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성령론에 대한 10가지 테제
사도행전 19장 1-10절은 한 학기동안 "성령론"이란 강의를 하면서, 우리들에게 화두로 주어지는 본문이다. 기복신앙은 물질주의와 비슷한 개념으로서, 특히 한국의 성령운동의 물질주의적 요소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몰트만은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를 강조한다. "성령론"이라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론에 대한 10가지 테제를 우선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자.성령론에 대한 10가지 테제중, 첫 번째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에서 신중심론적(종말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인의 문화(죽임의 문화, 물질의 문화)를 아벨의 문화(성령의 문화)로 바꾸자는 이야기다. 두 번째의 테제는 연역적 방법이 아닌, 귀납적 방법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하나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틸리히는 성령론을 "중생한 자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는 성령이 인격적이냐 사건적이냐의 문제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표현 양식의 문제일뿐이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문제이다. 로마서 8:23, 고린도후서 1:22절을 보면 성령은 미래에 대한 보증이라는 이야기이다. 네 번째의 테제는 성령과 창조이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다. 이 창조는 일회적인 창조가 아니라, 계속적 창조이다.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때까지 지금도 창조를 완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테제는 성서와 성령이다. 성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령의 내적 증명은 성서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여섯 번째 테제는 성령과 그리스도이다. 여기서는 예수는 성령의 동반자인가? 아니면 성령의 파송자인가?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일곱 번째 테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 즉 종말론과 성령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의 역사속에서 성령의 활동한 결과이다라고 말한다. 성령은 예수를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어 가는 과정, 즉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과의 투쟁의 역사이다. 여덟 번째 테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다. 예수의 구속사건을 부활이후의 오순절 사건까지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홉번째 테제는 성령체험과 성령의 은사이다. 초대에는 성령의 역사를 종말론적 사건으로 묘사하였다. 성령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힘이다. 마지막으로 열번째 테제는 성령과 성령운동이다.
II. 聖靈은 어떤 분이신가?
성령의 체험, 하나님의 체험이 없는 목회자가 선교를 했을 경우 그 선교는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한계나 부재등으로 인해서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론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한다. 그리고 목회현장에서 심리학적인 치유 방법이 많이 동원된다. 이로 인해 교회의 세속화는 날로 더욱더 가속화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원동력은 루터의 하나님체험이었다. 루터는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체험한다. 거기서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토마스 뮌처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오순절 사건이 이땅에 재현되기를 원했던 이들이다. 우리 나라에서 동학혁명을 일으킨 최재우도 한울님(하나님)을 체험한다. 갑오개혁이 동학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최재우의 이런 종교적 체험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 몰이해는 기독교사상계의 빈공을 초래하였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성령운동은 비성서적 방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고, 그 이유는 성령과 성령운동에 대한 신학적 비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론에 대한 시급한 이론적 정립이 필요하다.
1. 희랍철학적 '영'이해
고대 희랍인들은 영을 생명을 움직이는 원인, 힘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접촉점으로 이해하였다. 탈레스는 우주는 물과, 신령, 영으로 이해, 호모는 인간의 영혼은 혼과 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혼은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와서 다른 육체속에 들어가 살기도 한다고 믿었다. 영이 될려면 반드시 피와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은 지식의 대상으로 보았고, 피로서의 영은 힘과 생명운동의 원리로 보았다. 플라톤은 이 영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했다. 인간의 영과 혼을 철저히 분리했다. 육은 영혼의 감옥이고 악한 것며, 구원은 육체속에 감금되어 있는 영의 해방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을 인격적으로 해석하여 희노애락을 느끼고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즉 이성적인 생명체(Animal rationale)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영이해는 중세의 스토이철학과 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성서적 영이해는 이것과 다르다. 성서는 영혼과 육의 이원론을 알지 못한다. 구약에서의 인간은 육과 살아있는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회퍼는 "인간은 영과 육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영과 육이다."라고 말한다. 플라톤적 영이해는 성서적 바탕속에 있지 않다.
2. 성서적 '영'이해
구약성서의 '영'이해
구약은 영을 입김, 바람, 생령등 역사안에서 활동하는 어떤 신적 기능으로 묘사한다. 구약에서는 '영'이라는 말을 루아흐(Ruach) 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힘, 능력으로 표현한다. 이 능력이 임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언자들이 예언의 능력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이 영(생기, 호흡)이라는 말이 네페쉬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여진다. 하나님만이 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인간과 동물까지도 영을 가지고 있다. 칠십인역에서는 이 루아흐를 푸뉴마로 쓴다. 이것은 힘,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을 받은 사람은 신비적인 힘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해나간다. 구약에서는 영을 종말론과 연결시켜 이해한다.(종말론적 약 속의 성취) 하나님의 영(종말론적 영)을 강조한다. 창1:2,2:7,6:17절 말씀을 예로 들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성서는 구약에서 메시야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령을 메시야의 나타남으로 이해한다. 성령은 내적 인간의 새창조와 사랑안에서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았다. 또한 성령은 올바른 정의와 거룩성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으로도 보았다. (요엘서 3:1-5) 하나님은 종말의 때에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신다고 말한다. 요엘서 3:1-5은 BC4세기의 야훼의 날에 대한 종말론적 사상이 들어있다. 모든 야웨를 믿는 사람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어떤 학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서, 교회, 신학이 들어와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직접성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요엘서에 나타난 종말의 영의 임재로 이해한다.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영'이해
신약성서에서는 영을 인격적 존재로만 표현한다. 특히 바울신학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성령을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한다. 공관복음서에서의 영이해는 영적 그리스도론이다. 오늘은 요한복음과 바울의 영이해에 대해서 알아보자. 성령이해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을 의미심장하게 읽도록 하자. 누가의 그리스도론(예수이해)는 예수의 탄생에 성령이 임재하시고, 예수의 사역, 십자가 사건, 부활, 선교사건들을 성령의 역사로 비춰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누가복음 4장에 나온다. 성령의 역사와 함께 예수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사회운동도 성령체험과 함께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나다"(Ich bin da)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da는 시간적, 공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그때 그곳에 너희와 함께 할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시의 임마누엘과 연관이 된다. 모세가 체험한 하나님은 현실적인 하나님이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는 모세의 성령사건의 핵심이다. 모세는 떨기나무의 성령체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Ich bin da(내가 그때 그곳에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로 체험한 것이다. 성령체험이 없는 사회운동은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고, 역사성(사회운동, 사회적 책임성)이 없는 성령운동은 신비주의화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성령운동은 대부분이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i) 영과 혼과 몸과 육
이 세가지는 대립적인 관계이다. 영과 혼과 속사람은 바울서신에서는 동일한 실체의 다양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타난다.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사용된 곳에서는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몸은 선한것도 악한것도 아니고 선하거나 악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비해 육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력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육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 몸이 육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는 불트만의 "신약성서신학"을 참고하도록 하자. 바울은 인간, 즉 나를 여러 가지 인간학적 용어들인 영, 혼, 몸, 육으로 나타낸다. 바울에게서 인간은 삼분법이 아닌 몸과 육이라는 두가지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다시 말해서 몸(속사람, 통전적인 생명체)으로 이해한다. 바울신학에서의 영이해는 신중심론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그의 영이해는 바울의 하나님 체험(사도행전 9장)의 근거한다. 따라서 바울의 신학은 철저하게 성령론 중심적인 신학이다. 틸리히는 바울은 "성령의 신학자이다. 그의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은 그의 사상의 중심인 성령론의 중심점에 의거한다"고 보았다.(폴틸리히의 조직신학 3권) 바울은 성령체험에 근거해서 고전12:8-10절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서술한다. 성령의 열매는 육의 열매와 대립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육의 열매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ii) 요한복음의 영이해
요한복음은 영을 바람, 입김, 영혼으로 이해한다. 영은 희노애락을 가진 인격적 존재이며, 진리의 영으로써 우리를 궁극적 실재인 진리로 인도한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해주는 힘이며, 인간을 중생시키는 중생의 힘으로 본다. 영은 신적 존재로써 절대적 존재이며, 신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3. 신학적 영이해
우리나라의 증산교는 사람에게는 혼과 넋(백)이 있다고 말한다. 혼은 죽은 후에 하늘로 올라가서 신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이 된다. 또 넋은 땅으로 돌아간다. 그 후 4대가 지나면 귀가 된다고 믿는다. 혼과 넋을 이어주는 것은 정기라고 보았다. 이 氣가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희랍철학의 존재론적인 영이해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영을 이해한다. 현대신학에서는 영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본질적으로 이해했으나, 현대신학에서는 영을 존재론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영을 관계적인 입장에서 관계성으로 본다.
