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시는가?”
- 부적당하고 미숙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어가는 사역에 대한 개념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음의 세 가지 실화를 함께 나누며 생각해보기로 하자.
- 한 젊은 부부가 새벽에 아기를 데리고 병원으로 뛰어 들어 갔다. 한 이웃이 새벽 세 시에 전화를 걸었고 나는 그들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젊은 엄마는 아기의 죽음으로 인해 비탄으로 손을 내저으며 울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외쳤다. “얘야! 내 애기야!” 그리곤 “하나님의 뜻일 거야! ……. 그러나 의사가 제 때에 왔었다면 ······. 살았을지도 몰라!” 그녀의 비탄어린 읊조림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 뜻을 의사가 제 때에 왔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거나 예외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 1973년, 한 비극적인 사건이 전국 신문 표지를 뒤덮었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 신실한 부부는 약 쓰기를 반대하는 내용의 설교를 떠돌이 치유 부흥사에게서 듣고 집에 돌아가 당뇨병이 있는 아들에게서 인슐린을 치워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는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삼 일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실 것을 기다렸다. 종국에는 정부에서 매장을 명령했다.
- 이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당뇨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인슐린을 쓰기를 원하시거나 원하시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다른 차선의 방법은 없이, 직접적인 방법으로만 이 세상에서 치유하신다는 뜻인가?
- 만일 하나님께서 생명을 살린 어떤 약품을 통해 균형이 깨진 우리 몸에 화학작용의 균형을 맞추신다면, 만약 안경을 통해 좋은 시야를 주신다면, 혹 심장수술이나 기증자의 장기를 이식하거나 어떤 수술을 통해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신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인가?
- 한 10여 년 전 한 뛰어난 의대생이 그의 레지던트 기간을 마쳤다. 그는 동료 의사인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가씨와 결혼을 했고, 선교사가 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결혼한 지 6주 만에 그는 장인 장모를 방문했다. 장모는 병력이 있는 정신병 환자였는데 갑자기 권총을 꺼내 사위를 쏴 죽였다. 나는 사람들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무슨 생각에서 사람들은 이 참혹한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했을까?
♣ 하나님의 뜻이란
-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이것은 현실과 상관없는 동떨어진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괜찮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어리석고 미성숙한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바울은 얘기하기를 “악에게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장 20절)고 했다. 재난이 시작되기 전에 성숙해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신은 ‘큰 파도와 같은 슬픔’이 몰아치는 인생 폭풍 속에서 당신을 붙들어줄 닻을 갖게 될 것이며, 그 외 어느 것도 당신을 도와줄 힘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레슬리 웨더헤드가 쓴 소책자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은 고난에 처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 세상에는 그분의 역사하심에 대한 오해로 인해 하나님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나라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관해 혼동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여러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혼돈이 오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엔 최소한 세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서의 완전한 뜻,
하나님의 상황 변화에 맡겨놓은 허락 가능한 뜻,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목적
♣ 계획된 하나님의 뜻
- 이 계획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은 당신과 이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다. 이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이상적인 목표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소극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8:14).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분은 좋으신 아버지로 나타나신다.
-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셨다.”라는 의미에서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 소아기적이며 비 성경적인 생각을 버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 유아기적 발상을 아직까지 버리고 있지 못하기에, 우리는 약하고 해로우며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단지 하나님이 상황에 맡겨 허락하신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계획으로서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 우리는 이 계획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얼마동안 좌절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 것이다. 악은 잠시 형통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뜻도 잠시 좌절될 수 있다. 캄보디아의 굶주린 아이들, 인디아의 수백만의 걸인들, 강제 수용소의 그 참혹함. 미국 고속도로 상에서 매년 죽어가는 50,000명의 사람들,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아동 학대나 폭력의 피해자들······.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너무 먼 일들이 우리 주변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미망인이나 홀아비 또는 이혼 상태에 있게 되는 것같이 결혼의 가망이 없어지는 그런 단순한 일일 수 있다. 혹은 아주 가까운 예로 지난주에 중간고사를 망쳤을 수 있다. 당신은 이런 일들을 악한 것이거나 인간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이나 이기심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또는 사고라고 부를 것이다. 또는 인간과 사회의 죄의 영향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계획이며 완전하신 뜻이라고 부르지 말자!
-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생각함으로써 위로를 얻는 것같이 느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거기엔 진실로부터 올 수 있는 위로나 안위가 없다. 만일 사실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위안을 찾는다면 정말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될 때는 아무 의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 무서운 상처를 입게 된다.
♣ 허락하시는 뜻
-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이 허락 가능한 하나님의 뜻은 이 타락한 우주에 작용되는 것이다. 바울은 얘기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장22절). 우리 인간만이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함의 근원적인 위력은 온 우주에 뻗어 있다. 죄는 창조된 세상을 불균형과 불완전하게 할 정도로 극심한 것이다. 그 불균형 때문에,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 때문에,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는 악한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황에 따라 허락되어 질 수 있는 뜻이 있게 된 것이다.
