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기의 혼란 대 성인의 특징>
- 잘못된 감정과 행동을 일으키는 유아기에 남겨진 여러 잘못된 개념들은 우리 기억에 상처를 남긴 아픈 경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의 억눌림에서 풀려나기 전에 특별한 치유 경험을 필요로 한다. 또한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미성숙한 개념에서 나온 것들도 있었다. 거기엔 성숙하고 바르며 균형 잡힌 성경적인 원리들이 필요하다.
- 여기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요로 하는 특징들과 어린아이와 같이 혼동하고 있는 몇몇 것들을 살펴보자.
-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녹음기이며, 동시에 가장 형편없는 해석기”라는 말이 있다. 그런 어린아이의 혼동이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인지를 알기란 매우 힘들며 알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의 유치한 결과들을 우리가 던져버리기 위해 그것들을 구별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 수용됨과 인정됨의 차이
- 우리는 많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수용됨(acceptance)과 인정됨(approval) 사이의 혼동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한 부모의 불만족이 그들의 하나의 개인됨까지 거절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지 않는 가정 안에서 흔히 나타난다. 인정되지 않은 어떤 일로 부모에게 처벌을 받을 때, 아이들은 부모들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한 개인으로 수용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 수학 공식적인 명제가 이 아이들 속에 뿌리내리게 된다.
- “인정은 수용과 같고, 불만족은 수용 거절 아니면 추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처벌이나 꾸지람은 불만족과 거절과 같고 인정됨은 사랑받고 있으며 수용되었음을 뜻한다. 인정받지 못함은 사랑받지 못하며 거절당한 것이다.”
- 이것은 부모의 잘못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부모라면 어떻게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있는가를 자세히 점검해야 한다. 그들의 행동에 만족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을 당신의 아이들로 사랑하고 수용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아주 예민한 아이들을 대할 때 특히 더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이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므로 그들의 나쁜 행동 교정을 위해 처벌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의 행동에 만족치 못한다 해도 그들의 행동에 관계없이 그들을 사랑하고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그들의 수용 여부가 달려있지 않음을 완전히 이해시켜야 한다.
- 그러나 아이들은 때때로 어느 권위자나 교사, 심지어 친구들로부터 이런 혼동을 갖게 된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든지, 그것은 미숙한 어른들 안에서는 감정적으로 발전하고 또 혼인관계를 황폐케 할 수 있다. 그들은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제안마저 수용 받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사람 사이에서의 추방의 공식으로 그것들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며 또한 그렇게 인식하게 된다. 결국 이것은 개인적인 고민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파괴 그리고 영적인 파괴를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장치가 되고 만다.
- 이것은 바리새인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확실한 지름길이 된다. 이 같은 혼동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하는 일에 만족할 수 없을 때마다 자신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루듯 우리 이웃을 다루게 되므로 그들에게 우리가 가진 이 유치한 공식을 적용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무엇이든지 간에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영적인 율법주의와 합쳐져 종교란 금지와 규칙인 것으로 인지되어 버리면, 그 결과는 특히 더욱 극심한 것이 된다.
-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에게 마치 자신이 죄를 용인하듯 보이게 될까봐 죄인들에게 친절하거나 평범하게 대하기도 두려워하고 있다. 온 교회가 이 혼동으로 고생하는 곳도 있다. 그들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 가장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는 것과 그 기준을 범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인정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 충격과 거절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직 다루어보지 못했던 그 자신의 감정 속의 두려움에 차고 불안한 면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결단코 그 유치한 혼동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
- 이 같은 성숙은 그리스도의 수용과 인정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함으로 시작된다. 그분은 또한 창녀, 도적, 취객, 폭식가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도 함께 걸을 수 있을 만큼 깊은 동정심이 우러나는 확신과 내적인 안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럼에도 그분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한다고 타인이 생각할 만큼 그분의 기준을 내려 보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모함한 이유였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의 문제를 투영시킨 것일 뿐이었다.
