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치유/내적치유

[스크랩] 내적 아이 (11) - 어린이 같이 감정에 의지함

davidtheking 2010. 1. 8. 17:00

<어린이같이 감정에 의지함>


- 사도바울이 사용한 ‘어린아이같이(νεπιος)라는 말은 성경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성인이 어린아이의 무책임한 행동을 나타내고 있거나 성장이 중단된 어른을 얘기할 때 쓰여 졌다. 똑같은 어휘가 히브리서 5장11-14절에서는 그들이 ‘아직도 아이’라 하며 숟갈로 떠먹여지거나 젖을 먹여야 하는 것을 꾸짖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장1절)라고 편지를 쓰면서 이 어휘를 사용했으며 어린아이 같은 행동들을 나열하고 있다.

-  유아기적인 행동들의 나열은 어른을 상대로 사용되어진 것이어서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 유치함들은 시간의 경과로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먹는다고 저절로 성숙되는 것은 아니며 여차하다간 주름살만 늘어날 뿐이다. 더욱이 이 유아기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바울은 얘기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형태의 사랑에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성숙한 사랑을 구한다면 우리 생활에서 이 유치함을 버려야 한다.

- 유아의 주된 특징은 전적으로 자기 위주이며 무엇도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욕구와 그 성취 사이에 시간을 기다릴 줄 모른다. 그들은 즉석에서 만족을 원한다. 또한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감정에 의지한다.

- 자기 위주이고 즉석에서의 욕구 만족을 원하는 것이라든가, 너무 감정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많은 성인들이 유아기적이다.

감정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중 사랑, 희락, 화평은 감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감정적인 삶이 온전함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령 안에서의 삶의 특징 중 하나는 인격 깊이 잠재된 모든 것이 자유롭게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우리 감정을 표출하는 데에 자유롭게 하신다.


♣ 감정과 인격

- 생활의 다른 면에서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당신의 신앙생활에서 두드러진다. 만일 당신이 일상생활에서 감정으로 곤란을 겪는다면, 당신은 회심하고 성령 충만한 후라도 감정적으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당신의 신앙생활에서도 비슷한 곤란을 느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이 면에서 더 큰 곤란을 느끼고 있다.

-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 경험으로 그들의 인격, 성향, 기질을 모두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깨진 환상으로 고통을 겪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근본적인 인격구조는 바꾸시지 않는다. 그분은 바로 당신 그대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 당신이 진정한 자신을 깨닫고 기뻐하시는 것이 빠를수록 더 좋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당신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인 당신이다.

-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모두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달란트와 은사가 각각 다르므로 문제 또한 저마다 다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질이나 성벽(disposition)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행동은 자신에 대해 좋은 자아관을 갖고, 자신의 인격의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이 타인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 우리 감정은 우리 성격 중에 가장 다양하고 신뢰하지 못할 부분이다. 우리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우리 의 의지로 요구할 수 없다. 감정은 얼마는 우리가 알고 또 그 얼마는 알 수 없는 여러 요소에 달려 있다.

- 이런 감정들이 우리를 조절하도록 둔다는 것은 매우 어린아이 같은 일이며 무엇보다 그것을 우리의 영적 건강을 재는 체온계로 삼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경험이라든가 감정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분노를 조절하게 한다는 것은 첫걸음이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교하고 “만일 그랬더라면”이라고 말하기를 시작하며 우리 아닌 다른 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감정과 확신

-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 확신의 근거를 감정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구원에 대한 감정문제만큼 사람들이 목사에게 더 많이 가져오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감정이란 지극히 가변적이고 신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의존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 영과 더불어 성령이 증거함에 있어 감정이나 느낌이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정말 그것들은 거기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이 절대 그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구원에서 첫 번째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 불행하고 불안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 이 하나님의 순서를 다윗은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편 8절). 당신은 이것을 “알아 맞보라(see and taste)"라고 뒤집을 수 없다. 맛보기 전에 경험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진리가 먼저 왔으며 그 약속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해 입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보인 그 진리가 바른 느낌으로 전달되기 전에 우리는 영접하고 행하며 복종해야 하며 믿어야 한다.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진리를 확고히 붙잡으라는 것이며 감정을 이루어 내는 바른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순서이다. 사실, 맛보아 알라고 하는 것은 믿음, 신앙, 영접, 수용, 그리고 그 후에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고 느끼라는 뜻이다.

- 패배하고 우울에 빠지고 불안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늘 자기 자신에게 “기분 어때?”라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를 당신 감정 위에 세우는 것은 영적 유아기의 증표가 된다. 성숙에의 확실한 길은 무드와 감정을 지배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감정에 사로잡히기 전에 진리를 구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 감정 우선주의의 사람에게는 특히 더 특별하게 훈련이 요구될 것이다.

