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치유/내적치유

성서적 내적 치유의 원리

davidtheking 2009. 9. 4. 16:53

  성서적 내적 치유의 원리

 

1.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외적, 내적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상처가 드러난 상처이든지 아니면 감추어진 상처이든지 간에 모두가 상처를 받는 피해자, 때로는 상처를 주는 가해자로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상처들 가운데는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상처가 있는가하면 결혼하고 나서 뒤틀어진 부부관계로 생기는 것들도 있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에 성폭행이라든지 편애, 가난함, 신체적 열등감, 버림받음, 아동학대, 신체적 · 정신적 장애 등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영적인 억눌림, 낮은 자아감, 허무주의, 분노, 성인아동, 자폐증, 강박증, 정신 산만함, 냉소주의, 죄책감, 수치심, 자기방어, 합리화, 과거에 얽매임, 상처에 얽매임, 자기비하, 자기무시, 완전주의, 불신감, 의심, 우울증, 불안, 신경쇠약, 복수심, 자기비애, 공포, 두려움, 원한, 자멸적 행동 방식, 열등의식, 우월의식, 교만, 피해의식, 자포자기, 책임전가, 무기력증, 무기력증, 소외감, 과대망상증, 의존증, 질투, 버릇없음, 미움, 체념, 일중독증 등등의 증상으로 나타나서 함께 사는 이들을 괴롭게 만듭니다.

문제는 상처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모두에게 있는 이러한 상처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는가 입니다. 그에 따라서 상처를 치유받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상처에 일생 노예가 되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다루려고 하는 성경인물 40명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상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물들은 치유 받고 성장, 성숙해졌는가 하면 어떤 인물들은 치유 받지 못하고 영원히 그 상처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인생을 마치기도 하였습니다.


2. 내적치유의 의미


  치유에는 몸의 치유, 영의 치유, 감정의 치유, 귀신들림의 치유가 있습니다. 몸의 치유는 신체적으로 질병을 앓는 것에 대한 치유입니다. 문둥병 환자나 귀머거리 등을 예수님이 고쳐 주신 것은 몸의 치유였습니다. 또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적인 질병의 치유였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와 같은 키 작은 세리장이의 열등의식을 치유 이외에도 정신병자들, 혹은 악한 영의 공격으로 인하여 생긴 질병 귀신들림의 치유도 있고 상처를 위한 내적치유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적치유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외부로 나타나는 외상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는, 숨겨져 있는 어떤 상처들을 치유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숨겨진 상처는 외상과는 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되고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본인도 그렇게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는지초자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외부로 보이는 상처들은 열심히 치료하지만 내부에 숨겨져 있는 상처는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가 성격이나 인격, 인간관계, 믿음 생활 등 모든 부분에 걸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상처에 대한 예들은 많이 있지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 “당신은 너무 키가 작아.”라고 말할 때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각각 반응이 다 다를 것입니다. “아담하고 좋은데요.” “작은 것이 더 아름답지요.” “별로 불편이 없어요.” 등등으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벌컥 화를 내면서 “제 키가 작아서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하면서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예를 든 것이지만 이 사람은 키 작은 것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있음으로 인해 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처들은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때에 ‘불시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상처, 내면에 보이지 않는 어떤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을 내면의 치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속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의 상처들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면서 전인격적인 치유를 해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적치유에서는 가정의 문제들을 다루게 될 때에도 먼저 치유하고 지나가야 할 상처가 없는지 살펴봅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원인이 되는 것, 즉 진정으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이것부터 치유하려는 것이 내적치유입니다. 곧 원인 치유라고 보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3. 치유 받지 못한 상처