고대교회의 '영'이해
인간의 이해에는 Trichotomie(인간을 영과 혼, 육이라는 삼분법으로 나누는 것)와 Dichothomie(인간을 영과 육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있다. 영의 선재설이 부정된 이후에 영의 발생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영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대해서는 카톨릭과 개혁교회 전통이 강조한 Kreatianismus(인간에게 하나님이 영을 새롭게 창조해주신다는 것)과 Traduzianismus이 있다. 전자의 창조설에 관해서는 두가지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육체속에 영혼을 부어주신다고 하면 인간은 유전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이다. 그리고 육체가 있어야 영이 생기는데, 그러면 육체가 영보다 먼저 생긴 것 아닌가?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인간의 영은 인간의 정자를 통해서 유전되어 간다는 Traduzianismus(유전설)이 있다. 이것은 루터파에서 주장하는데, 영과 육은 동시에 생기며, 영은 영적 씨앗을 통해서 인간에게 유전되어 나가는 것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죄도 이러한 영의 영적 씨앗을 통해서 유전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영'이해
영과 육의 관계에 대해서 관계를 가진 시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을 육체적인 본질과 결합되어 있는 정신적 본질로 이해한다. 토마스 아퀴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해서 인간의 영을 몸의 본질적 형식으로부터 인식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본회퍼는 "인간이 영과 육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육과 영이다"라고 말한다. 영은 몸의 본질적 형식이라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영'이해
인간의 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영은 이성이라고 본다. 헤겔은 이성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척도라고 말한다. 틸리히는 계몽주의 시대에는 인간의 영을 이성과 동일시하고 만물의 척도로 보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영, 정신, 의식을 이성과 똑같은 영역속에서 이해하였다. 틸리히는 이러한 자유, 이성, 자율, 조화라는 네가지로 분류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틸리히가 말하는 신율(자율)이라는 말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타율은 낯선 권위에 의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것을 어떤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나의 심리적 두려움을 피하려는 인간의 행동이라고 보았다. 틸리히가 말하는 신율은 우리 안에 임재한 신적인 영, 다시 말해서 성령의 현존에 관해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경험을 의미한다. 내안에 임재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자신의 신학은 신율에 기초한 신학이라고 말한다.
현대신학의 영이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영을 하나의 본질로 보았다. 현대신학에 들어와서는 영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적 경험으로 이해하였다. 독일어에서 '죄'라는 말은 Sunde와 Schuld라는 두가지의 용어를 쓴다. 에밀 부르너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하나, 바르트는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능력이 없고, 단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해줄때만 가능하다고 본다. Sunde는 '죄'라는 의미이고, Schuld은 '과실'의 의미이다. 전자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용서해줄수 있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후자는 그렇지 않다. 인간이 용서해줄수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영을 관계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현대신학자들의 영이해는 다음시간에 더 자세히 하도록 하자.
4. 성령의 명칭과 상징
성령의 명칭
프뉴마, 거룩한 영, 영은 그리스도의 선물로 이해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영은 생명의 영으로 이해되고,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기능적 의미에서는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보혜사, 진리의 영으로 호칭된다. 성령은 모두가 다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공기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구절에 따라서 바람, 폭풍, 미풍을 의미하기도 하고, 호흡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람에서 발전해서 생명의 본질, 생명력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기적과 이적의 현상들을 성령의 은사와 연결시키고 있다. 성령이 하나의 능력인데 우리에게 임하면, 지식의 말,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을 받는다.
성령의 상징
성령의 역사적 활동과 관련해서 성서는 성령의 신적 활동을 상징을 가지고 표현한다. 성령의 상징은 성령의 역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특징, 성격, 하나님의 현존양태를 반영한다. 성령의 상징은 인격적인 표현, 사건적인 표현으로 상징한다. 전자는 프뉴마는 인간이 소유가능하며, 성령을 강요할 수 있고, 자기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주는 영을 독자적인 주체와 인격적인 힘으로 이해한다. 후자는 성령을 주다, 성령이 주어지다, 성령이 부어지다, 성령이 선물이다라고 표현된 성서구절에서 사건적인 상징이 사용된다. 이 때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 세력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구체적으로는 물(요7:37)로 표현된다. 성령은 영적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 요소이며,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성령의 기능과 관련해 물은 인간을 정결케 해주고, 인간을 심판해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음의 구체적 상징은 불이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불이 소멸하는 의미를 가지듯이 인간의 죄악을 소멸, 정결케 하는 소명을 의미하고, 하늘의 능력을 의미한다. 다음의 구체적 상징은 바람이다. 성령의 편만성, 보편성, 자율성을 의미한다. 성령의 절대적 주권을 의미한다. 네 번째의 구체적 상징은 기름이다. 구약성서에서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인간을 선별했다는 것이다. 기름같은 성령은 인간을 구별하고 선별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힘으로서의 성령의 역사도 의미한다. 다섯 번째는 비둘기이다. 순결, 평화, 온유 등을 의미한다. 행20장, 행2장에서는 술로 상징하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담대함과 용기를 의미한다. 또한 성령을 인치심이라는 상징으로도 표현한다. 성령이 요한복음에서는 중생의 도구로 이해되는데, 이 중생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시는 구원의 확신과 보장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보증(고전1:21-22)이라는 말이 있다. 종말론적 성취를 확증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아직도 아니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는 것이다. 성령체험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이땅에서 체험한다는 것이다. 담보라는 말과도 같은 말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종말론적 공동체가 나온다. 그들이 매일 한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쁨은 담보와 보증으로서의 기쁨이다. Y.Congar(프랑스의 신학자)은 창1:27을 해석하면서 성령을 여성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Y.Congar는 Rahem(하나님의 애정과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여성의 자궁을 의미한다. 그는 "애정은 여성적이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Julia는 삼위일체를 새롭게 해석한다. 부성, 모성, 주성의 의미로 해석한다. 카톨릭에서는 여성적 신의 모습이 있는데, 개신교에는 없다.
III. 성령에 대한 신학적 고찰
성령이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이라는 큰 사건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증언을 문자화시켜 놓은 것이 구약성서이다. 계시록은 자기의 체험을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말한다.