- 어떤 아기가 5층 건물 유리창에서 사고로 떨어졌다면 사람들은 그 아이의 죽음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나를 생각할 것이다. 이 물음에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의 생각을 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것이다. 다른 비극적인 사고가 있은 후에 나는 장례식에서 하나님은 이 일이 일어나길 원치 않으셨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주 내내 나는 사람들의 질문에 곤욕을 치렀다. “설마 제 정신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겠죠, 그렇죠?” 나는 대답했다. “진심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 사고가 일어나기를 원하셨다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은 경배할 수 없었다.
- 이런 사고의 경우, 이를 둘러싼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곧 중력의 법칙에 맡겨진다. 그분의 법과 규칙은 항상 일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기가 살과 피를 갖고 나오기를 바라시지, 플라스틱이나 고무로 만들어져 나오기를 원치 않으신다. 중력의 법칙에 의하여 살과 피가 콘크리트에 부딪히면 몸은 깨지게 된다. 아기를 지면에 붙들고 있을 수 있는 바로 그 법칙이 그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법칙은 우리의 잘못이나 부주의 또는 무지를 예외로 두지 않는다.
- 로마서 8장 28절에 나타난 원리, 즉 우리가 처한 환경에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큰 활력소가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도록 허락된 많은 것들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법칙의 세계와 자유로운 도덕적 선택의 결과이다. 그런 일들은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뜻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시고 개입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놀라운 확증은 그분의 자녀나 그분의 궁극적인 의지를 꺾을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다는 사실이다.
- 워더헤드는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하나님이 선으로 사용하지 않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당신에게 일어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린 근본적인 바탕을 달리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사건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 사고의 성격, 즉 그것의 악함,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변화시키거나 없애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일하실 수 있으며 그 사건이 주는 의미를 우리 전체 삶에서 변화시켜 상황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신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실 수 있으므로 모든 것은 그분의 뜻을 위해 그분의 맷돌 속에서 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글쎄, 난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데 말이야. 난 가정환경이 너무 좋지 않아. 참사나 질병, 불공평한 것이나 상실 같은 것들이 끊이질 않았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을 끌어내리거나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복합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패배하지 않으신다.
♣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
-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좌절되지 않는다. 웨더헤드는 이것에 대해 매우 아름다운 삽화를 사용한다. 몇몇 어린아이들이 산 속 작은 개천에서 놀로 있는 풍경이다. 아이들은 그 물줄기를 조그만 댐으로 막아 가두고 장난감 배를 띄운다. 그러나 물줄기는 강과 계곡을 향해 꾸준히 흐른다. 이제 사람들이 거대한 댐을 쌓고 강줄기를 바꾸고 호수를 만들어 가둔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다로 흐르는 물줄기를 저지할 수 없다.
-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죄나 실수나 사고, 그리고 우리에게 짓는 타인들의 죄들이 잠깐 동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악에 의한 어떤 새로운 환경이나 질병이나 사고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궁극적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다른 채널을 찾으실 것이다.
-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과시하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유를 환상으로 만들었으며 도덕적 성장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게 했다. “하나님은 능력 있다”라는 의미는 그분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고 하는 얘기는 그분을 궁극적으로 훼방할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얘기와 같은 얘기이다.
- 악한 의도로 예수님 시대의 정부는 무죄한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완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였다. 그러나 6주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설교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온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만드셨던 것이다.
- 사고나 비극, 그리고 도덕적 악은 무서운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분의 목표를 이루어가는 우리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키거나 우리 삶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꺾지 못한다.
- 글래스고우 대학의 성경학자 윌리엄 버클리는 많은 책을 펴냈다. 그의 신약 주석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그의 신학적 결론들 중 어떤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들로 신약의 기본 바탕을 넘어서고 있지는 않고 있다. “어떻게 윌리엄 버클리는 그 일을 했는가?”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뉴스 칼럼을 써내고, 책을 펴내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대학 학장으로 일을 하며, 학생과 토론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 등등을 과연 어떻게 다할 수 있을까?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 몇 년 전 윌리엄 버클리는 자신의 귀가 먹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 그의 귀먹음이 남도 아닌 윌리엄 버클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 윌리엄 버클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환경에서, 허락하신 뜻 안에서, 그리고 로마서 8장28절에 약속된 놀라운 능력 안에서 거의 완전한 침묵의 새 세계를 사용해보기로 결심했다. 세상의 모든 음향으로부터 차단된 후,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집중할 수 있었다. 보청기가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침묵의 세계에 있기 위해 보청기를 사용치 않았다. 자기 연민 대신에 그는 로마서 8장28절로 그의 귀먹음을 싸매고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사용했다.
-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참 성경적 이해에 우리가 이를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바울이 얘기했듯이 결론을 말하고 싶다. “형제여, 자매여, 생각하는 것에 성숙해지십시오. 자신과 타인의 감정의 균형이나 영적인 생활이 언젠가는 성숙한 이해력에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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