  40명의 치유 일기 가운데 치유 받지 못한 상처의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사울 왕, 헤롯 왕 그리고 가롯 유다가 바로 이 예입니다. 상처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치유 받아야 하는 것처럼 내적으로 감정에 남은 상처들은 치유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치유 받지 못할 때에 그 사람은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상처를 이용하여 사탄은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상처에 일생 노예가 되도록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한 여인은 20세 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 일생 동안 그 무덤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소일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산 사람은 바라보지 않고 죽은 사람만 바라보며 자신의 귀한 인생을 소비하였습니다. 사탄은 그 여인을 갑자기 잃은 상처에 일생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삶의 모든 즐거움과 부요를 잃어버리고 일생 슬픔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사탄은 상처에 얽매여서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상처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은혜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장의 출발이 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상처받은 자들에게 “나는 길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회복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시고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지만 사탄이 이것은 “끝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엄청난 상처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사탄은 감정의 충격을 받고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상처에 얽매이게 합니다. 그리고 일생을 슬픔과 고통, 상처, 저주, 분노 가운데 살게 합니다. 이렇게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모든 생활에서 파괴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더욱 내적치유가 필요하며 주님의 도움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은 그 상처를 통하여 자신의 나라와 다스림을 쉽게 확장해 나갈 것입니다.


4. 영원한 주치의 :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질병을 갖고 있는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질병이 영적인 질병인지, 아니면 내적치유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신체적인 질병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은 먼저 우리의 질병을 분별해 주시고 진단해 주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영적인 죄악으로 인하여 중풍병이 생겼음을 이미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하실 때에도 그 여인의 내면에 남아 있는 정신적 공포, 두려움을 먼저 치유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삭개오를 치유하실 때에도 그와 인격적으로 만나 주심으로 낮은 자아상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을 분별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통전적으로, 온전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시는 능력 있는 주치의가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병 고쳐 주시는 목적은 평강과 거룩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질병과 상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시면서 평강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건강한 상태는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 함께 누리는 ‘샬롬.’ 즉 평강입니다. 아무리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여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다고 하여도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이웃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샬롬’이라는 말이 건강과 가장 가까운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는 동기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병을 고쳐 주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저주와 질병을 대신 감당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질병과 상처를 고치시는 가장 큰 능력은 그의 사랑이며 그의 눈물입니다. 그의 눈물은 우리를 향핫니 가장 큰 약입니다. 그 눈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으며 치유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실 때에 육체적이거나 영적인 부분 하나가 아니라 그의 삶, ‘병든 삶’ 전체를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보이는 병들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의학이 발달하여(불치병도 있습니다만) 엄청난 종류의 질병들이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앞도 이제는 극복하는 단계에 들어갔고 에이즈도 조만간 치유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치유하여 거룩한 삶, 성결한 삶,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렇게 ‘병들고 지친 삶, 악하고 패역한 삶’을 치유하는 약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병들고 찌들은 삶, 중독되고 부패한 삶, 음란하고 더러운 삶까지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치유해 줄 수 없는 부분까지 주님은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유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미리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받으셨으며, 우리의 죄와 질병을 위하여 피 흘려 주셨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쳤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치유를 베풀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동기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온전하고도 통전적인 치유를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과 평강을 누리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리는 자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행복과 건강, 풍요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한 치유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상처를 들고 나오게 되면 그 곳에는 온전한 치유의 길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5. 내적치유의 원리


① 인격적으로 만나기

어떤 종류의 상처든지, 질병이든지 간에 주님을 만나는 순간 치유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어떤 상처와 질병의 치유는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을 만나는 순간 모든 상처와 질병은 치유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타와 폭행으로 고민을 하든지, 아니면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간에 우선 주님 앞으로 나와 만남이 이루어지면 주님은 치유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문제의 길이 되시고 답이 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모든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주님은 친히 인격적으로, 개별적으로 만나 주시면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수가의 사마리아 여인도 만나 주셨고, 혈루증 걸린 여인도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소외되고,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치유 받지 못한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여기에 나오는 40명의 성경인물들은 모두가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성경인물들도 주님과의 이러한 인격적 만남으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러한 주님이 아니라 우리 방에 들어오셔서 함께 대화하시면서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느껴집니다. 우리의 필요와 아픔을 아시고, 어디를 어떻게 어루만져 주어야 고침을 받을지 아시는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치유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친절하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② 주님과 함께 상처 보기