1.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성령이해
오순절 사건으로 탄생된 원시공동체는 성령의 충만한, 성령의 체험, 그들의 임박한 종말론적 희망속에서 살던 카리스마적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보통 교회를 독일말로 "Kirche"(루터가 에클레시아를 독일말로 번역한 말로써, 루터도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가장 올바른 말은 "공동체"(Gemeinschaft ; Gemeinde)라는 말이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1세기도 안되어 변질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고민한 것이 베드로후서이다. 베드로후서에서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라는 말로써, 예수님의 종말을 시간적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종말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너희들은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살라는 것이다. 이 말은 1세기도 못되어서 성령의 충만함이 상실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 무지, 성령체험의 결여가 한국교회가 지금 이렇게 된 이유이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상실해갔듯이 말이다. 교회성장의 근거는 하나님이 나를 쓰실수 있도록 나를 비우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리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가 신성이 있느냐?하는 문제등이 등장하게 된다.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성령이해는 충분히 논의하지 못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기독론의 관점이 강하기 때문에 성령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쉽지 않다. 교부들의 성령에 대한 연구를 세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과 기능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령은 사랑의 성령이고,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령은 지혜의 성령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레네우스(Irenaeus)인데, 그는 성령을 신이 아니라 신적 존재로 보았다. 성령을 창조자인 성부의 신적 지혜, 또는 성부의 손이다라고 보았다. 즉 성령을 하나님의 속성과 기능으로만 이해한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과 지혜로 나누는데, 말씀은 성자이고, 지혜는 성령이다. 말씀은 피조물을 존재케 하고, 지혜는 이 피조물의 질서와 형상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 사람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중요한 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할을 세대로 구분해서 설명했다는 것이다. 성부는 창조의 역할을 하였고, 성자는 구원의 역할을 하였고, 성령은 성화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일체를 "경세적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이것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이레네우스이다. 이외에도 테오피우스(Theophius;성령을 신으로 인정하되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인 지혜이라고 말하며, 삼위일체(Trias)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다.)그럼 이레네우스에 대한 비판은 없는가? 성령이 단지 신적 존재일 뿐인가?이레네우스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과 성부 하나님과의 동질성을 말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역사속에서의 자기 계시의 존재양태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터툴리안(Tertulian)을 들수 있다. 이는 삼위일체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다. 본질은 하나인데, 등급 또는 형식이 셋이라는 것이다. 경세적 삼위일체를 너무나 발전시켰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안에서 자신을 영원히 발전시켜 나간다"고 말한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안에서 자신을 영원히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역사의 각식에 자기를 계시하신다. 이 하나님의 역사속에서의 자기계시가 삼위일체 사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속에서의 자기 계시의 존재 양태를 터툴리안은 Persona라고 표현하였다. 이말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들어와서는 "인격"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윤리적 이상으로 보았기 때문인데, 이 말은 잘못된 것이다. 이 말의 원의미는 "얼굴", "탈"이라는 의미이다. 성부의 얼굴 또는 탈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성령이해를 한 사람이 2세기의 토마스 뮌처, 요하킴 폰 피오레를 들 수 있다. 그러면 요하킴 폰 피오레(Joachim von Fiore)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는 시대를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성령의 시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성령을 어떤 삼위일체에서 또 다른 하나의 위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부를 나타내는 얼굴로 이해한 것이다.이에 대한 비판은 없는가?하나님께서는 본질상으로는 하나이지만 양태상으로는 세 개로 구분될 수 있는가?이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성령의 위격과 삼위일체 안에서의 성령의 위격은 어디 있는가? 최근에 몰트만의 요하킴 폰 피오레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최근에 그는 자기의 "삼위일체와 하나님나라"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부 하나님의 나라, 성자 하나님의 나라, 성령 하나님의 나라, 영광의 나라라는 네 개의 나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성령은 성부의 최고의 피조물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리게네스, 아리우스파들을 들 수 있다. 아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들을 본성상 분리되어 있으며, 거리가 있고, 연결되지 않으며 상호간의 참여가 없다."고 말한다. 아리우스파의 급진주의자인 유로미우스(Euromius)는 성령을 성부의 부탁에 따라서 성자가 만드신 피조물이라고 말하며,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유세비우스는 성령은 셋째 등급, 제3의 능력, 최고 원인에서 나온 셋째라고 표현한다. 또 아리우스파에 속한 트로피씨(Tropici)는 아모스와 디모데전서를 주석하면서,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최고 피조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피조물들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오리게네스라는 교부는 성령에 대해서 하나님과 동등성을 이야기하면서, 성령은 피조물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오리게네스는 "성령은 말씀으로 피조된 만물 가운데서 가장 영예로운 분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온 모든 존재들의 등급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분이다. 그리고 성령은 사람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자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성령은 단순히 전달자일 뿐이며, 성령의 근원은 성부에게서 찾고 있으며, 성령이 역사하는 속성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그러면 이에 대한 비판은 없는가? 이에 대한 비판으로 성령이 피조물일 수 있는가? 성령의 사역을 성화에만 제한시킬 수 있는가? 성령이 단순히 성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에만 국한시킬 수 있는가?등이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본질적으로 동일하고(동일본질설), 신성과 인격성을 가지신 삼위일체중의 한 위격(Persona)이다.
이 말은 우리 교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말이다. 이 이론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이다. 그는 세라피온(Seropion)이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신자를 성화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성령은 성부가 성자를 통하여 역사할 때 그일에 동참하며, 그의 본질(Substantia)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하다." 아타나시우스는 오늘날의 성령이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그는 성령론을 구원론과 그리고 인간론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그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는 성령에 대한 이야기중에서 구원론과 연결시켜 성령의 사역중에서 가장 큰 사역으로서의 "인간의 신화"(Vergottlichung ; 인간을 신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몰트만의 이 "신화"라는 말을 영광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이 계신 것은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함이며, 성령은 우리를 신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성령론은 교회의 공식적인 성령론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아타나시우스의 성령론을 신학화하고 발전시켜나간 그룹이 있는데, 그들을 캅파도기아 신학자들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로는 Basilius der groBe와 Gregory of Nyssa, Gregory of Nayianzen이다. 바실리우스는 "성령론"(Spiritu Sancto)이라는 책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다. 그는 "성령의 위계성과 권위가 그의 역할의 힘과 위대함이 성서가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서안에 나타난 성령의 역할, 상징을 성서에거 끄집어 낸다. 성서적 성령론을 썼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성령의 사역을 성화와 신화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성령은 성화자이며, 성화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활동의 절정, 최고의 활동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로, 성령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성령은 아들처럼 출생한 것이 아니라, 발현․출현했다는 것이다. 바실리우스는 "성령은 아들처럼 출생(generato)한 것이 아니라, 발현하시고 출현(processio)하셨다. 그래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실리우스는 성령의 동일본질성과 신격과 인격성을 강조하면서, 아타나시우스의 기본적인 성령이해를 발전시켜 나간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바실리우스는 말한다. 그 외의 두명은 바실리우스와 비슷한 의견을 전개해 나간다. 그런데 특이하게 닛사의 그레고리는 성령을 교육자로 본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교육을 통해서 온전한 인간으로 성화시켜 나간다고 주장한다. 이 때 성령의 교육적 사역은 인간이 협력하고 동참할 수 있다. 성령과 인간의 협동으로 일할 수 있다. 나이안젠의 그레고리는 바실리우스가 불명확하게 설명한 "성령은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확정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강조한다. 그는 성령에 대한 5편의 논문을 썼다.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 한다. 이 중생은 변혁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변혁은 우리를 변혁자의 가치를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성령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Nous(영, 이성), 주의 영, 자유의 영, 지혜의 영, 경건의 영"이라고 표현한다. 캅파도기아 신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성령론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2.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
325년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확립되면서, 더 이상 기독론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문제는 대두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문제는 많이 취급하지 못하고,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한줄이 전부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성령에 대한 확고한 이론을 정립한다. 그 회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령은 주요, 생명의 수여자이다. 그는 성부로부터 나왔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되고 영광을 받는다. 그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했다."성령론은 삼위일체와의 관련속에서 주된 문제는 성령의 출원 문제이다. 성령이 어디에서 나왔는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두가지 이론이 나왔는데, 하나는 이중출원론이고, 다른 하나는 단일출원론이다. 이중출원론은 서방교회에서 강조되었으며, 단일출원론은 동방교회에서 강조되었다. 교회사에서 일어난 최초의 교회분리의 원인은 바로 이 성령의 출원문제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성령의 단일출원론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서 성령이 출원했다는 것이다. <<성부→성자→성령>> 여기에 속한 사람으로는 리사의 그레고리가 있다. 그의 이야기는 동방교회의 공식적인 성령의 출원문제에 대한 이론이 되었다. 리사의 그레고리는 성령이 가지고 있는 동화불이 성자에게 전달되어 붙고, 성자의 불이 다시 성령에게 옮겨졌다고 말한다. 이와는 달리 이중출원론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방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탄생했다는 것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왔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서방교회 사람들은 위의 문구를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라고 바꾸었다. 이 주장의 대표적인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태어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processio, filique)는 것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은사를 받은 분이다. 성부와 성자의 공통의 선물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의 영이고, 성자의 영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어거스틴은 "성령은 삼위일체로써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사랑의 고리"라고 표현한다. 이것을 사랑의 관계로 본 것이다. 인간이 창조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관계가 인간의 흔적속에 남아있다고 주장한다.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사랑의 관계성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였는데, 이 사랑의 고리라는 개념은 바르트의 삼위일체 개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바르트도 이 "사랑의 고리"라는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쓴다. 삼위일체가 관계적 존재인 것처럼 우리도 관계적 존재이며, 고립되어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다. 몰트만은 이 관계성을 사회학적으로 확대시켜 나가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몰트만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신학이 전개되어 나간다. 그는 이것을 정치적 관계성, 사회적 관계성으로 보고 신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이에 속하는 사람으로는 에피파니우스 (Ephiphanius)를 들 수 있다. 에피파니우스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왔다고 말하면서 이중출원론을 주장한다. 이외에도 롬바르트<Peter Lombard ; 최초의 신학 교과서(De Sententia;신앙개조)를 쓴 사람>를 들 수 있다. 그는 성령을 사랑이라고 정의내린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은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시고,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 그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종교개혁자들의 성령이해
오늘은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성령이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교부들은 삼위일체에서 성령이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느냐? 또는 성령이 무어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성령이 어디서 나왔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것들을 바탕으로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그 당시의 성령운동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우리는 그 예를 종교개혁자들이 토마스 뮌처라든가 재세례파 사람들을 루터는 "열광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1530)을 기록한다. 이것은 종교개혁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루터는 여기서 열광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성령운동을 반대하는 이유는 두가지인데, 첫 번째는 실천적 이유이다. 그 당시 종교개혁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신흥부르주아계급이 등장한다. 그리고 왕권으로서의 영주권이 강해지고, 루터는 바로 이사람들을 등에 엎고 종교개혁을 시도한다. 그런 지지속에 있던 종교개혁이 그 당시 성령운동을 하던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들은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면서 영주들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는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같은 사람들의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신학적 이유이다. 루터나 칼빈들은 성령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말씀과 성례전으로 보았다. 루터가 본 말씀은 성서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례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재세례파 사람들은 말씀과 성례전을 부정하고 성령의 직접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았다. 그런데 재세례파 사람들은 성령의 직접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결국은 중간에 예수그리스도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에 염려 때문에 그 당시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 사람들이 추진했던 종교와 사회의 개혁을 반대하였다.
