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깊은 상처를 갖게 되고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갖게 됩니다.

 

 

버려짐

 

한 가지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버려두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버려두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서적으로 버려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 안에 사랑이 없을 때 생겨납니다. 서로 대화도 없습니다. 가족은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너무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게 됩니다.

 

두 번째로 육체적으로 버려지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국인 엄마가 딸에게 말했습니다.『너를 두 시간만 이 집에 맡겨 놓겠다』하지만 그 후로 그 딸은 20년 동안 어머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그곳에 두고는 다른 남자와 함께 다른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다른 형태의 버려짐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영적으로 버려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일어납니다. 아버지는 항상 밖에서 만족감을 찾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위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건축위원회, 재정위원회, 전도위원회, 유명한 강사를 초청하는 세미나 등의 일로 매일 밤늦게 돌아오고는 아이들에게 인사도 없이 잠자리에 듭니다. 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자리로 갑니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은 그 어머니에게 짐입니다.

 

대신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꼭 파트타임 전도사 같습니다. 새벽기도회에 가면 집으로 오지 않습니다. 아침식사를 하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친구들도 방문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점심식사를 하고 성경공부에 가고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합니다.

 

밤이 됩니다. 그룹 기도회, 성경공부, 순모임, 특별한 모임 등 매일 밤 어머니는 집에 늦게 옵니다. 집에는 아이가 둘이나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매일 똑같습니다. 『너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하는 거 잊지마. 배고프면 자장면 시켜 먹어. 자기 전에 기도하는 것 잊지마. 10시 30분까지는 자야 해. 엄마랑 아빠는 매일 바쁘단다.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바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의 삶을 즐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성장하면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 어머니는 목사님을 찾아옵니다.『목사님 목사님 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더 이상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아요』물론 아이들은 더 이상 교회에 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버려졌다고 느낄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도 하고 사랑도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오늘날의 사회 환경으로 인해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뉴에이지운동」, 「사탄숭배」등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삶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막혀 있을 때에는 우리 삶은 많은 문제들을 갖게 됩니다.

 

 

 

[크리스 해리슨 목사 내적치유 세미나]

제4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4)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요소들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것은 사랑의 가장 위대한 형태입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성경에서 계시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기 원한다면 매일 이 성경구절을 읽으시고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 한절 한절을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두 가지만 살펴보고 싶습니다.

 

 

회개한 죄는 기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죄를 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또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정결하게 씻어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가 씻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덮어버린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던 것들을 계속해서 기억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원수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 1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우리의 지난 죄를 계속해서 생각나게 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사단은 참소하는 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의 잘못을 자책하게 하는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실패했던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참소합니다. 우리가 특별히 피곤하고 지치고 약할 때, 어려움을 겪을 때 더욱 그렇게 합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참소하는 말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의 가까운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옵니다. 우리의 가족이나 오랜 친구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사람들이 과거에 실수했던 것이나 잘못한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사단은 참소하는 자이지만 하나님은 참소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들어서 우리를 참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모든 잘못과 죄들을 씻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주 유명한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많은 주석가들은「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탕자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아들은 집을 떠나 멀리 갑니다. 자기의 유산을 받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고 맙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게 됩니다. 자신의 죄의 결과가 자신의 삶을 좀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집으로 가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종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말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여보려는 것이 아니라 이아들의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아들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 아들을 너무나 그리워하고 갈망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아들은 광야를 걸어와야 했습니다. 먼지도 많이 나고 날씨도 매우 더웠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매우 지저분한 장소입니다. 언젠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간 일이 있는데 거기서 모래바람을 만났습니다. 끔찍했습니다. 공기 중에 모래가 가득했고 어디에나 모래가 있었습니다. 광야는 로맨틱한 장소가 아니라 낮엔 덥고 밤엔 추운, 살기 힘든 곳입니다.

