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순종(출19:5, 신30:6,8 겔36:27)
“이 언약은 내가 너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니”그 언약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들이 순종하느냐 않느냐에 의해 좌우되었다. “너희가 순종하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
새 언약은 하나님 자신이 준비하셨다.
“너희들이 이 규례를 지키면”이라는 조항이 “내가 내영을 너희 안에 두어 그 율례를 지키게 하리라.”는 조항으로 바뀐다. 인간의 순종에 의해 좌우되는 언약과 그 성취 대신에 하나님께서 순종을 보장한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옛 언약은 성결의 필요성을 증명하였고 성결에 이룰 수 있는 길을 지적하여 주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결을 사랑하게 하고 성결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이 변화와 관련되어서 사람들은 아주 심각하고 위험한 실수를 저지른다.
새 언약에서는 순종이 더 이상 옛 언약에서 차지했던 계약의 조건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하고 반역하는 자에게 선물들을 주는 값없이 주어진 은혜가 그 위치를 대신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순종은 이제 더 이상 옛 언약에서처럼 그렇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 잘못된 생각은 무서운 실책이다.
전체 옛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기 위해서는 순종이 절대적이고도 필수불가결하게 필요하다는 교훈을 가르쳤다.
새 언약은 그러한 순종을 믿음으로 대치시키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순종을 기뻐하고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마음을 줌으로써 믿음을 통하여 그런 순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왔다.
은혜가 의도하는 순종은 하지 않고서 은혜에 만족하면
우리 자신의 순종에 의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순종의 삶을 위해 우리를 가납하는 값없이 주어진 은혜를 악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새 언약이 주는 더 고상한 특권들을 자랑한다.
그들은 새 언약의 최고의 축복, 즉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는 능력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자기의 계명들을 지키게 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하시는 생활은 배척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순종이 새 언약 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순종은 필수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가지자.
피조물의 그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 그리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자기와 교제를 가지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의 밑바닥에는 피조물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상이 깔려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시기를” 금단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 하셨을 때 요구하셨던 것은 순종 그 한 가지였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에 있어서는 순종이 우리를 구원한 능력이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순종은 새 언약의 약속에서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마음이 할례를 받게 되고-육신의 몸을 벗고 그리스도께 할례 받게 하심-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의 계명들을 순종할 수 있게 할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심으로써 온 최고의 선물은 본질적인 것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성령이었다.
첫 언약은 순종을 요구하였으나 요구한 순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새 언약의 축복을 충만하게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수적인 것이다.
새 언약을 완전히 즐기기 시작하는 일이 흔히 한결같은 헌신의 행동에 좌우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이와 같은 순종의 필수불가결한 필요성이다.
살다가 보면 악하고 의심하는 습관이 나타난다. 그런데 양심을 흔히 그러한 습관과 관련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골치 아픈 생각을 떨 구어 버리려고 많은 시도를 하게 된다. 혹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러한 습관을 극복하고 내부의 음성에의 순종의 약속을 계속 붙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게도 된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결국 영혼이 이런 하찮은 것을 그가 모든 것 가운데서 순종 하는가 않는가를 시험하는 시험으로 여기고, 또한 모든 일 가운데서 언약의 보증인이 순종을 계속 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임을 믿는 믿음을 시험하는 시험으로 여기게 될 때까지는, 믿음으로 임박해 있는 축복을 붙들 수 없는 듯이 여겨진다.
악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포기하고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확신하면 그 영혼은 찾든 것을 받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순종은 필수적인 것이다. 순종은 가능하다.
사람이 내 놓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요구를 생각하면 참된 소망과 능력이 뿌리 채 뽑힌다.(캄캄한 절벽 같은 믿음)
“아무라도 하나님을 순종할 수 없다.”는 은밀한 사상은 수천의 사람들을 옛 언약의 생활로 후퇴시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은 기대하시지 않는다는 거짓 평화를 던져 준다.
순종은 가능한 것이다. 전체 새 언약은 이 순종을 약속해 주고 있으며 확보해 주고 있다.
순종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라.
새롭게 된 새 사람도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육체의 악한 성품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육체에 속한 악한 성품으로부터 원치 않는 악한 생각과 기질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악한 생각과 기질들은 진실로 순종하는 사람에게서도 발견되어질 수 있다.
순종은 말씀과 성령과 양심이 가르쳐준,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명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죠지 뮬러가 하나님을 60년 이상이나 섬기면서 가졌던 큰 행복을 말하였을 때 그는 큰 행복을 두 가지를 들어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길을 고의적으로 계속 행하지 않는 선한 양심을 유지하였다.”
하나님의 충만한 빛이 게르하르트 터스테겐 위에 비췄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저는 당신의 도움과 능력으로 제 마음에서나 생활에서 고의적으로 당신에게 불성실하거나 순종치 않기보다는 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드리겠습니다.”(칭의의 믿음을 지키는 자만이 가능하다.)
그러한 순종이 있어야 은혜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순종은 가능하다.
율법이 마음에 기록되고 그 마음이 전심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순종하도록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과 그분 자신의 사랑은 이제 우리 삶을 움직이는 능력이 된다.
이 사랑은 인간들이 천국에나 존재한다고 상상하게 되는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역사하는 살아있고 강력한 능력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한다.
이 순종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으며,” 언약의 약속들과 언약의 중보자의 임재와 성령의 내밀한 내적 사역과 그의 무한하신 소망과 능력으로 그의 모든 사랑과 약속들을 우리 안에서 실현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믿음에 의해서 우리 안에 존속되어야 한다.
