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의 다섯 제사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 제사들은 한꺼번에 같이 보면 이 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온전한 제사를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며 그것을 각각 분리해 보면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의 다섯 가지의 다른 면을 각각 제시해 줍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 그들의 교제, 그들의 예배 등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여러 가지 필요를 채우시는 방법들을 각각의 제사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레위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이 애급 땅을 떠나 하나님께 구별되어진 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만 함께 있기 위해 광야로 인도 되어�으며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예배와 봉사에 관한 사항들을 그들에게 지시 하셨습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그 사막에서 그 신비의 장막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을 가득 채웠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여호와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불완전함과 실패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희생제물과 제사장 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다양한 예비하심을 실생활에서 배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애급 세상에 미련을 두거나 그 방법대로 사는 사람들은 참된 교제와 예배에 대해 거의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도를 하나님과 가까이 유지시켜 주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여러 가지 면들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점과 실패로 인해 자기 영혼이 그리스도의 희생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의 놀라운 것들 안에서 매일 매일 휴식을 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너무나 무뎌져서 그들의 눈에는 그것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교제하며 동행하는 가운데 이 사막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진가를 헤아려 알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과 궁핍을 배워감에 따라 그는 이 제사의 온전 성과 부요함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이와 같은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든지 못하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사역 안에서 하나님께 영접된 상태에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복스러운 사실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나 장성한 어른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 점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바위위에 모두 동일하게 서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평안과 기쁨, 영적인 삶의 능력과 성장도는 이와 같은 축복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즐기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 되는 것입니다.
제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곧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제사와 죄를 위한 제사 입니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제사에 속하고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를 위한 제사에 속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순서는 첫째가 번제이고 이어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순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나(레14:12,13)) 제사장 위임 식 같은 것에서는(레8:14:18) 제사의 순서가 반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이 지닌 각양각색의 부요함을 깨닫는 순서입니다.
우리는 맨 처음 그분을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분으로 압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헌신의 결핍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신 분으로 알게 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양심이 쉼을 얻을 때까지는 참된 교제와 예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온전한 희생의 부요함과 충분 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심각한 필요를 보게 되는 때 입니다.
속건제
속건제와 속죄제의 뚜렷한 특징은 알고 범했든지 모르고 범했든지 간에 죄를 범했을 때 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의 제물은 성막 뜰의 번제 단에서 불살라지지 않고 진 밖으로 가져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제물로서 맹렬한 불에 살라졌습니다. 드리는 자의 죄가 이 희생 제물에 씌어졌으며 이 제물의 목숨이 그를 대신했습니다.
이것들 모두는 죄와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를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공의의 모든 요구를 채우신 그분의 죽음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바 되셨으며”(고후5:21)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습니다.”(벧전 3:18)
그분이 드리신바 단 한 번의 온전한 제사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사람들의 죄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처리되었으며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죄와 속건제 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 덕택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우리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6:7)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10:1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롬4:7)
속건제는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습니다.(레6:1-7)
이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나 다른 사람에게 어떤 악한 행위를 했을 때 드려졌으며 특별히 두드러진 점은 그것이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악한 행위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보통 성령께서 죄인을 다루시기 시작할 때 맨 처음 그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죄악 된 삶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며 이제 그는 그 거룩하신 재판장을 만날 것을 생각하고 떱니다. 이 같은 일깨움을 받은 곤고한 영혼에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건제가 되셨다는 소식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는 소식은 얼마나 복스러운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배상해야 할 그 어떠한 것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온전히 다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았을 때 그리고 “모든 죄가 사함 받은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은 얼마나 기쁜 순간이었습니까?
우리가 변화를 받은 이래로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속건제가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자주 기뻐하고 있습니까?