 

이 아들이 이런 광야를 지나왔기 때문에 아들은 깨끗하고 말끔하게 온 것이 아니라 더럽고 냄새나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하고 아들이 오고 있는 광야로 달려 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을 만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만났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너, 얼마나 바보스러운 줄 아느냐?」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또는「너 씻고 와라. 씻고 이야기하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 그대로, 더럽고 먼지가 잔뜩 끼어있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그 아들을 팔로 부둥켜안고 아들을 사랑합니다. 아들에게 말합니다.『집에 잘 왔다』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말을 하나님께 들어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집에 잘 왔다』이제까지 광야에 거했던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던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많이 메말라 있습니다. 많이 지쳐있습니다. 외롭습니다. 아마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다시 이 가족으로 돌아오너라. 다시 내 사랑 안으로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내가 너를 회복시켜 주겠다.』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너 먼저 옷 좀 갈아입고 와라. 너는 실패자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환영하십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크리스 해리슨 목사 내적치유 세미나]

제5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5)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

 

골로새서 2장 9절을 보겠습니다. “이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 구절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자신을 통해 보여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12장을 보겠습니다. 18절에서 21절입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온유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거리에서 시끄럽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외치셨다」라는 구절이 성경에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그리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온유하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 바로 이러합니다.

 

마가복음 보겠습니다. 10장 13~16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위해서도 언제나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4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도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우리가 가족 안에서 상처 받는 것 중 하나가 가족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면 아버지를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남편이 거짓말을 하면 남편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부모는 자녀를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거짓말의 힘은 파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 32절과 14장 1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시니라” 「긍휼」이란 어떤 것입니까? 긍휼은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랑으로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긍휼하신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가?

 

누가복음 23장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조차도 예수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렇게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신학적인 이론으로만 알고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가「하나님의 용서」인데도 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받는 것을 제대로 누리고 있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기를 거절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갈 때마다「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비참한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자신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죄책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책감에 굴복해 버려서 죄책감이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상태로 살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면서 누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용서하고자 하는 사람을 거부할 때입니다. 마음속에 결심을 합니다.「나는 저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절대로 남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겠다」이렇게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묶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온전함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막는 거절감

 

우리는 지난밤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흐르지 못하게 막는 것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밤 이러한 장벽들에 대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거절감」입니다. 거절감은 우리 삶 속에서 「나는 거절당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느끼도록 만듭니다. 「아무도 나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좋은 관계를 갖기가 어렵게 됩니다. 거절감은 방향을 바꿔가며 옮겨 다닙니다.거절감은 우리를 화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고 불신하게 만듭니다. 또 우리가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게까지 합니다.

 

이것과 반대로 거절감은 자기가 자기를 거절하게 합니다. 자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종종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게 됩니다. 자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종종 우울증에 빠집니다.

 

자기 거절감의 끝까지 가게 다닙니다. 거절감은 우리를 화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고 불신하게 만듭니다. 또 우리가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게까지 합니다.

 

이것과 반대로 거절감은 자기가 자기를 거절하게 합니다. 자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종종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게 됩니다. 자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종종 우울증에 빠집니다. 자기 거절감의 끝까지 가게 되면「너 왜 죽지 않니? 죽어버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에 이런 말이 항상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시편 23편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이런 골짜기를 경험할 때마다 -특별히 관계의 문제, 재정적인 어려움 등 -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옵니다.

 

 

형제자매님,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자를 바람처럼 날려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망의 그림자로부터 자유케 하시길 원하십니다. 자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빠지고 외로움에 빠지고 결국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편 118편 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바라십니다. 죽음의 생각과 싸우시는 분이 계시다면 더 이상 그런 것에 고통당하지 않고, 그런 생각은 날려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거절감」이라는 장애물이 삶 속에서 뽑힐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반응」

 