루터의 성령이해
루터는 특별히 성령론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은 없다. 그들은 성령에 대한 관심보다는 기독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루터의 기독론은 니케아 신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신성와 인성의 연합) 고백에 중심을 두고 있다. 성령을 신도들의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언급한다. 루터는 그의 글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제 5 조에서 잘 말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복음과 성례전을 통하여 성령을 주신다. 성령은 그가 원하시는 곳과 때에 복음을 듣는 사람들안에 믿음을 생기게 한다. 복음은 우리가 그것을 믿으면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업적을 통하여 은혜의 하나님을 가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복음의 살아있는 말씀없이 성령을 자신의 준비, 또는 사상 그리고 공무를 통하여 쟁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제세례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루터의 성령론은 성령은 복음과 성례전을 매개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복음과 말씀없이 성령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루터는 성령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 번재로 성령은 율법에 의해서 죽고 복음에 의해서 살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율법을 통하여 자책감으로써 영혼을 때리자마자 곧 복음을 통한 치유의 향유를 발라주신다." 두 번째 성령은 신앙을 창조하고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하고 우리가 의롭게 되도록 인도한다. 루터는 신앙생활을 끊임없는 악과의 투쟁으로 보는데, 여기에서 힘을 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본다. 여기서 말씀은 문자화된 말씀으로서의 성서와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말한다. 이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생기게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성취된 의를 우리에게 연결시켜 주신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2천년전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머리속에 인식의 사건으로만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여 그것이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나 성화시킨다. 아니 그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이다. 성령이 그 말씀을 친히 정화하신다.~~~ "
칼빈의 성령이해
칼빈은 성령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서술한다. 그는 기독교강요 1권, 3권, 4권에서도 성령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칼빈은 특히 성서 속의 성령에 대한 서로 다른 호칭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칼빈은 성령에 근거하여 성령을 양자의 영(로8:15), 보증의 영(고후1:22), 약속의 영(에베1:13), 의의 영(롬8:15), 물(이55:1), 불(눅3:16)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크게 세가지고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성령의 내적 조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구원의 은총을 전달하는 역할을 성령이 한다. 세 번째는 우리에게 신앙을 주고 우리가 회개하도록 하는 역할을 성령이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성령의 내적조명에 관련해서 칼빈은 교회의 권위, 교회의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해석하는 잣대가 성서의 권위에 있고, 이 성서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내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성서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없이 믿지 않고는 그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럼으로 성서의 최고 증거는 성서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특징이 모든 곳에 나타난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인간의 이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내적 조명 또는 성령의 비밀의 증거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서해석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을 세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첫 번째는 인식이다. 하나님을 객관적 대상으로 놓고 우리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앞에 접근하고자 하는 방법을 인식(Erkenntnis)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인식의 작업을 전작업(Vorarbeit)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령의 내적 조명을 말한다. 우리의 성령의 내적조명에 의한 성서해석이 잘못될 수 있는데, 이것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학문적 인식방법(전작업)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계시를 통한 인식방법이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계시가 완전히 드러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세 번째는 성령의 직접성(Wahrnehmen)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잘못 변질될 가능성이 많다. 칼빈이나 루터가 말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은 세 번째의 성령의 직접성과 연관이 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1권(7.5)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받은 성서의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판단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제1권의 다른 부분에서(8.13)에서는 "성서는 그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설득에 의존할때에만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을 효과적으로 산출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구원의 은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원의 사역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해준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의 영이면서, 성자의 영이다. 그는 기독교강요 3권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묶음줄(연결자)이다."라는 말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정말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고,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가지와 줄기가 하나로 연결되도록 하는 역할을 성령이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고, 회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지만, 내적 교사인 성령이 그 말씀을 깨닫도록 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기독교강요 3권 2.34) 칼빈은 "우리의 마음속에 신앙을 형성하고, 견지하고, 보존하고, 확정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회개라는 말을 "회개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성실하고 진지한 경외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옛 사람의 죽음과 영안에서 부활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외적 변화와 영적인 변화,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경외와, 나의 육체의 소멸과 영안에서의 소생을 회개라고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성례전과 관련해서 성례전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하나의 인간적인 행사에 그치고 만다고 보았다. 성령이 임재하지 않는 성례전은 아무 효과가 없다고 보았다. 성령만이 성례전을 효과있게 하고 우리에게 의미있게 만든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령이 임재한 성만찬을 "영적잔치"라고 표현한다.