속죄제
영적으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갈 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그의 내면을 비추게 되면 그는 자신이 악행을 지지르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온갖 부패하고 죄악 된 성품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거역하는 반항심이 있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알게 모르게 주님께 반항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별로 죄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들이 진리의 빛에 의해 죄로 드러나게 되면 이제 그는 부지중에 그 죄를 오랫동안 저질러 온 것에 대해 몹시 근심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예비하심이 속죄제 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죄를 위한 제물로 자기 영혼을 드리신 그날 담당하셨던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익히 아는 죄뿐만 아니며 거기에는 그 거룩하신 재판장께서 아시고 판단하신 죄도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자각은 그 빛의 양과 우리 양심의 민감도가 어떠하냐에 따라 클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그 크신 속죄제물 위에 지우시고 멀리 옮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다루시어 그것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십자가에서 단번에 해결하셨으며 그 보혈의 영원한 효력이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것으로 영원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혼은 얼마나 복 받은 영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자기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될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그의 죄 값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어 영원한 형벌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지라도 그가 죄를 자백하지 않고 계속 범하면 아버지의 신실하신 손이 매를 드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녀들에게는 죄에 대한 자백과 용서가 계속적으로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지중에 모르고 범한 죄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부지중에 범한 죄를 죄로 간주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레5:17)라는 말씀은 하늘 배심원들의 변개할 수 없는 평결입니다.
무지가 곧 죄는 아닙니다. 무지를 무죄로 여기는 것은 종종 빛에 대한 반항이 너무 오래 계속된 결과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멋대로 가지고 놀았기 때문입니다. 양심과 마음이 너무나 무감각해지고 강퍅해져서 자기가 범하는 것이 가장 가증스러운 죄인인줄도 모르고 범할 때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그분의 성도들을 핍박하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겠습니까! 제사장들과 예루살렘의 관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레23:34) 베드로도 그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고 그리하였으며”(행3:17)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리했어도 악한 일을 한 것은 사실이며 아무도 무죄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소성의 바울도 핍박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했고” 그 일을 행했다고 고백했습니다.(딤전1:13) 우리 주위에는 그 마음이 소경이 되어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면서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불 못으로 인도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도성에 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 중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자기들에게 비추었던 그 빛을 시시하게 여겼기 때문에 진리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가르침과 명령들이 그들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양심을 활동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종종 듣습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표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성경에 의해 인도함을 받지 않는 양심은 사단의 손아귀에서 끔찍한 도구로 쓰여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계시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신선한 빛이 우리의 영혼을 비춰서 오랫동안 지켜온 어떤 전통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면 오랫동안 사랑해온 친근한 관계가 진리의 빛에 의해 좋지 않은 멍에 즉 어두움과의 교제로 드러나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부지중에 지은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을 그렇게 오랫동안 해 온 것에 대한 슬픔과 함께 그것과의 관계를 끊고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부지중에 지은 죄 때문에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진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속죄 제물은 흠 없는 것으로 드려져야만 했습니다.
주 예수께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셨습니다.(벧전1:19)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며(고후5:21) 죄를 범치도 않으신 분입니다.(벧전2:22)
속죄제의 희생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었습니다.(레6:25) 그것은 여호와의 존전에 드려졌으며 제물을 드리는 자는 자신을 그 제물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는 마치 “저는 이 희생물을 저의 대속 물로 삼습니다.”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그의 손을 희생제물이 될 짐승의 머리 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드리는 자의 죄는 그 짐승에게로 옮겨졌으며 그 어린양은 여호와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음 외에 그 어떤 것도 그 제단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으며 짐승의 피가 제단에 쏟아 부어져야만 모든 요구가 다 채워졌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롬6:23)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고전15:3)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당신은 이 말씀을 믿었습니까? 믿는 것이 곧 용서를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영원히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 희생제물은 이미 제단에 드려졌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죄악에 물든 당신의 손을 그분의 흠 없으신 머리 위에 얹고 “주님께서는 저를 위해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라고 말을 하기만 하면 당신은 곧 하늘의 법정 앞에서 죄 없는 자로 서 있게 되며 그분의 보혈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름은 제단 위에서 살라졌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몫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 물로 자신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진가를 충분히 인정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를 삼으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분은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그 희생물은 진 밖으로 가져가서 불에 살라졌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 주님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끔직스런 부르짖음이 그분의 입술로부터 새어나온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타오르는 불꽃이 그 속죄 물을 온전히 살랐던 곳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불이 영원히 꺼졌습니다. 다시는 정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의심에 쌓인 성도 여러분 그 주님의 제단 곁에 서서 그 피와 그 기름 즉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드려진 그 생명과 그 아름다우심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공의는 더 이상 그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요구는 만족된 것입니다. 그리고 불에 살라진 짐승의 재가 진 밖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쳐다보십시오. 그것들은 바로 멀리 치워진 죄와 가라앉은 진노에 대한 기념물인 것입니다.
당신의 죄는 사라졌습니다.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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