두 번째 장애물은 어린아이와 같은 반응입니다. 신약에서는 어린아이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 것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4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서 핵심단어는「어린아이와 같이」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뜻에서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라는 것은 어린아이의 긍정적인 속성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잘 배웁니다, 겸손합니다. 그리고 쉽게 용서해 줍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속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4장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입니다. 13장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성령 안에서 사역을 하는 동기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을 자기 삶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장 11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도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반응, 유치한 반응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치한 반응, 어린아이와 같은 반응은 어떤 것들입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많은 해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유치한 반응은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제가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숨겨진 어린아이의 본능

 

첫 번째 예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숨겨진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버튼을 누르게 되면 유치한 어린아이가 올라옵니다. 그러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고 행동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고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10~30분 정도만 지속되다가 멈춥니다. 그 아이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굉장히 창피합니다. 패배감을 느끼게 됩니다. 보통 죄성이 있는 것들이 이렇게 하게 합니다. 분을 품는다든지, 정욕을 품는다든지,

누구나 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이러한 반응을 하게 됩니다. 이 속에 이러한 유치한 어린아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 상처를 받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랑이 결핍된, 무시되었거나 거절을 당한 아이일 때 이렇게 됩니다. 아니면 아이의 부모가 사랑을 아이에게 어떻게 전해주어야 하는지 몰랐던 경우입니다.

 

이 아이가 자랍니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어느 한 구석에 이 아이가 묶여 있습니다. 누군가 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감추어져 있던 어린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렇게 수많은 장애물 들을 갖게 됩니다.

 

 

불안정한 부모의 영향

 

두 번째 예는 부모님이 안정된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불안정해 집니다. 아이가 엄마와 집에 있을 때는 착합니다. 그런데 옆집 박씨 아주머니가 엄마와 이야기를 하러 오면 달라집니다. 그것이 싫은 겁니다. 그래서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도 박씨 아주머니와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쥬스를 들고 마루바닦에다 쏟아 버립니다. 그런데도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는 이번에는 연필을 들고 벽에다 낙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바닥에 누워버립니다.

 

발버둥을 칩니다.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그러니까 아주머니가 쳐다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주머니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아이는 다시 착해집니다. 그 아이가 5살이 됩니다. 엄마랑 슈퍼마켓에 갑니다. 엄마는 쇼핑을 합니다. 슈퍼마켓에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큰 소리로 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쳐다봅니다.「도대체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엄마는 부랴부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줍니다. 아이가 이겼습니다. 이제 아이는 어떻게 엄마를 조종할 수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아주 유치한 반응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조종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조종해서 나쁜 짓을 하게 합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듭니다.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생깁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약 네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나을 위해 이것을 해야 해」이것이 뭡니까? 조종하는 것입니다. 유치한 반응입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듭니다. 결혼을 합니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재난입니다. 남편은 분노로 조종하려 합니다. 내가 화를 내서라도 내 뜻대로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어떻게 조종합니까? 눈물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웁니다. 이런 사람들의 결혼생활은 눈물과 분노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을 때에 조종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지배하고 괴롭히는 것들도 유치한 어린아이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유치한 어린아이를 꺼내기 원하십니다.

 

 

[크리스 해리슨 목사 내적치유 세미나]

제6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6)

 

 

마음 속 장애물을 제거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또한 사랑을 하지도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상처는 분노와 쓴 뿌리로 발전하며 그것은 증오로 변하여 장애물을 만듭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장애물을 만듭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장애물들은 우리 마음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우리가 사랑을 흘려보내지도 못하게 합니다. 우리 속사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거나 사람을 두려워하는데서 생길 수 있는 수치심은 그런 장애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수치심을 피하게 됩니다. 정욕 또한 장애물이 됩니다.

 

 

하나님 사랑 막는 장애물

 

제가 여러분에게 세 가지 형태의 잘못된 관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의존적인 관계」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필요중심적인 관계입니다.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의존하는 관계입니다.「의존적인 관계」는 거머리처럼 어떤 사람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는 사람을 아주 지치게 합니다.