4. 현대신학자들의 성령이해
종교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서만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보았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성령이해의 한계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교리화한 정통주의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성서만을 주장한다. 그래서 성서의 축자영감설, 성서무오설을 주장한다. 정통주의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와 일치시킨다.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다. 성령의 활동과 성령의 역사를 성서의 문자속에 가두고 말았다. 이러한 정통주의자들의 교조주의적인 성령운동에 대해서 반대해서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운동(독일), 웨슬레의 부흥운동(영국), 성령의 내적조명을 강조하는 퀘이커 교도들이다.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것들을 교리화시키고, 교조화시킨 정통주의자들은 성령이 역사할 자리를 없애고 말았다. 즉 그들의 신학은 객관주의에 빠진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성령이해
정통주의자들은 종교를 객관적인 것으로 보고, 이성을 강조한 반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학은 신학하는 사람과 교회가 처한 상황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서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황적 신앙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교의학의 방법과 내용을 교회가 공동적으로 체험한 종교적 체험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교회 공동체는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는 성령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성령이란 모든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 신뢰의 정신이다" 교회 공동체내에서 믿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줄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인격성은 완전히 해소되어버리고 만다. 성령이 인격성이 있는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정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론이 기독론의 하나의 범위가 되어 버리고, 하나의 위격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성령이 하나의 독립된 위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뢰의 정신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게는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이위일체론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리츨의 성령이해
그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였다. 그의 인간론에서 그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았다.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나라,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성령을 받는 것, 성령충만하라는 것은 질문자체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한 질문대신에, 먼저 우리의 윤리적 삶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안에 삶을 산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사는 것과 동일시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은 일을 통해서 성령안에 있는 삶을 증명하는 일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고마우신 은사를 안다는 것과, 하나님을 그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사랑과 기쁨 ~~~"
에밀 부르너의 성령이해
부르너는 성령론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교의학(Dogmatik) 3권에 성령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성령론을 서술하는 신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성령론의 방법론은 성서안에 있는 성령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해서 정리하는 것이 성령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학술방법은 자기기만이라고 본다. 그리고 성령은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본다. 성령은 객관적으로 놓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불트만은 성령을 신비적 요소로 본다. 부르너는 우리는 반드시 성령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말할수 있다고 본다. 부르너는 성령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양태(Modus)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면 성령을 하나의 존재양태로 본다면, 양태론적 인식론이라든가 삼신론에 빠질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그는 성령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인격적 현존으로서 우리가 알 수 있고, 고백하도록 한다. "성령은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그 계시가 성령에 의해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계시로 되게 한다." 이 말은 역사적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그리고 나서 두가지를 더 말하는데, 성령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그리고 새로운 심리적인 힘과 육체적인 힘을 창조하게 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아들을 통해서 계시되고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성령이해
현대 신학자중에서 성령론에 대해서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논문을 쓴 사람이다. 조직신학 3권 4편의 "삶과 영"이라는 부분에서 성령론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틸리히의 신학을 "상관관계의 신학"이라고 한다. 삶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의 신학을 상관관계의 신학이라고 한다.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다. 성령론도 틸리히는 이 방법의 원칙에 따라서 해석하는데, 삶의 모호성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라는 범주안에서 성령론을 전개한다. 틸리히는 성령이라는 말대신 "영적 현존",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성령은 인간 정신에 나타나는 영적 현존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 삶의 한 차원으로 존재의 힘과 존재의 뜻의 결합을 의미한다." 인간이 성령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의 힘과 존재의 뜻이 결합된 인간 정신에서 가능하고, 인간 정신의 영적 체험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이러한 인간의 정신속에 머물고 행동한다. 인간의 정신이 영적 현존에 붙잡힌 상태를 "황홀"이라고 표현한다. "영적 현존 경험의 황홀적인 성격은 인간 정신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기하지 않지만, 인간 정신만으로는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한다. 그의 자기 초월의 본성에 의하여 인간은 모호하지 않는 삶에 대한 물음을 물을 수 있도록 쫓긴다." 인간의 영적 현존의 경험은 인간 정신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도 인간의 이성을 파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인간정신을 넘어서는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은 인정한다. 틸리히는 영적 현존은 인간의 힘으로 강제로 오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종교적인 열정(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인 복종, 과학적인 정진이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내리도록 강요할 수 있다면, 그 때 그 내린 영은 종교적인 변장을 한 인간의 자기 욕구의 충족일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있는 일이며, 인간 정신의 상승이며 인간의 자기 초월의 자연적인 형태이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강요할 수 없다." 틸리히의 성령론의 결론은 성령의 체험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다. 다름으로는 영적 현존의 매체에 대해서 알아보자.틸리히는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틸리히는 전통적인 루터나 그 외의 사람들이 말한 매체(말씀과 성례전)를 인정하면서, 그를 넘어서고자 한다. 틸리히는 토마스 뮌처나 제세례파들의 의견을 비판하고, 말씀과 성례전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무언가를 가정한다. 틸리히는 성령의 매체를 거부하되,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말씀과 성례전에 제한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작용은 모든 인격적이고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성령이 역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 당시의 성령운동가들이 성령의 직접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하나님의 자기 현현은 어떤 형태에도 묶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오히려 영적 현존은 확정된 말씀과 성례전을 넘어서서 성령은 이와 같은 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인간의 깊이에 살고 있고, 영이 말할때는 내적인 말을 통하여 말한다. 마지막으로 틸리히는 인정을 하되, 하나님은 매체없이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같이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매체를 거부하되, 또한 매체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성령의 매체가 필요하되, 그것이 말씀과 성례전일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성령의 역사를 말하면서 틸리히는 성령은 인간에게 믿음과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정신의 무한한 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삶의 모호성을 극복하고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또한 틸리히는 성령 그리스도론(영그리스도론)을 말한다.
칼바르트(Karl Barth)의 성령이해
바르트의 성령이해는 삼위일체론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타아로써 자기를 계시하신 것을 아들 하나님으로써 본다.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을 영으로 계시하신 것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자신을 타아로 계시하는 것과, 영으로 계시한 것이라는 두가지로 본다. 그러면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사랑의 고리로서의 성령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르트의 내재적 삼위일체(존재양태로서의 성령이해)이다. 바르트는 철저하게 서구전통인 이중론적 출원론을 따르고 있다. 바르트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이 인간과 맺고 있는 일정한 관계에 불과하다"라고 성령의 정의를 내린다. 여기서는 성령의 독자적인 인격성이 파괴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사람이 성령의 비의를 풀려호 하면, 이 자유란 개념을 택하는 것이 좋다. 영을 받는다는 것, 영안에 산다는 것은 자유롭게 하는 것, 자유안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는 바르트가 말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간을 위한 것으로 만든다고 본다. 이 역사는 인간의 결단, 능력, 노력으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기초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고 본다. "인간이 성령을 받고 오시는 것은 인간의 체험과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환상과 무의식이 차원이 아니라 전인격이 요청된다."
위르겐 몰트만(Moltmann)의 성령이해
성령을 기독론적 입장에서 이해한다. "성령의 도래를 위한 기도는 마라나타 기도이다"라고 말한다. 몰트만에 있어서 성령을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부활이후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의 성령을 강조한다. 성령의 강림이 요엘서 3장 1절, 창세기 9장 10절을 인용하여, 성령은 동물과 식물위에도 임한다고 말한다.("Die Quelle des Lebens"라는 책에서)그리고 성령을 철저하게 생명의 원천으로 이해한다. 몰트만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오순절 성령사건까지로 보고 있다. 카톨릭 신학자들도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령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는 세례때부터 승천까지이다. 승천 이후에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되었다는 것이다.(성령강림사건) 성령안에서 파송받은 그리스도가 이제는 성령을 파송하는 파송자가 된 것이다. 몰트만은 성령의 강림과 부활의 현현을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식한다는 것과 부활의 영안에서 중생의 능력들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이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오순절없는 부활절도 없다. 오순절 신학이 없는 부활의 신학이 없는 것처럼, 부활의 신학이 없는 오순절 신학은 없다."고 말한다.또한 몰트만은 현 사회 또는 정치사회적 문제와 관련해서 성령의 선교와 성령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성령의 역사를 "생명문화의 창조"라고 말한다. 성령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이 세상에 온전한 생명을 가져온다. 몰트만은 생명운동과 구원의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낸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선교는 "새 생명의 선교"라고 표현한다. 이 "새 생명의 선교"의 근원을 블룸하르트(아버지 블룸하르트)에서 찾는다. 종교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근심에서 모두에 대한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 생명운동의 본질이고 방법이라고 표현한다. 몰트만은 "생명의 영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 영광의 나라로 본다. 다음으로는 몰트만이 말하는 성령체험에 대해서 알아보자. 첫 번째로 몰트만은 성령체험을 "신생(Neugeburt)"이라고 표현한다. 그 근거로 요한계시록 21장 5절을 말한다. 이 "신생"이라는 말은 인간의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몰트만은 "평화의 체험"이라는 표현을 한다. 우리의 평화와 더 나아가서 정치, 문화의 평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화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나오는 자기 자신과의 일치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내 자신속에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은사는 선포의 은사, 봉사의 은사, 실천의 은사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성령은 철저하게 생명의 영이고, 이 성령의 역사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확대시켜나간다. 그러면서 카인과 바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어 간다.