- 당신이란 단지 당신의 느낌만이 아니다. 어느 때건 간에 당신은 당신의 모든 사상과 감정의 총합보다도 더 큰 존재이다. 당신의 자아는 당신이 가진 어떠한 감정도 초월하며 그 위에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걸음의 하나는 당신 자신에 대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에 다다르는 것이다.

- 당신 삶을 자신이 살아가리라고 결심하는 것은 대단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그런 결정을 내려 보지 못한 아직 요람의 아이일 수도 있다.

-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느낌만을 얘기하는 이가 아니라 느껴야만 한다고 알고 있는 것까지 기도하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E. 스탠리 존스는 때로는 당신이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을 느껴야 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방식의 느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기본적인 행동이다. 때에 맞게 행하여진 믿음의 행위는 바른 감정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순서이다. 이것을 뒤집으려 애쓴다면 당신은 어린 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또 늘 불안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 감정과 인도하심

- 많은 사람들이 인도하심의 기본을 감정에 의지하고 있다. 신앙생활의 가장 위대한 약속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장 14절)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적인 느낌이나 내적 감정으로 인도하신다는 오해를 갖고 있다.

- 감정이나 내적 음성을 기다리는 중심 없는 기도는 생활에서 가장 작은 결정에서부터 지극히 중대한 결정을 좌우하게 된다. 문제는 하나님이 실제로 감정이나 깊은 인상이나 주관적인 내적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경험을 나도 갖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주된 근거를 감정이나 인상으로 삼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더 통례적인 방법과 조화되거나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 감정과 인상은 세 가지 근원에서 온다. 하나님에게서, 마귀에게서, 그리고 우리 인격 성향, 기질과 성질, 감정적인 피로나 상처, 우리 삶의 상처 난 감정과 같은 내적 활동에서부터 온다. 이 세 번째 근원은 성령과 사탄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를 경고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장 1절).

- 사도 요한의 경고는 모든 주관적인 신앙 경험은 검사되어지고 판단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행하셨다.”라든가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다.”라고 감히 말하기 전에 영을 시험해보는 것은 당신의 도덕적, 영적 책임이다.

- 인도하심에 대한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하겠다. 생활 속의 모든 결정에서 꼭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의 삶의 인도로 이사야 30장 21절을 인용한다. “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그러나 나머지 절까지 인용하지 않음으로 잘못 인용하게 되며 원래의 의미조차 모르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절은 이렇다. “네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하여 트랙을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야 목소리가 “이것이 길이다. 이리로 걸어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바른 길을 가는 동안  만큼은, 주님께 복종하여 가고 있는 동안엔 그 목소리가 필요 없기 때문에 어떤 인도하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령님이 당신 안에 계시며, 당신 삶을 주님께 의탁했으며 그분께 당신을 관리하시도록 맡겼다면, 그냥 그대로 살라. 기쁨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라. 당신은 자동조종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행동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라. 매일의 단순한 삶에서 멈춰 서서 어떤 느낌이나 인상을 구한다는 것은 당신 안에 내주 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던지는 불신임 표인 것이다.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며 당신과 주위의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특별한 말씀을 필요로 하며, 이런 경우의 인도하심이란 일관성 있게 누적되는 검임을 기억하라. 인도하심은 이렇게 전해진다.


● 하나님의 말씀,

● 외적인 환경(열리고 닫힌 창문),

● 당신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사고,

● 다른 그리스도인의 충고,

● 당신 감정의 내적 음성


- 느낌만으로는 크리스천 비행을 할 수 없다. 계기 즉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본, 성숙한 그리스도인 친구의 충고, 당신 최고의 생각, 외적 환경의 변화, 그리고 당신 느낌에만 눈길을 집중시켜라. 가능한 대로 이것들을 모두 조화시켜라. 인도하심의 근거로서의 느낌과 인상에 대한 유치한 의존을 벗어버려라.


♣ 감정과 선행

- 어떤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동기로서 감정에 의지한다. 존 웨슬레는 ‘선을 행하기 전 좋은 느낌을 기다리는 죄’를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라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말하고 있는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장 17절). 그는 ‘행할 줄 알고 느끼는’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어린아이 같이 “하고 싶은 느낌이 있어서 했어”라든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안했어”라고 하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 동기 유발의 근거로 감정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는 절박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들으며 가난하고 헐벗으며 옥에 갇힌 예수 그리스도를 늘 보기 때문에, 우리에겐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선행을 촉구하는 어떤 특별한 느낌이 필요치 않다.

- 앉아서 자신들의 영적 체온을 재고 감정의 맥박을 재면서, 하나님 섬김의 봇물을 터뜨려 줄 어떤 선한 느낌이 올 것이라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하는 불행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리스도인 들이 많이 있다.

- 선행을 하기에 앞서 좋은 느낌을 기다린다는 것은 죄다. 당신은 지금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선행과 봉사의 어떤 것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출처 : 회복중에 있는 사람들
글쓴이 : 白松(이철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