 

그 관계에 묶여있는 사람으로부터 생명력을 다 빨아냅니다. 언제나 자신의 필요 중심적입니다. 나는 네가 필요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필요 중심적인 관계는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지치게 합니다.

 

두 번째 잘못된 관계의 형태는「부도덕한 관계」입니다. 첫 번째 관계에 뒤따라오기도 합니다. 삶 가운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이런 잘못된 관계에 빠지기도 합니다.

 

세 번째 잘못된 관계의 형태는 「환상적인 관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고 우리의 생각 가운데 많은 갈등과 좌절감을 안겨줍니다. 하나님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닫아두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환상을 계속 자라나게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전의 관계」입니다. 이전 남자친구나 여자 친구와의 관계처럼 이미 끝난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묶여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묶여 있는 마음을 예수의 이름으로 끊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선교사인 목사님과 사모님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항상 정확한 것을 추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두 분도 모든 것이 항상 정확하고 똑바른 분들이었습니다. 기도를 요청하러 온 사람은 부인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의 삶을 말하면서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올곧은 사람이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모님은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아요』라며 『저는 아주 개구쟁이였어요. 남자친구도 많이 있었구요.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남자친구와 홍콩과 동경을 갔었습니다. 저는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예수님을 영접할 때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제 남자친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항상 남자친구 생각을 하고 어떤 때는 남편과 같이 있을 때 조차도 제 남자친구 생각을 합니다.』그때 저는 사모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옛 남자친구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언제 입니까?』저는 적어도 그 사모님이 2년 또는 3년 전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어제입니다. 제 남편은 교회 일로 너무 바쁩니다. 제 마음은 눌려 있어요.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점심식사 약속을 하고 오후를 같이 보냈습니다.

 

그 사모님은 점심약속에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남자친구와 같이 점심을 먹을 때 성령님께서 그 사모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여기 있어선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죄다.』

 

 

생각을 조종하는 사탄의 영

 

그러나 그 사모님은 성령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변명을 하며 남자친구와 점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심령이 서로 묶여 있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환상은 위험한 친구와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현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환상을 자라게 하는 두 번째 요소는 포르노입니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는 포르노가 없었습니다. 이때 영국이나 미국의 사탄숭배자들이 많은 음란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들은 포르노를 만들면서 사탄에게 금식하며 온 세계 젊은이들의 생각이 이러한 것들로 지배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포르노의 뒤에는 이단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조종하는 영이 숨어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나쁜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기게 하고 무기력하고 소망 없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아주 큰 장애물들을 만듭니다.

 

그 첫 번째 결과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런 것을 사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성욕을 통제하고 조종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더 보고 싶게 하고 더 큰 죄책감에 빠지게 합니다.

 

두 번째 결과는 우리가 회개하고 이런 것을 더 이상 찾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도 우리의 생각 속에 계속 음란한 것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생각을 조종하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이런 일을 했다 하더라도 계속 해서 좌절과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장애물들로부터 어떻게 자유롭게 됩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라

 

시편 62편 8절을 읽겠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서」도 「하나님에게」도 아닌 「하나님 앞에」입니다.

 

사무엘상 1장 15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 19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 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주님의 얼굴 앞에 자기의 말을 물 쏟듯 쏟으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쏟아 붓기 가장 쉬운 것이 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렇게 쏟아놓으십시오. 이런 장애물들을 하나님께 쏟아놓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아버지 이런 장애물들을 더 이상 내 삶에 갖고 싶지 않습니다. 성령님 이 모든 것들을 꺼내주세요」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정직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직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정직한 기도의 열매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는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는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마음 가운데 그분의 사랑을 쏟아 붓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고 느끼면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순전함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치유의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치유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나누길 바랍니다.

 

아버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장애물들에 대해서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이 장애물들을 대적합니다.

 

이 장애물들아! 너희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더 이상 있을 자리가 없다. 성령께서 너희를 대적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너희를 대적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견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kw1207
글쓴이 : Daum Ki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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