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내적 아이 (9) - 기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기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 거짓되고 미성숙한 기도의 개념은 성숙하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가장 파괴적인 요소가 된다. 또한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다.
- 서머셑 모옴(Somerset Maugham)의 최고작 중 하나인 「인간의 굴레(Human Bondage)」는 필립이란 한 소년의 얘기이다. 기형의 발을 갖고 태어났으므로 필립은 다리를 절었고 불구에 대한 자의식이 대단히 강했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들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잠들기 전에 그의 비틀어진 발을 보면서 이튿날 아침에 반듯하게 해주실 것을 기도했다. 그리곤 그는 내일 아침이면 그의 발이 정상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완전한 기대를 갖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잠에서 깬 그가 침대 커버를 제쳐보았지만 그의 발은 그대로 일그러지고 추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상처 받고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의 신앙 상실의 시작이었다.
- 이런 얘기는 성숙해가는 삶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음으로 믿음이 흔들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라며 북돋움으로 해서 몇 배나 더 아픈 쓰라림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응답하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 쓰라린 이혼 경험을 가진 젊은 코니가 그랬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얘기했다. 그녀는 매일 드리는 기도와 자신의 기부와 교회에 헌신한 자신의 삶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직장에서조차 믿음의 증거자로 인정받는 신앙인이었다.
- 그녀는 얘기하면서도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녀의 남편은 외도를 하며 지내다 가정을 떠나버렸다. 그녀는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혼녀가 되어 홀로 외롭게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곤란한 것은 그녀가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며, 완전히 혼란스러워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녀가 무너져 내리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셨다. 실제로 교회의 모든 사람이 그녀의 결혼을 위해 기도했다. 출석 교회의 담임목사를 포함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기도로 하나님께서 남편을 돌아오게 할 것이다. 다시 결혼생활이 유지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분노는 하나님께로 만이 아니라 교회와 그녀의 기독교 친구들에게까지 퍼졌다. 그녀는 큰 상처를 입었으며 산산이 부서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울면서 이 모든 애기를 들려주었다.
- 이와 같은 애기를 수백 번이라도 할 수 있다. 모습들은 다르고 이름이나 내용은 변할 수 있겠으나 기본적인 줄거리는 거의 완전할 정도로 같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환멸감을 느끼고 때로는 반항적이고 분노에 찬 상처 입은 사람들, 그들은 항상 부서지는 듯한 신앙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그들의 어린아이 같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기도에 대한 개념의 모래 토대 위에, 자신들의 성인의 삶의 한 부분을 세우려 했다가 그 집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견고하게 짓지 않은 건축자들과 같은 것이다.
- 독일 속담 중에 “거짓말은 다리가 짧다.”라는 말이 있다. 진실이 아니거나 반쪽 진실은 결코 멀리 가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을 얼마만큼은 끌고 갈 수 있으나 멀리는 못 간다. 이 모든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며 우리의 미성숙하고 부적당한 기도의 개념을 찾아보자. 그리고 이것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기 전에 제거해버리자.
♣ 하나님의 불가능성
- 우리 교회 새신자 훈련공부에서 아이들에게 내가 가장 잘 사용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겠습니까?” 거의 항상 모든 손이 오르고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죠. 그분은 하나님이시잖아요.” 계속 캐물어 본다. “확실하죠? 정말 확실한 거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잠시 시간이 흐르면 대개 한 아이 정도가 내 질문에 감을 잡는다. 그는 매우 망설이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글쎄요. 아마 그분은 악하거나 죄된 것은 어떤 것도 하실 수 없겠죠.” 그러면 항상 우리는 흥미로운 토론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은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준다.
- 우리가 늘 듣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구절의 다른 면, 즉 어떤 것은 하나님께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회교도의 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이슬람에선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분의 능력은 절대적이고 임의적이기에 무제한이란 얘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쪽에 서서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 자신의 도덕적 성품과 그분이 창조하신 도덕적 존재를 포함한, 그분의 세계에 심어놓으신 어떤 자기 제한의 한계로 인해 제한된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그분이 하실 수 없는 것과 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역하지 못 하신다
- 무엇보다 가장 명료하고 기독교 신론의 주춧돌인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죄를 지으실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도덕적 성품에 반대되는 어떤 악한 것도 하실 수 없다. 히브리서 6장18절과 디도서 1장2절은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고백을 반복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잘못된 것까지라도 하실 수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제한이지만 그분의 거룩한 사랑의 완전한 성품에 의해 도덕적인 조건이 붙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하신 존재됨에 부합되는 어떤 것이라도 하실 수 있지만, 자신의 성품은 거역하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되지 않은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하실 수 있다!