주님이 치유하시는 두 번째 단계는 각자가 자신의 상처와 문제를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상처의 자리로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상처인지 알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님은 상처를 조명하여 주시고 상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상처를 숨기거나 외면하거나 상처를 피해가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상처를 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사람에 따라 다른 방법(인격적, 개별적 방법)을 통하여 상처를 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상처를 직시하는 과정은 치유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직시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혼자 보면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주님과 함께 보면 그 자리가 치유의 장소요 승리의 장소가 됩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군중 보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혼자 지나갈 때에는 ‘부정한 여인’이라는 조롱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상처의 장소에서 주님은 이 여인을 불러 세우시고 상처를 직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여인’으로 다시 명명하여 주셨습니다. 상처의 자리가 승리의 장소, 회복과 치유의 장소, 은혜의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모닥불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다시 모닥불 안으로 초청합니다. 그 상처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실패의 장소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데 혼자서 모닥불 앞에 있을 때는 참담한 실패를 하였지만 이제 예수님과 함께 모닥불 앞에 서게 될 때에 그 장소는 승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치유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비겁한 베드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순교자 베드로’로 다시 명명됩니다. 주님과 함께 상처를 보게 되면 회복과 치유, 승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상처를 보는 것은 내적치유 과정의 중요한 단계가 됩니다.


③ 죄와 상처 고백하기

예수님의 치유 방법 가운데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심리적 치료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치유 방법 가운데 고백하기는 이러한 심리적이고 세상적인 것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첫 번째, 고백하는 대상에서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은 그 고백을 들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는 감정적으로 잠시 해방을 얻는 것 같은 그런 치유가 아니고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고백, 가장 괴로운 아픔, 상처’들을 주님 앞에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아주 더러운 것, 은밀한 것, 부패한 것, 상심한 것들의 고백을 사랑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고백도 가능합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대상이 믿음의 성도들 가운데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할 때에 먼저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모든 지체가 하나 됩니다. 이 곳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죄를 고백하면서 병 낫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너무 은밀한 고백을 공개적으로 할 때에는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은 ‘은밀하게’ 하고 성도들 앞에서 하는 고백은 ‘덕을 세우는’ 고백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는 ‘믿음 생활에서의 게으름, 은혜 받은 것, 그리고 연약한 믿음으로 오는 갈등’ 등에 관한 죄들을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④ 용서 받기 - 수직적인 십자가 사건

상처 받은 자들에게 내적치유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치유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질병이 치유 받지 못한다면 진정한 내적치유가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치유 받지 못할 때 생기는 증상이 죄책감(feeling guilty)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죄책감이 근본적으로 치유 받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치유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즉 우리에게 나타나는 질병이나 상처의 깊은 뿌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반목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였다든지 할 경우에 감정적 억압이나 불안, 두려움, 근심이 자리 잡아 건강한 영적 성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곧 죄책감이 남아 있을 때 우리들은 건강한 성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질병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폭적인 용서’가 있을 때만이 치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한 용서의 사건입니다. 수직적인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 가운데 누군가에 의하여 당한 것으로 인해 생긴 감정의 병을 내적인 질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적인 질병은 상처를 준 장본인을 용서하고 풀어 놓아 줌으로써 치유 받게 됩니다. 그러나 남을 용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풀어놓아지는 역사, 용서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인 상처나 질병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행한 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질병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치유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죄책감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억눌러서 자유롭게 주님의 보좌 앞으로 뛰어나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죄의 뿌리를 용서 받고, 용서 받은 감격으로 일어나게 될 때 다른 병들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⑤ 용서하기 - 수평적인 십자가 사건

예수님의 내적치유의 길 가운데 다섯 번째 방법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입니다. 즉 우리가 용서 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하여 주는 십자가의 수평적 사건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수직적, 수평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온전한 역사로 나타납니다. 죄 사함을 받은 감격으로 이웃의 죄를 용서하여 주고 풀어 놓아 주는 사건입니다.