카톨릭의 성령이해
카톨릭이 1994년에 교리문답서를 새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근거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성령이란, 성부 하나님이 아들과 성령을 동시에 보내셨다고 보는 것이다. 교리문답서에 보면, 아버지가 그의 말씀을 보낸다면, 그는 항상 그의 입김을 같이 보낸다. 여기서의 입김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을 이 사람들은 성서에 나오는 Paraklet라는 말을 사용한다. 요한복음 14:16절에 나온다. 이 말은 "보혜사, 위로자, 원조자"라는 의미이다.(요한일서 2:1) 카톨릭에서는 성령을 철저하게 이러한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령을 보혜사로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보혜사가 아니라 "대리자(Stellvertreter)"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령을 철저하게 인격적인 분이시며, 그리스도가 성령을 보내신다. 그리스도가 성령을 오순절날 보내심으로서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명칭에 대해서, 예수는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바울은 약속의 영, 아들됨의 영,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 하나님의 영으로, 베드로는 성령을 영광의 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식의 장소를 교회로 본다. 살아있는 신앙체로서의 교회는 성서, 전통, 교회의 직책, 성례전이 이루어지고, 기도하고, 은사자들이 있고, 성인들이 있는 곳이다. 카톨릭에서 말하는 성령의 상징에 대해서 여덟가지로 나누어서 알아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물이다. 물은 세례때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중생의 성례전적 상징이라고 이야기한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는 살아있는 물이다. 두 번째는, 기름부음이다. 견진성사(세례이후의 또 하나의 성례전)와 성례전적 표징이다. 첫 번째 기름부음은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말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받은 자로는 다윗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세 번째는, 불이다. 불은 물과 달리 물이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생명과 관련이 있다면, 불은 성령의 행위, 즉 변화시키는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성경이나 교회사속에서 불이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네 번째는 구름과 빛이다. 구름과 빛은 성령이 나타나실 때 항상 동행하는 현상이다. 시나위산에서의 모세의 하나님 체험, 광야에서의 구름기둥과 불기둥, 솔로몬의 성전 헌당 등을 예로 든다. 그러나 구름과 빛의 상징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본다.(눅1:35, 눅9:34-35, 행1:9)다섯 번째는, 표이다. 예수는 표나 봉인으로 보고, 이 표는 세례식, 견진성사의 성령의 기름부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여섯 번째는 손이다. 예수는 안수를 통하여 병든 자를 고치시고,(막6:5, 막8:23) 안수를 통하여 어린이들을 축복하시고,(막10:16) 사도들도 안수를 통하여 병든자를 고치시고, 또는 안수함으로 성령을 주었다. (행5:12, 행14:3) 히브리서는 안수를 그의 가르침의 근본요소로 간주했다.(히6:2) 따라서 교회는 안수를 성령의 모든 가능한 기름부음으로 인정한다. 일곱 번째는 손가락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눅11:20) 여기서 손가락은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율법을 쓰셨다.(출31:18) "창조의 영이여 오소서"(Veni Creator Spiritus)라는 노래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표현한다. 손가락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덟 번째는 비둘기이다. 비둘기는 하나님의 평화와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알아보자. 첫 번째로, 죄의 용서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랑이 성령의 첫 번째 은사이고, 이 사랑의 첫 번째 작용은 우리의 죄의 용서라고 본다. 따라서 성령과의 교통(사귐,고후13:13)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돌려주는데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독일어로 Gottesbild와 Ahnlichkeit라는 두 개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톨릭에서는 후자이다. 후자는 유사성의 의미로 볼 수 있고, 전자는 형상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성령의 은사는 종말론적 선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산을 위하여 우리에게 보증금과 속량금을 주셨다는 것이다.(롬8:23, 고후1:21) 이러한 삶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어진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원리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종말론적인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성령의 사역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완성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카톨릭의 성령이해는 개신교의 성령이해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단 성령의 인식의 장소를 교회에 국한시켰다는 것에서 다른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카톨릭의 성령이해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람은 칼 라너이다. 칼 라너의 초월적 경험으로서의 신학은 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칼 라너는 1976년에 쓴 "성령의 체험"이라는 논문에서, "성령의 체험은 일상적인 경험으로 평가절하되거나, 또는 순수한 믿음의 모든 내적인 즉 탈세상적, 내면적 신앙형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체험을 "초월적 경험"이라고 말한다. 일상적 경험도 아니고, 탈역사화된 경험도 아닌 초월적 경험이라는 말이다. 모든 대상성이 전체를 견제할 수 있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순수한 체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성과 자유, 삶, 사랑이 문제되는 그곳(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현실)에 하나님과 그의 해방하는 은혜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의 현실성을 성령체험의 곳으로 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칼 라너는 인간의 현실성속에서의 초월적 경험, 영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이 이 시간적 세상보다 더 크다는 것(더 초월적인 분이라는 것)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의미와 세상의 의미가 이 현실성(세상)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월적 경험, 영적 경험이다. 그리고 칼 라너는 성령의 창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두가지 방법을 서술한다. 성령은 창조의 기원과 미래이다. 창조의 역사와 초월, 은사와 수령, 지식과 사랑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이중적인 창조의 역사를 말한다. 미래, 초월, 수령, 사랑을 성령의 사역으로 이해한다. 미래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속해 있고, 역사를 초월하며, 주어진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우주적 생명이며, 창조적 성령이다. Die junger Kirchen(새롭게 생기는 교회들, 신교회)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성령의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IV.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창조이전의 구원의 사건, 재창조의 사역에 참여하였다. 창 1:1의 하나님을 복수로 본다면,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에 참여하셨다고 볼 수 있고, 수면위에 운행하는 영는 성령이다. 성서를 단순한 하나의 역사적 문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으로 권위있게 만들고, 성령은 2천년전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으로 믿고 깨닫게 하는 작업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사건에 성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하였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가능케 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게 한다.
1. 창조와 성령
서구의 일반적인 신학은 창조론에 있어서 주로 말씀을 통한 창조를 이야기한다. 기독론 중심의 창조론을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전거(기독론 중심의 창조론)를 이제는 성령론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한 창조사역에 관심해야 한다. 몰트만은 시편 104:29-30을 근거로 해서 "성령안에서의 창조"를 강조한다. 몰트만의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성령론적 창조론을 주장한다. 몰트만은 바실리우스의 말 "창조는 하나님의 의지안에서 시작하여 아들의 활동을 통하여 존재하게 하며, 성령의 조력을 통해서 완성되게 된다."를 인용한다. 성령은 창조를 완성하시는 창조의 영이다. 창조된 모든 현실은 신적인 영의 실현된 영의 가능성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창조되고, 성령안에서 실존하며, 성령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과 관련해서 성령은 언제나 능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성령은 재창조의 사업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능케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
성령은 만물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존재의 기반, 존재의 영이었다. 몰트만은 성령론적 창조론을 주장한다. 창세기 1:2의 영을 "루아하"를 성령으로, 욥기 26:12-13의 "신"도 성령으로, 욥기 27:3의 "영"도 성령으로 본다. 성령은 창조의 본질을 가능케 했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사귐, 피조물간의 사귐을 가능케 하며, 성령안에서의 창조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관계적이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부버의 말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창조안에 참여하는 성령은 네가지의 활동을 한다고 보는데, 창조하는 활동, 보존하는 활동, 쇄신하는 활동, 완성하는 활동을 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창 1:2을 해석하면서 "우주적 성령"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세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는 성령은 창조자의 능력이요, 창조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두 번째는 모든 창조는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형성된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세계에 내재한다는 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재창조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창조적 사건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적인 창조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Creatio Continua : "계속적 창조") 처음의 창조는 無에서 有를, 지금은 有에서 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죽임의 세력을 살림의 질서로 바꾸는 해방의 영(생명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혼돈을 질서로,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영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재창조를 통해서 발전해 나가고, 역사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이다. 성령은 재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나라, 영과 육의 끊임없는 갈등의 투쟁의 역사인데, 성령은 우리에게 이 투쟁을 가능케 하는 힘과 용기를 준다. 시편 104:28-30은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투쟁하는 영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런 면에서 성령은 해방의 영이다. 슈바이처는 성령이 예수님한테 임할때를 재창조의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재창조는 처음의 창조때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은 재창조(새창조)를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시대를 재창조의 시기로 보았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새창조의 시대로 보았다. 재창조를 요한복음은 특별한 단어를 쓰는데, 그 단어가 "중생", "거듭남"이다.
성령은 역사를 변혁하며,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이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생기(루아하)"가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할 때의 성령과 동일한 성령이며, 성령은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명도, 역사도 야훼 하나님의 성령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역사를 변혁하며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라는 것이다. 이종성 박사는 이스라엘 민족과 성령의 관계를 네단계로 나누는데, 류장현 교수님은 세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한다. 첫 번째 단계는 이스라엘은 성령을 초기에는 역사 변혁의 원동력으로 이해했다. 인간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과 관련된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고, 또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물리적인 힘으로도 이해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성령의 사역의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는 시기이다. 성령을 매개체로 한 성령의 역사보다는 성령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성령을 무시하기도 하였으나, 후기예언자들에 와서야 성령의 역사가 강조된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 나라(종말론)와 관련하여 성령의 역사적 체험을 강조하는 시기이다.(종말론적 성령관 : 성령의 현재성을 강조) 성령의 활동이 개인적인 범위에서 우주적, 역사적,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되며, 그와 함께 성령의 개인적 체험도 강조된다. 이 개인적 체험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때에, 미래의 성령의 폭발적인 임재를 예언하게 된다.