-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잠시라도 쉬실 수 없다. 그분의 성격 외에 다른 행동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말 하거나 죄를 범하거나 악한 것을 꾀하실 수 없다. 야고보는 이것을 다른 면에서 얘기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장13-17절). 요한은 같은 원칙을 애기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장5하-6절). 이 말은 하나님은 순전한 빛이시며 그분에게는 아무 어두움도 없으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은 죄와 결탁함은 물론 그분의 거룩하신 사랑의 도덕적 성품을 거역하게 되는 것이라면 보아 넘길 수도 없음을 뜻한다.
-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관점은 변할 수 없음도 뜻한다. 만일 누군가가 변화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그분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는 무모한 노력에 힘을 쏟는다. 이것이 우리 평생의 전투가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수준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교제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같은 기대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수준으로 맞춘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반대되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도, 죄를 범하실 수도, 그분의 신성 밖의 그 어떤 것을 하실 수도 없다. 그리고 그분의 순전하고 완전한 도덕적 성품에 거역되는 그 어떤 것도 하실 수 없다.
♣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침해하실 수 없다
- 이것이 기도에 대한 합당한 견지에서 생각해야 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 번째 범주이다. 이러한 활동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의 성질에 영향을 준다. 어떤 이들은 오직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만이 인간인 우리가 사는 곳이며 우리만이 유일한 도덕적인 피조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신 우리와 이 세계와 그 법은 창조 이후 실제적으로 우리에게만 적용되어 왔던 것이다.
- “하나님은 갖가지로 창조하실 수 있으셨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론적이다. 세계는 이대로 세계이고 우리도 이대로 우리이다. 우리와 하나님이 이 세계의 타락한 공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뤄보건대 하나님은 이러한 세계를 창조하심으로 그분에게 불가능하도록 한 어떤 것들, 즉 그분 자신에 대한 제한을 만드신 것이다. 첫 번째에서 생각해봤던 대로 하나님은 이것에 대립되는 그 어떤 것도 하실 수 없다.
- 복잡하게 들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어린아이였을 때의 의문들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그분이 움직일 수 없는 큰 바위를 만드실 수 있을까?” 또는 옛날 흔한 다른 형태로의 똑같은 질문,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것으로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부딪친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의 문제는 당신이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당신은 네모이면서 동시에 둥근 것을, 직삼각형이면서 정삼각형인 디자인을, 백색이면서도 검은 것을 가질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특정한 법에 의해 움직여지도록 창조하셨다. 우리는 모든 법을 알지 못한다. 어떤 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 발견해냈고 또 어떤 것은 더 연구해야 한다. 이런 법들은 실제로 하나님 그분의 특징에서 비롯되며 이것은 그분 내적인 안정과 불변함의 표현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세계를 혼돈(chaos)이라 부르지 않고 우주(cosmos)라 부르는 것이다.
-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기도에서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믿음이 흔들리거나 심지어 잃을 수도 있을 만큼의 깊은 상처를 받게 될 필연적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기도에 대한 많은 환멸감은 하나님과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오해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아주 간절하게 아이를 갖기 원하면서도 가질 수 없는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의 기도로 아이를 갖게 되거나 양자라도 입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하늘에서부터 그들 무릎 위로 한 아이가 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떠한 일도 가능하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런 유의 논리에서 그 바보스러움과 거짓됨을 쉽게 보게 된다.
- 하나님은 자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초월하여 일하신다. 성경의 기적들은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유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아름다운 일관성, 즉 그런 기적에 관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 C. S. 루이스는 그의 책 「피고석에 앉으신 하나님(God in the Dock)」에서 이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마귀가 예수님께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요구하며 그분의 인기에 대한 지름길로 시험을 걸었을 때는 가지고 이 점을 집어내고 있다. 실제로 이는 마술사인 마귀가 제안한 악한 시험이었다.
