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19세기 후반 미국의 유명한 부흥운동가였던 무디(D. L. Moody)는
자신이 1881년에 저술한 [은밀한 능력](Secret Power)에서,
신자는 복음 증거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신자들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비록 신자들에게 성령이 거하실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미 거듭난 신자는 성령께서
강한 능력으로 자기에게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령은 복음 증거의 영이시다(눅 24:48-49; 행 1:8).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지속적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복음 증거의 삶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경우들처럼, 우리는 "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고전 2:4)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오늘날의 전도와 선교의 현장, 그리고 교회 사역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면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 증거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범상치 않은 능력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병고치는 은사, 영들 분별함, 능력 행함, 믿음,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등과 같은 성령의 나타남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면 교회의 유익을 위한다 함은 무슨 말인가?
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굳게 세워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성령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또 교회의 신앙을 굳게 세우는 일을 위해
초월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불순한 욕망을 위해서
성령의 나타남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정욕적이다.
그것은 이미 성령의 나타남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아무리 희한한 기사와 이적이 어떤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일의 결국이 교회의 유익과는 관계없이
그 사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쓰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의 나타남이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것은 왜 그런가?
그리고 누구는 병고침의 은사가 있고 또 누구는
예언의 은사가 있는 듯이 말해지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나타남이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고전 12:11), 즉 성령께서 필요한 상황에 따라
그분의 결정에 의해서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타남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욕심으로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다고 간구해서가 아니라
, 신자가 성령의 주권적인 뜻과 인도하심에 순복하며
사역해 나갈 때 그를 통해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타남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당신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삶속에 나타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당신의 자랑과 즐거움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그릇된 동기이므로 성령의 나타남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당신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역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주님께 당신의 온 몸과 마음을 드려라!
그래서 온전히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삶을 이루라!
그리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당신의 사역 속에
나타날 것을 믿고 행하라! 그러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뜻 안에서,
성령께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적절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드러내신다.
신앙계/배본철
19세기 후반 미국의 유명한 부흥운동가였던 무디(D. L. Moody)는
자신이 1881년에 저술한 [은밀한 능력](Secret Power)에서,
신자는 복음 증거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신자들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비록 신자들에게 성령이 거하실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미 거듭난 신자는 성령께서
강한 능력으로 자기에게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령은 복음 증거의 영이시다(눅 24:48-49; 행 1:8).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지속적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복음 증거의 삶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경우들처럼, 우리는 "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고전 2:4)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오늘날의 전도와 선교의 현장, 그리고 교회 사역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면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 증거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범상치 않은 능력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병고치는 은사, 영들 분별함, 능력 행함, 믿음,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등과 같은 성령의 나타남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면 교회의 유익을 위한다 함은 무슨 말인가?
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굳게 세워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성령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또 교회의 신앙을 굳게 세우는 일을 위해
초월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불순한 욕망을 위해서
성령의 나타남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정욕적이다.
그것은 이미 성령의 나타남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아무리 희한한 기사와 이적이 어떤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일의 결국이 교회의 유익과는 관계없이
그 사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쓰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의 나타남이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것은 왜 그런가?
그리고 누구는 병고침의 은사가 있고 또 누구는
예언의 은사가 있는 듯이 말해지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나타남이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고전 12:11), 즉 성령께서 필요한 상황에 따라
그분의 결정에 의해서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타남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욕심으로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다고 간구해서가 아니라
, 신자가 성령의 주권적인 뜻과 인도하심에 순복하며
사역해 나갈 때 그를 통해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타남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당신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삶속에 나타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당신의 자랑과 즐거움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그릇된 동기이므로 성령의 나타남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당신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역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주님께 당신의 온 몸과 마음을 드려라!
그래서 온전히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삶을 이루라!
그리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당신의 사역 속에
나타날 것을 믿고 행하라! 그러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뜻 안에서,
성령께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적절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드러내신다.
신앙계/배본철
출처 : 사모님들의 쉼터
글쓴이 : 나드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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