이종성 박사의 주장을 알아보도록 하자. P.J.Rosato의 논문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P.J.Rosato는 성령을 세가지로 나누는데, 첫 번째는 창조의 영(Spiritus Creator)이다. 창조의 영의 사역속에 민족의 역사의 변화까지도 포함시킨다. 두 번째는 재창조의 영(Spiritus Recreator)이다. 여기서는 영적 그리스도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세 번째는 초창조적 영(Spiritus Transcreator) 이다. 여기서는 역사적인 십자가의 사건을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영으로서의 초창조적 영을 강조한다. 성령을 해방의 영으로 보았다면, "성령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책에서는 성령은 자기 중심적 지배적 세계를 정복하러 오시는 권능이다라고 말한다. 성령과 민중의 운동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생각한다. 그래서 민중운동에는 성령의 바람이 있고, 성령은 힘없는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 세상이 민중의 세상이 되도록 투쟁을 고무하시는 영이다. 성령의 역사를 "민중의 중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내적 장애물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민중의 중생이 민중해방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중생한 민중이 상호유기적인 조직체를 구성해야 하며, 세 번째는 중생한 민중들이 세계적으로 연대해야 하며, 네 번째는 민중의 조직된 힘으로 정치, 경제를 통제해야 하는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2. 성서와 성령(의 영감)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왜 기록된 문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가? 루터나 칼빈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도구로써 말씀과 성례전을 이야기한다. 루터파에 의하면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함께 있고, 선포된 말씀(설교)속에 성령이 실재적으로 활동하고 임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사역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루터파에서는 "durch das Wort"(말씀을 통하여)라고 주장한 반면에, 개혁파(칼빈)들은 "mit das Wort" (말씀과 함께)라고 주장한다. "말씀을 통하여"는 말씀속에서만 성령의 사역이 가능한 반면, "말씀과 함께"라는 말은 말씀의 밖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은 말씀속에 갇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씀 자체가 자동적으로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의 합동작용설"을 주장한다.
영감론(靈感論)
"영감"이란 말은 불가타역의 inspiro(동사)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또는 inspiratio(명사)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17세기 이후의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사용된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성서는 하나님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본 반면, 정통주의자들은 성서는 하나님이다라고 보고 그것의 근거로 영감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성서를 절대화하고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하였다. 교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이 그의 저자이다. 구약에서는~" 이들은 더 나아가서 성서의 권위를 그 성서를 기록하신 하나님이나 성령이 아니라 기록된 문자에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축자영감설"이다. 기록을 하신 주체이신 하나님과 성령은 빠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영감설에는 네가지의 학설이 있다. 첫 번째는 구술설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불러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 썼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부분적인 영감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이 직접쓰시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축자영감설(기계영감설)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전체영감설이다. 이것은 성서 기자들의 특징을 하나님께서 인정하면서, 성서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감론의 배후에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살아계신 말씀과 성서의 문자로 기록된 말씀을 혼동하는데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의 직접성의 상실인 것이다. 그래서 라가츠가 말한 "성서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부정을 통해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긍정으로 돌아오는 변증법적 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라가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살아있을수록 성서는 우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그 자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성서가 우리를 살아있는 하나님에게로 자유롭게 할수록 우리는 더욱 성서에게로 가까이 간다." 성서가 정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서는 자기를 떠나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도록 인도해준다는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는 쓰여진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한 야훼 하나님의 기록이라는데에 있는 것이다. 성령은 이 때 이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성서기자에게 깨닫게 하고 그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케 하고, 후세대를 위해서 그 사건을 문서로 기록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서의 권위는 성서기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 성령과, 그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올바른 해석이란 무엇인가? 성서는 하나님의 체험에 대한 기록이다. 서남동 교수는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말을 하는데, 이스라엘의 민중의 체험과과 우리 민중체험이 같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말인데, 류장현 교수는 "두 체험의 합류"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전에 체험한 하나님 체험과 지금의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 체험과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이 두 체험의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넘어서서 이 두 체험이 만나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류장현 교수는 이 "두 체험의 합류"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것은 실존론적 해석(Existentielle)인데, 불트만이 말하는 실존론적 해석(Existentiale)과는 다른 의미이다. 전자의 실론론적 해석은 체험에 근거한 실존론적 해석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싸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사건과 성령(영적 : 성령 - 그리스도론)
서구신학은 로고스 그리스도론을 받아들이는데, 2세기 중엽에 등장하였으며, 저스틴에 의해서 주장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로고스 그리스도론을 극복해야 한다. 로고스라는 말의 어원을 찾아보자.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모두 로고스로 번역하였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이 로고스를 세계를 지배하는(토마스 아퀴나스) 신적 이성이라고 보았다. 후기 스토아학파에서는 이 로고스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였다. 그럼 왜 로고스와 말씀을 일치시켰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연구하다보니 그 신분과 지위에 맞는 단어를 찾아야 하는데, 그리스도란 헬레니즘의 영향에 의해서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어떻게 초월적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고 이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영과 육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중간을 이어줄 분이 필요했는데, 바로 이 중보자가 그리스도이다. 이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말을 찾은 것이 로고스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대리자)로서의 역할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신적 계시로서의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의 성서적 전거는 요한1:1, 고전8:6, 골1:16, 히1:2등이다. 후에 그리스도의 변증론자들에 의해서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은 신학에서 후퇴하였다. 벌코프에 의하면 로고스 기독론은 철학적 함축성 때문에 복음의 실상을 왜곡시켰다는 비판을 한다. 성령대신 로고스가 강조되면서 성령의 역사적 내주가 아니라 로고스가 성육신을 설명하는 원리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성령론적 그리스도론(Spiritus Christologie)이란 무엇인가?로고스 기독론의 장점은 그리스도론을 위로부터 내려오는 구속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기능을 설명하는 강조가 있다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선재설 강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와 예수가 성령에 의해서 성화하고 발전해온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빌 슈나이더는 성령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는 사람인데, 그는 그리스도교(개신교) 신학은 급성 성령망각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 신학은 수세기 이래로 사도신경의 둘째 조항인 그리스도론에만 집중하는 신학에 집중하다보니 구원사건으로서의 오순절 사건을 망각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잘못된 그리스도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신학에 맞서서 성령신학을 주장한다. 보렌도 그의 설교론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언어 상실증은 오직 성령이 옴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의 활동은 세상에서 발견되고 명령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론이라고 할 때 기독론의 출발점은 예수가 인성을 가지냐 신성을 가지냐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성령을 받은 자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H.J.크라우스는 성령그리스도론을 주장한 사람인데, 그리스도는 영부음을 받은 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기름부음받음으로 시작한다. 교부들중에 이그나티우스는 기독론은 성령론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독론 "탄생 - 성장 - 하나님나라 운동 - 고난(십자가) - 부활 - 승천 - 오순절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빠져있던 오순절 사건까지 포함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로고스기독론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성령 그리스도론에서는 오순절 사건을 중심으로한 사건들로 이 문제를 설명한다. 오순절 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단순한 예수의 사건이 우리를 위한 사건이 되도록 깨닫게 해준다. 성령 사건(오순절 사건)에 근거해서 앞의 사건들을 해석한다. 크라우스는 예수의 메시야성의 비밀은(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던 것) 성령론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우선 예수의 탄생(마태1:18)에 대해서 알아보자.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다. 탄생부터 성령과 관계된다. 다음으로 성장(눅2:25)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리고 세례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다. 눅4:1의 예수가 유혹받은 것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해서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가셨다"라는 말이 있다. 다음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시작 (눅4:14)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라는 말이 나온다. 16절 이하에서 예수의 공생애시작을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성령이 충만해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외에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 치유하는 사건도 하나님의 능력, 권능, 성령과 연관되어 있다. 부활하신 이후에 성령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리고 이땅에 사시다가 승천할 때, 성령을 약속한다.(행1:8)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들이 오순절날에 성취되었다. 특히 누가복음이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빌 슈나이더는 사도신경을 성령론적으로 해석한다. "성령으로 잉태하사"는 하나님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탄생)을 의미한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이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고 성령의 강림을 이야기하신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성령안에서의 교통, 교제함,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과정이다. 즉 공동체 안에서 고양된 그리스도론이다. 이런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폴 틸리히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게 한 것은 그의 인간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정신을 사로잡아 움직인 영적 현존이다"라고 말한다. 영적현존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는 곧 영이시다라고 강조한 바울의 성령그리스도론에 모순되지 않는다. 틸리히는 바르트 신학의 "주는 곧 영이다"라는 말을 성령론적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역사의 영적 현존(성령이 만든 큰 머리돌과 같다.)이며, 예수의 사건은 이 성령론적 입장에서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의 기본 테제이다.