- 우물가의 난잡한 사마리아 여인을 다루셨던 것이나(요 4장5-42절), 세리장 삭개오를 다루신 것이나(눅 19장1-10절), 또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다루신 것에서(요 8장3-11절),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한 패턴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 완벽한 조화를 보게 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 다시 죄짓지 말라.” 여기 사랑으로 수용하심과 속죄를 담은 불만족하심, 그리고 개인적인 동정과 도덕적 도전이 그리스도에 의해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그 차이가 흐려지지 않았다.
- 우리 대부분은 이 어린아이 같은 혼동의 질식할 만한 억누름에서 풀려나기 전에는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과의 참 평안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것을 인정하실 수 있을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시지 않는다면, 진정 그분이 그러신다면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으며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높고 거룩한 기준을 가지시고도 망설이지 않으셨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신과 타인을 수용하기까지 이토록 망설여야 하는가?
♣ 시험과 죄의 차이
-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야고보이다. 더욱이 그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 문제에 대한 관점은 그렇듯 단순하지마는 않다. 어떤 이들은 시험과 죄에 대한 근본적이고 극심한 혼동으로 고통을 받는다. 우린 성경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정죄 아래 있게 하는 사탄의 더러운 간교의 먹이인 시험(temptation)에 대한 실제적인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는 다는 것을 마음에 두자. 단테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람이 몰아치는 산길로 여행을 하는 사람의 경로에 비유했다. 그가 여행을 시작했을 때 그는 젊은이였다. 그가 산길을 얼마간 올라갔을 때 사나운 늑대가 숲에서 뛰쳐나와 그를 물어 찢으려 했다. 단테에게 이것은 육체의 욕망, 즉 음욕의 늑대이며 젊은이의 가장 큰 시험을 대표하는 것이다.
- 더 높이 올라가며 그는 중년을 맞는데, 거대한 호랑이가 그를 덮친다. 이것은 자만의 호랑이며, 지위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자만으로 중년의 가장 큰 시험을 대표한다. 마침내 그가 정상에 가까워지자 털이 수북한 사자가 그 앞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노후의 가장 큰 시험인 재물과 재정적인 안정이다.
- 삶의 세 가지 큰 시험을 구분하면서 단테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이란 없다. 성령 충만하든, 성인 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든 어떤 종류의 시험이건 시험을 대면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더 높은 영적 수준에 오를 수만 있다면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여 상담을 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행로를 우리의 영적인 경험의 상징적인 그림으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애굽의 유대인들은 죄의 굴레와 노역을 상징하며, 홍해의 기적은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고, 여정은 보통의 영성을, 광야에서의 40년은 패배하고 풀죽은 자기 위주이며 육신 중심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또 요르단은 전적인 헌신, 약속의 땅은 성령 충만한 삶의 더 높은 수준을 상징하고 있다.
- 가나안에서 여호수아 지휘하의 하나님 백성들의 삶으로 구별되는 것은 어떤 활동이었나? 그들은 땅으로 들어갔지만 그것을 모두 정복해야 했다! 여호수아서 전체는 땅을 정복하는 대전쟁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인인 당신 역시 모든 삶의 국면에서 시험에 대면할 것이다. 당신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으므로 선택의 능력은 당신에게서 없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인 당신을 결코 식물이나 동물로, 또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로봇으로 바꾸시지 않는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자주 얘기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시 깨끗한 마음을 주실 수 있지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요한다. 또한 그러한 특징은 오직 바른 도덕적 선택들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 시험이란 그런 선택의 검사장이다. 아무도, 주님 자신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이 거짓되고 유치한 환상을 고집하며 누군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만일 진실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강한 시험을 거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서나 성인들의 전기를 통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시험으로 인한 노고를 그대로 써놓고 있다.