그라스도와 그분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구원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천국에나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아무리 내키지가 않고 허약하다고 느낄지라도 새 마음이 우리 속에 있음과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바로 우리의 성품이 되는 것과 성령의 가르치심과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마음이 순종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구주께서 땅에 계셨을 때보다 더 심오하고 충만한 의미로 다음을 말씀하실 때 그의 음성을 듣자.
“오직 믿기만 하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종은 축복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자.
순종을 단지 새 언약이 주는 기쁨과 축복에로 이끌어주는 방법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 자체를 가쁨과 행복으로 여기라.
여러분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기꺼이 행하고 그가 여러분 안에서 그의 성령으로 행하시는 것을 수행하고 그의 거룩한 뜻을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면서 하나님께 연합하는 이 모든 것을 정녕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며 충만한 영광이 되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걷거나 일하는 것과 힘을 발휘하여 어려움들을 정복하는 것이 기쁨이 된다.
종이나 고용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일은 얽매이는 것이 되고 피곤을 가져다주는 일이 된다.
옛 계약은 용서하지 않는 당위로써 순종을 요구하였으며 순종하라고 위협하였다.
새 계약에서는 “해야 한다.”(must)가 “할수 있다.”(can)로 바뀐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이렇게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 되었으며 포도나무가 포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과 같이 여러분이 어떻게 새로운 성품을 받아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은 순종이 가능한 것이 되도록 의도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 순종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셔야만 하는 가장 즐겁고 매력 있는 선물이며 그의 사랑과 그 모든 축복을 맛보게 하는 것이 되도록 의도하신다는 것임을 여러분께 보여주시도록 구하라.
새 언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은혜라는 놀라운 보화가 아니며 그 보화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보증해 주는 하나님의 보증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주시고 자신을 알리시며 우리의 하나님의 자격으로서 우리를 소유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위하여 인간은 창조되었고 또 그와 같은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재창조하셨다.(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 주심을 통하여 창조주로서 우리를 재창조하시어 우리를 소유하신다.)
그리고 우리로 실제적으로 그와 같이 경험하게 해주시려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벌써 이루어놓으신 일과 우리 안에서 이루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일, 그 두 가지 일 사이에 순종은 축복된 유대(link)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고귀하고 거룩한 양심으로 사는 자들 가운데 속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하기를 힘쓰자. 내가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이다.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이 새 언약적인 삶의 아름다움과 그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거룩하고 즐거운 순종의 능력을 깨닫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희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주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있었으나 제자들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 그를 알지 못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사의 종도 모든 천군이 그의 주위에 있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엘리사가 “여호와여 저 종의 눈을 여시 사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나서야 그 종은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시여, 이것을 읽기는 읽지만 그 모든 것을 깨달으려면 어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오! 그 도움을 주소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는 무한하신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오늘도 여러분을 거룩하고 행복하고 순종하는 자녀로 만드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메시지를 듣자.
그분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의 지금껏 영위해오고 있는 생활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을 준비해 두시고 계신다. 그러한 삶 가운데서는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매 순간 실제적으로 이루실 것이다.
그 삶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의 뜻이라고 보이시는 것을 종래 행하는 순전한 아이 같은 순종의 삶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성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여러분의 구주의 영구한 임재와 성령의 기쁨이 여러분을 지키고 기쁘고 강건하게 해 줄 수 있는 생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다.
이 삶은 여러분의 삶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이 생활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이 삶과 그 순종을 위해 포기하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삶이 가능하며 확실하다.
이제 바로 하늘을 향하여 성령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기를 성부 하나님께 구하라. 구하고 기대하라. 새 언약의 큰 축복은 순종이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바라고 행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순종은 사실 모든 다른 축복에로 이르는 출구이다.
롬6:14 새 언약은 은혜 언약이다.
두 언약 사이의 현저한 차이는 바로 율법과 은혜의 차이라는 진리에 대한 바른 표현이다. 새 언약의 큰 특징은 은혜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바울이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로마에 있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옛 언약에서 완전히 나오게 하고 그들이 새 언약 아래서 갖는 위치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믿고 은혜 안에서 살면 그들은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이 옳음을 증명해줄 경험을 하게 될 것을 보증해 주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 즉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일을 은혜가 완수하였다.
새 언약은 전적으로 은혜의 언약이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서 나왔다. 새 언약에 들어있는 모든 약속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될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다.
은혜란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먼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공로 없이 값없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그의 모든 축복을 우리 위에 부어주게 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은혜로운 성품이다. 그러면 은혜는 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는 능력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의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새 생활의 능력으로써 은혜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고 지금 행하시는 모든 일과 그가 가지고 계시는 모든 것과 주시는 모든 것도 포함하며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어떠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도 포함한다.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다.”라고 말한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은혜는 공급해준다.
요한이 지적한 현저한 차이를 바울이 해설해 주고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리고 율법은 넘치는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기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
율법은 길을 지적해 주지마는 그 길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은 결코 주지 않는다.
율법은 요구하지마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조항은 없다.
율법은 짐을 지우고 정죄하고 살해한다.
율법은 소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나 그 소망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율법은 노력을 하도록 분기시켜줄 수는 있으나 성공을 확보해주지는 못한다.
율법은 동기를 주어 호소할 수는 있으나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능가하는 내적 능력을 줄 수는 없다.
그리고 율법은 죄와 싸우지만 죄인들에게 소망이 없다는 정죄를 내림으로써 바로 그 죄와 동맹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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