H. 벌코후
기본질문은 "예수의 동반자 예수냐?" 또는 "성령의 파송자 예수이냐?"이다. 그 사람은 공관복음서와 바울과 요한서신을 비교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성령이 예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예수는 성령의 동반자이며, 바울과 요한의 서신에서는 예수를 성령의 파송자로 보았다고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예수를 성령의 파송자로만 보고 동반자로 보지는 않았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1장의 표제어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씀되어진 것들은 성령의 비밀스러운 활동에 의하여 우리에게 유혹을 준다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는 계시의 주체적 실체이며, 성령은 계시의 종속적 실체"라고 말한다. 즉 성령은 예수에 종속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벌코후는 이 두가지(예수는 성령의 동반자, 예수는 성령의 파송자)를 같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령을 파송할 수 있는 파송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성령을 받은자이기 때문이다.그러면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이 후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르낙에 의하면 희랍철학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교리를 변질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희랍철학의 영향으로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은 본성론적 싸움(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강조간의 싸움)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희랍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죽음이 극복이었고, 플라톤의 영향으로 영혼불멸설이 들어오면서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종말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이다. 초대교회는 종말을 시간적 의미로 이해하였는데, 실제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베드로후서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독론적 성령론과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의 회복을 위해서 성령을 단순히 성령을 그리스도의 보조적 실체로 이해하는 것(칼 바르트)을 극복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하스퍼는 본성적,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서 인격적, 역사적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이 둘을 종합하려고 한다.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그는 서구신학은 로고스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분리해왔는데, 이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영의 케노시스"(빌립보서 2:5)라는 개념을 가지고서, 로고스의 성육신과 성령의 내주를 종합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은 성령의 자기제한, 자기낮춤, 자기헌신을 전제한다고 본다. 이유는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창조의 고난의 역사는 창조안에 거하는 영의 고난의 역사이며, 창조의 영은 이 고난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가 되도록 한다고 말한다.
결론 : 말씀 그리스도론은 존재론적 그리스론이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으며, 성령그리스도론은 종말론적 그리스도론이며, 그리스도의 사역, 운동이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따라서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본성론을 극복하고, 구약성서적 전망에서 해방자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루돌프 보렌은 로고스 그리스도론에서는 우리를 위한 대리적 죽음이 중요하고,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에서는 우리와 함께 활동하는 성령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보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우리를 자신의 행동안으로 받아들인다. 성령은 활동함으로서 우리를 활동시킨다." 그리스도론에서 대리를 의미하는 것이 성령론에서는 상호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우, 동반자, 친구로서의 인간으로서 이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설교가 권위주의적 구조를 갖는 것은 우리가 성령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차원에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로고스 그리스도론은 위로부터의 구속론을,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은 아래로부터의 구속론을 강조한다.
4. 하나님 나라와 성령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짤막하게 넘어가도록 하자.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종말론"과 "묵시론"은 구별이 된다. "묵시론"은 Aon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주전 200 - 주후 100년사이에 새로운 대안으로서 나온 종말론의 한 종류가 묵시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on"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세대"로 번역할 수 있는데, 독일어로는 generation이다. 페르시아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기독교가 페르시아의 식민지하에 있으면서 받아들여서, 본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이 이것과 혼합되면서 묵시론이 생기는데, 페르시아가 가지고 있던 다신론적 요소가 없어진다. 옛창조(악의 세계)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창조(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종말론을 역사(7000년)으로 구분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그러나 이런 구분은 매우 비성서적인 것이다.
2000년
2000년
2000년
1000년
창조→
아브라함→
예수그리스도→
종말 - 공중재림, 질병, 전쟁,→
하나님나라→
자유주의 신학자인 리츨이나 슐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 나라를 윤리적으로 해석하였다. 리츨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최종목표로서의 최고선이라고 보았다. 그외에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느냐? 픽슬레이의 "하나님 나라"라는 책에서 그는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면서, 특히 땅의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론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개념이 있었는데, 전체의 종말론을 해석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안병무도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 개념으로 본다. 박재순은 하나님 나라를 어떤 민중의 열망과 욕구와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 모두는 극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양극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이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중세기의 요하킴 폰 피올레이다. 그의 신학은 뮌쳐 및 그의 사회변혁의 힘으로 작용하였으며,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이해, 서남동의 민중신학까지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령의 역사적 체험(실존적 체험)을 통해서 이미 선취된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몰트만의 종말론적 사고는 비판을 해야한다. 그의 하나님 나라는 시점이 미래에서 현실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관점은 예수그리스도, 구약에서 시작되어 오고, 예수안에서 현실화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도래했고, 성령을 통해서 선취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미래를 보아야 한다.
요하킴 폰 피올레
요하킴은 기독교전통속에서 나오는 두가지의 종말론을 종합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어거스틴에 의해서 발전된 세대론적 종말론이고, 둘째는 캅파도기아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하나님의 역사통치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할려고 하는 시도)이다. 이 둘을 종합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하나님 나라이해이다. 하나님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성령의 나라로 구분하고, 이 나라는 서로 상호연관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사를 하나님의 창조와 상응한 것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요하킴은 정통주의자들의 하나님나라 이해를 종합하려고 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
1-6일
7일(안식)
세 계 사
수고와 노동의 시대
안식의 해
삼 위 일 체
성부(학문의 상태, 두려움의 상태, 아버지의 관계가 중요), 성자(지혜의 상태, 자녀들의 예속의 상태, 신앙의 상태등), 성령(세계종말, 충만한 인식의 상태, 친구들의 상태, 낮의 광명과 같은 상태, 성령과의 관계가 중요)
하나님 나라
몰트만
그는 요하킴 폰 피올레의 영향을 받고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나라 이해를 발전시킨다. 그는 루터의 두왕국론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몰트만은 요하킴의 인식(연대기, 삼위일체론적으로 분류)을 받아들이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시대,나라(하나님의 창조, 세계사, 삼위일체/성부의 나라, 성자의 나라, 성령의 나라)로 나누는 양태론적 구분은 비판한다. 그러면서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성부의 나라가 성자의 나라가 되고, 성령의 나라가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가 된다. 아버지의 나라는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는 세계의 창조라고 정의한다. 아버지의 나라는 이 세계의 유지, 마지막에 갈 영광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창조는 역사의 끝인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되어진다. 그래서 계속적인 창조가 되는 것이다. 결국 창조의 연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몰트만의 정치신학의 관점이 여기서 나오는데,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적 창조이기 때문에 이 계속적 창조를 방해하는 정치적 질서나 세속적 질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배격해나가야 한다. 두번째는 아들의 나라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통치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의미가 있다. 아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어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였고, 그는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예수는 고난과 죽음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장차 올 영광의 나라를 다스릴수 있는 권세를 획득했다. 세번째는 성령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아들을 통해서 해방된 인간이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경험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성령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속에 있으며,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해방과 자유,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이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 마지막은 영광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아버지의 창조의 완성이다. 그리고 아들에 의해서 실현된 해방의 우주적 실현이다. 성령의 임재적인 성취가 되는 것이다. 세가지의 종합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창조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구약의 사건들이 신약에 와서는 약속의 성취로 이해된다. 그리고 신약의 성취는 하나의 미래를 향한 약속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복음은 약속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따라서 성령의 나라는 역사와 죽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는 시작을 한다. 그러나 몰트만이 가지고 있는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나라도 비판해야 한다. 첫번째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창조, 구원, 영광이라는 삼위일체론적 테마를 가지고 해석하는데, 이러한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성서적인가? 교리적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성서에서 하나님 나라가 연대기적으로 구분해서 선포했는가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따라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나라 이해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맞춘 이해이지, 성서가 이야기하는 종말론적 입장에서의 하나님 나라이해는 결여되어있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궁극적으로 몰트만과 요하킴은 하나님 나라를 자유의 나라와 일치시킨다. 과연 하나님 나라가 자유의 나라인가? 이것은 판넨베르크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도 자유란 개념은 모호한 개념이다. 인간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인간을 풍성하게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는데, 몰트만이 하나님 나라를 자유의 나라와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서구신학의 산물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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