- 야고보서 1장13-14절을 살펴보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서 오는가? 일거 보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끄려 미혹됨이니,”
- 여기서 ‘욕심’이라는 번역은 오늘날 좋은 번역은 아니다. 1600년대에는 이것이 모든 종류의 인간적 욕망 전체를 뜻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성적인 의미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같은 헬라어는 누가복음 22장15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되었으며, 또한 마태복음 13장17절 예수님께서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라고 말씀하실 때 쓰여 졌다. 분명히 이 어휘는 나쁜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것에 대한 욕구와 집착을 뜻한다. 야고보서의 이 어휘는 우리가 오늘날 본능이라 부르는 식욕과 성욕 그리고 인정됨과 친근을 원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들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이렇게 읽어야 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라고(헬라어에서 ‘이끌림’은 낚시, 미끼의 의미로 사용되고 ‘미혹’은 사냥 덫을 의미한다).
- 이제 주의 깊게 살펴보자. “욕심이······. 또는 욕구가······.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를 낳기 위해서는 둘이 만나 잉태시킨다. 그 둘은 무엇인가? 한 개인의 본능에 사탄의 제안, 시험이 합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손에 그 자체로는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를 갖고 있고, 다른 쪽으로는 악한 시험, 미끼, 덫, 그 충동을 잘못 사용하도록 하는, 그것을 악용하고 함부로 하며 합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토록 하는 사탄의 제안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둘이 아직 하나로 합쳐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잉태하지 않았으며 결합되지 않았다. 아직 이 둘은 하나가 아니며 따로 떨어져 있다.
- 무엇이 그것을 떨어져 있게도 하고 합쳐져 잉태하고 죄를 낳게 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의지이다! “아니요, 나는 그 둘이 합치게 그냥 두지 않을 거요. 둘을 떨어져 있게 할 것이요.”라고 말하는 동안엔 욕구가 얼마나 강하든, 미끼와 시험이 얼마나 유혹을 하든 상관없이 당신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 욕구가 있을 때 ‘안 돼’라고 얘기하라. 만일 의지가 그 욕구에 동의한다면 아마도 그 둘은 하나가 되어 죄를 만들 것이다.
- “새가 당신의 머리 위로 나르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둥지를 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시험은 죄가 아니다. 떠오른 악의 생각이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악한 생각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죄이다. 욕구를 갖는 것은 죄가 아니나 그 욕구를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려는 악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죄이다.
-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욕을, 꿈을, 기질을 가져가 주시기를 구하지 말라. 그분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실 수 없다. 그분은 당신 성욕을 제어할 능력을 주실 수 있으며 주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불태울 수 있는 꿈을 당신에게 갖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기질을 닦아 예수님같이 분노해야 할 것에 분노할 수 있게 지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죄와 시험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 아픔과 손상의 차이
- 고통(hurt)당하는 것과 손상(harm)받는 것 사이의 혼동은 우리 아동기와 십대에서의 또 하나의 부작용이다. 이 차이를 작은 아이가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상황에서건, 그 뒤에 있는 동기가 무엇이건 아픈 것은 아이들에겐 고통당하는 일일 뿐이다. 부모나 친구들이 단지 부주의로 그렇게 했다 해도 아이들은 끔찍하게 느낀다. 아이들에겐 아무 차이가 없으므로 아프면 울어버린다.
- 우리가 자라면서 그 차이를 차차 알게 된다. 나는 아버지와 씨름을 하곤 했는데 한 번은 그가 우연히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본 기억이 있다. 그 아픔이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많이 아파 울고 싶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아픔과 손상의 차이를 모르는 가정, 즉 훈계와 처벌의 차이, 알코올과 분노의 차이, 야단침과 포기해버림이 마구 뒤섞여 있는 가정에서는 아픔을 당하면 손상 받게 된다. 왜 그런 것일까? 이런 배경에서 그 차이를 알게 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는 치유를 필요로 할 것이며, 그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기 전에 재 프로그래밍이 필요한 반응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성숙의 과정을 위해서는 징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표시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히 12장6, 7, 10절). 이것은 우리가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데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받게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 그분은 우리를 아프게 하실 것이지만 절대 우리를 상하게 하시진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감정에 매달리지 않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시기에 필요하다면 우리를 고통 받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자기만족에서 건져 그분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게 하시려고 그분을 우리를 아프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까지 때로는 우리에게 실패와 낙망을 경험케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 고통은 항상 치유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며 절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당신을 아프게 하신다. 하지만 결코 상하지 않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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