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용서를 하기 위한 과정 - 자기 비난, 수용, 부인을 넘어서
☞ 자기 비난
-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그들의 삶을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 사랑해주고 주변의 세상으로 안내하는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다. 기본적인 필요를 채움 받지 못하고, 학대와 방관, 착취, 속임을 당하는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상처를 입고 발달이 중단된다.
- 이 모든 것들은 어디론가 돌려야 한다. 만일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를 이상화했다면, 오로지 남은 표적은 이제 아이들 자신이 된다. 아이들은 나쁜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한다. 너는 좋은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 주어도, 내면적으로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이 사실일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끔찍한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전 누가 저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말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낍니다.” 한 여성이 설명했다. “우리 가정에서는, 내가 그런 말을 들을 때는 내가 이용당하게 될 거라는 의미로 이해했으니까요.”
- 이러한 유형의 상처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은 분노일 것이다. 그러나 상처로 가득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은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기억을 애써 부인한다. 너무 어려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도 한다.
- 그러나 부인하면서 고통의 근원을 차단했다 하더라도, 분노, 절망감, 무력감, 의심, 거절의 두려움, 버림받음의 두려움, 불안,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한 감정들은 심리적인 장애나 약물 남용, 혹은 자살 같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이러한 성인아이들은 부모가 되면 자신이 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에 대해 자기 자녀들에게 보복할지도 모른다. 혹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그들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파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 범죄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적으로 부인하는 상태로 있게 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다. 치유와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 “직면한다고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면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James Baldwin)
☞ 수용
- 기억해 내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는 수용(acceptance)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실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것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린 시절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란 한 남자가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아버지를 방문할 때마다 그는 과거 몇 년 전에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때린 장소, 그때 아버지가 사용했던 혁대, 그때 떨어져 깨어진 전등까지도 생각났던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아버진 절 때렸어요. 그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어요.”
-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현실을 수용하는 것은 성 학대를 당한 희생자들에게는 특히 더 어렵고 중대한 일이다. 어떤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 계속 생각했지요. ‘이건 내가 꾸며낸 이야기야. 큰 누나가 내게 그렇게 했을 리가 없어’라고요.” 그는 자신이 절대 성추행을 당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데 몇 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시인해야 했다. “누나는 그렇게 했어요.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났어요. 전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 이들은 자신의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수용이 없이는 자유함도 없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이다. 뭔가 용서해야 할 사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 우리는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행동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다른 누군가”가 대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강력하고 영구적인 결속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의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들, 친구들이다. 경우에 따라 거리가 먼 사람이나 단체와 같다. 현실을 수용할 것이냐, 아니면 부인할 것이냐, 현실을 부인하는 것, 즉 그것을 억압하고 우리 내면에 눌러 놓는 것은 적개심만 더 일으키고 치유의 과정을 차단할 뿐이다.
-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부모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다. 친구들은 우리들을 깔보았다. 이웃들은 우리에게 무례하게 대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은 우리를 속였다. 그러한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것들은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를 바꿀 수는 있다. 그것은 용서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 많은 유대인들은 해마다 11월이 되면 크리스탈나치를 축하한다. 그것은 나치가 독일 전역에 있는 모든 회당의 유리를 다 깨뜨렸던 1938년의 밤에 일어난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몇 년 전 크리스탈나치 예배에 참석했을 때, 나는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 두 명이 연사로 나온 것을 보았다.
- 첫 번째 연사는 깊게 주름진 얼굴에 등이 굽은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겪을 참담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세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력하게 바라보며 서 있는 동안 어떻게 남편과 아들이 가스실로 끌려갔는지 이야기할 때에만 울었다. 연설이 끝나갈 때 그녀는 똑바로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독일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절대로 잊을 수는 없습니다.”
- 나는 혼자서 말했다. “저분은 용서가 무엇인지 참으로 이해하고 있구나.”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록 기억하고 있다 할지라도 용서한다는 사실에 능력이 있다. 만일 정말로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피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리는 가운데서도, 용서는 우리 자신을 삼켜버리고 결국에는 자신을 파괴하고야마는 내적인 분노, 적개심, 보복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을 발휘한다.
☞ 부인을 넘어서
- 용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수용하는데서 시작된다. 수용은 통합의 행위이다. 그것은 온전함을 향한 움직임이다. 그것은 과거를 현재 속으로 통합하고 미래를 위해 과거를 세우는 길이다.
-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일단 ‘그 일이 일어난 것’으로 수용하게 되면,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시절 우리의 아픔이 얼마나 깊었는지 느끼기 시작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했어야 할 사람들이 실제로는 우리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깨닫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옛 격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치유되려면 먼저 느껴야 한다.”
- 이것은 우리의 본성과는 반대되는 일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통제하고, 회피하고, 묻어버리는 전문가가 되었다. 180° 태도를 바꾸어 자신의 고통을 느끼기로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다. 우리는 깊은 옛 상흔을 다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정제, 알코올, 약물 등을 사용하는 것을 끊고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하다.
- 자신이 정상적인 성장과 발달 단계를 누리지 못하고 빼앗겼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해 애통해 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어렸을 때 자신의 아버지가 자살을 했던 한 남자가 생각난다. 그는 이제 “나는 한 번도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키 작은 어른일 뿐이었죠.”라고 말한다.
- 역기능 가정의 성인아이는 종종 전형적인 비애(grief)의 단계를 거친다. 분노, 부인, 절망 등이다.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던 모습, 어린 시절에 얻지 못한 것들, 부모가 채워 주지 못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애통해 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기만당하고 박탈당했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도록 허락하고, 그 속을 헤쳐서 길을 만들어, 그러한 감정을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슬퍼하는 것은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애통은 치유이다. 애통은 우리의 쓴 뿌리를 놓아 보내고, 우리가 붙들고 있는 정서적인 차용증서를 청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이 더 이상 이전처럼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도록 말이다.
- 우리는 과거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결코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반응하는 방식을 바꿀 수는 있다. 그것이 기억하는 핵심적인 이유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수용하고 용서하기 위한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일뿐이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느끼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놓아 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