용서하기는 가장 좋은 치유의 약입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가운데 많은 상처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는 것보다도 용서하는 일이 더욱 힘듭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면서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강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적극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마 11:25) 용서, 이것은 사탄이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어떤 사탄의 훼방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용서가 있는 곳에 아름다운 치유의 열매들이 맺히게 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용서 받기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 받기의 체험이 있을 때 ‘자기를 자기로부터 풀어 놓아 주는 용서하기’가 일어날 것입니디ㅏ.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가롯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쳤지만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베드로는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합니다. 나를 괴롭히고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 한 그 누군가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위한 용서, 그것은 곧 자기를 위한 용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만큼 정신적, 신체적, 영적 소모가 큰 것은 없습니다. 원수를 풀어 주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영적 억눌림이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치유를 위하여 상처를 준 사람을 풀어 놓아 주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고 풀어 줄 때에 자신의 병도 치유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욥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의롭다고 주장하실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직적인 십자가의 사건, 용서 받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온전하게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병이 온전하게 나은 것은 자신에 대하여 불의하게 말한 친구를 위하여 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수평적인 십자가 사건, 용서하기가 일어날 때에 진정한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용서하기는 내적치유를 완성하는 귀한 사건입니다.


⑥ 새로운 신분으로 회복하기

여섯 번째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길은 ‘새로운 신분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곧 주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발견되는 기쁨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은 자신들이 ‘포로가 아니라 예배자’라는 자아상을 찾게 됩니다. 수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더러운 여인, 버려진 여인이 아니라 마을로 뛰어 들어가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의 자아상을 찾게 됩니다. 베드로는 비겁한 배반자라는 자기 이미지에서 ‘주님을 위하여 핍박 받고 순교할 수 있는 용감한 제자’로의 자아상을 찾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거지였으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곧 주님을 쫓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은 그 분을 위하여 핍박받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더 이상 귀신들린 자도 아니요, 창녀도 아니요,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의 자아상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신분, 감정, 관계를 허락하였지만 예수님은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심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근본적인 치유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천하다고 생각할 때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할 때에 진정한 치유와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에 주님은 “한 번도 정죄하시지 않으시고” 새로운 존재를 향하여 눈을 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결국 ‘길’이 되어 주셔서 암흑과 상처 가운데 절망하던 우리들에게 치유와 강건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 안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신분으로의 회복이 우리 모두에게 시급한 과제입니다.


⑦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기

일곱 번째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길은 ‘상처 대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길’입니다. 상처를 하나씩 꺼내어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사탄이 그동안 상처 받은 감정에 세웠던 집들을 부수어 버리고 새로운 집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온유, 겸손, 평강, 기쁨으로 다시 채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신령한 것으로 채우게 될 때에 아픈 상처들은 회복되어 건강한 은혜의 생활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말씀으로 다시 채우지 않을 때에 나갔던 귀신이 더 강한 귀신들을 이끌고 들어온다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빈집으로 남아 있을 때에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치유 받은 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공급받고 채움을 받지 않을 때에는 이전보다 더욱 상황이 악화되는 수가 있습니다. 치유 받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상황이 더욱 나빠지게 되면 ‘좌절감, 절망, 자기불신’ 등이 일어나서 “나는 불가능한 존재야.”라고 더욱 깊은 상처로 들어가기 쉽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채워 주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그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적치유 이후에 이렇게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필수적인 후속 조치입니다.


⑧ 예배자로 성장하기 - 예배와 드림

주님의 치유 방법 가운데 여덟 번째 길은 회복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치유에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회복하여 성장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곧 성화에 이르고 거룩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사탄이 세운 집을 허물로 새로운 집, 생명의 집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삶입니다. 24시간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면서 온전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보좌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공급 받는 삶으로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치유는 미래지향적입니다. 과거나 현재에 얽매여 그 사건을 기억하며, 상처 가운데에서 비난하고 비판하며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일어나게 하십니다. 주님은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허락해 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신뢰’해 주시고 미래를 향하여 일어나게 하십니다. 진정한 치유의 힘은 이렇게 믿어 주시고 밀어 주시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내적치유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경배하는 예배자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증인으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곧 신령한 성전의 영성으로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예배자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아물지 않는 상처들을 통하여 이러한 예배자로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이제는 이 방해물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대적해야 합니다. 아물지 않는 상처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처든지 주님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는 없습니다. 이제 치유의 장소로 함께 뛰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⑨ 이웃과 삶을 나누기 - 섬김과 나눔

주님의 치유 방법 가운데 마지막은 이웃과 삶을 나누면서 완성됩니다. 곧 증인의 삶, 사랑을 나누며 섬기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로 회복될 뿐만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증인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삶과 인격을 이 땅에서 재현해야 합니다. 이러한 온전한 영성으로 회복하는 것이 내적치유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치유는 이러한 목적을 향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그 상처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영적 억눌림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 이제 이웃을 사랑하며 나누며 섬기게 될 때 우리는 온전한 건강을 회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선의 축복, ‘샬롬을 받게 될 것입니다.


6. 내적 치유의 위험성과 열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내적치유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성도들은 내적치유 세미나나 캠프에 참여하여 많은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내적치유라는 말이 생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내적치유에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7. 내적치유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내적치유는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치유를 통하여 거룩한 성전의 영성으로 회복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내적치유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성도들도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믿고 집착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내적 치유는 길고 긴 성화의 과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적치유만을 받았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 내적치유를 받은 후 건강하고도 거룩한 존재로 성장하지 않으면 이 내적치유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적치유를 받은 후에 계속적인 후원(follow-up)과 성장이 필요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내적치유란 지속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이지 성장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치유 캠프에 갔다가 온 성도들이 이 치유로 말미암아 자신이 다 되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8. 내적치유는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위험성은 내적치유를 받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발견되는 상처에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내적치유를 한 번 받고 난 후에는 영원히 그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또 다른 상처가 드러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자신이 전에 받은 상처의 치유는 무엇이었는지 의심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번 내적치유 과정을 거쳤다고 하여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지속적으로 조명하여 주셔서 새로운 상처, 드러나지 않았던 상처도 또 다시 드러내어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치유될 수 있습니다.


9. 내적치유는 상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성장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내적치유를 접한 성도들이 잘못 지도를 받을 경우에는 언제나 상처만을 바라봄으로 인해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상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어.” 하면서 오히려 상처를 원망하고 잘못되어진 모든 원인을 그 상처로 돌리는 경우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상처만을 바라보면서 정죄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나 내적치유는 ‘치유와 성장’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상처’에 집착하고 고착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명한 의도를 알지 못한다면 사탄은 오히려 이 내적치유를 통하여 성도들을 더 억압할 수 있는 통로를 얻을 것입니다.


10. 내적치유는 상처를 다루는 태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내적치유를 공부하는 목적은 ‘치유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상처를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터득하고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상처들은 끊임없이 드러나고 또 우리의 삶에서도 새로운 상처들이 계속 생기게 됩니다. 그러한 상처들과 문제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어떤 태도로, 어떤 원리로 이 문제를 다루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느냐를 가르쳐 주는 것이 내적치유의 목적인 것입니다. 곧 수영하는 원리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문제의 강(江)에서, 상처의 강(江)에서 우리가 헤엄쳐 나올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치유를 받고 아무런 문제 없이 살자는 거시 아니라 끊임없이 닥쳐오는 문제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대처하는가를 배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적치유를 받음으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 당당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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