- 하나님은 돌을 떡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기적은 일으키시지만 마술을 부리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하나님은 씨앗을 옥수수나 호밀로 바꾸셔서 우리로 빵을 만들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실 때에도 들에서 돌멩이를 취해서가 아니라 떡과 물고기로 더 많은 떡과 더 많은 물고기를 만드셨다. 바로 이것이 계절마다 농부가 매년 일함으로, 어부가 열심히 물고기를 낚음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나가는 그 일이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오랜 시간이 결려야 하지만 예수님은 시간과 자연의 주인이시므로 잠깐 동안 그 과정을 빨리 하신 것이다. 루이스는 모든 기적에서 이런 일관성과 법칙을 잡아내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에 대하여 모순되지 않으시며,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신 성스러운 규칙을 범하지도 않으신다.
♣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실 수 없다
- 이제 하나님의 법칙 중 세 번째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두 번째에서 도출되었으며 또한 이 세상 것들과 인간을 지으신 것처럼 자기 제어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가진 인류를 창조하셨다. 그분은 살갗으로 덮인 로봇이나 그가 완전히 조종할 수 있는 기계적인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러 면에서 그분을 닮은 또 그분의 닮은 영혼을 가진, 자기 인식이 있고 자기 결정이 있는 존재를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상황으로 인해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린 그분께 응답할 수 있을 만큼의 선택의 자유는 갖고 있다.
-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내고, 그분의 속죄 받은 자녀로서 가족이 되기를 바라시며 그분을 섬기고 사랑하도록 변화시키시지만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초월해서 일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를 구원하는 동시에 그분이 구원하고자 하는 것들을 파괴시키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 능력으로 우리를 구속하실 수 없으며 순전히 당신의 능력을 활용하심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 만약 전자라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자유로이 선택된 사랑, 즉 그분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선하도록 억지를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관심을 유발하고 우리를 부르고 구애하며,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무시하거나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묵살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에 반대하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때로 우리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회심같이 그렇게 단순히 굴복하도록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확실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에 찬 표출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몇 년 후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행 26장 19절)라고 얘기함으로써 초자연적인 능력의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했다면 거역할 수도 있었던 그의 의지가 있었음을 당신이 알기 바란다.
- 이 모든 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 결론되어진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며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는 단 하나의 길이었고 고난당하신 사랑의 길이었다. 그것은 살인적이고 반역에 찬 사울에 대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의 기초였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장 4-5절). 이것이 사울의 마음을 잡고 평생 예수님의 사랑의 종으로 살게 만든 그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시며, 쉼 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에 반해 강요하실 수 없고 우리의 도덕적 자유를 침해하실 수 없다.
♣ 성숙한 기도
- 이것이 성숙하고 성경적인 기도에 대한 기본적인 기초 작업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자세한 부분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이렇게 충분하게 이해된 기도 없이는 이것은 환상과 동화 위에 세워진 매우 유치한 문제로 남아 있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위험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당신 믿음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다.
- 수천의 영국 고아를 기도로써 먹이고 입혔었던 위대한 기도의 인간 성자 조지 뮬러는 이런 얘기를 썼다. “성경에서 빗나간 기도는 90%가 환상일 뿐이다.” 어린아이들이 그 나이 때 상상의 환상에서 산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그들이 성장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패하게 되면 고통을 당할 수도 있게 된다. ‘메리 포핀스’란 영화를 보고 한 소녀가 우산을 펴들고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다.
- 오즈 기네스는 그가 의심에 대하여 쓴 고전 「두 마음(In Two Mind)」에서,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의심의 엄청난 영향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악마의 창고는 완전한 진리로 가장하고 있는 반진실과 반 거짓의 세게이다.” 또한 그는 지적하기를 “그런 의심을 가진 사람을 처음부터 탓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의심에 대한 큰 요인이 부족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의 왜곡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런 의심은 필연적이며, 그 책임은 의심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자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 반 진실은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
- 인디아에서 근래에 있었던 슬픈 사고를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사명감이 투절했으며 성령 충만했고 훌륭하며 젊었던 어느 감리교 선교사가 맹장염을 앓게 되었다. 그는 곧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할 상태였지만 한 신비주의자인 친구가 그를 붙잡았다. 그가 수술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치유해주실 것을 믿고 치유예배를 드린다면, 비 기독교인들에게 말할 나위 없는 큰 믿음의 행위와 증거가 될 것이라며 그를 붙잡았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 잘못된 제안에 동의했다. 그의 맹장이 터지기는 시간문제였다. 결국 며칠 후 그는 사망했다. 약속된 미래를 얘기했던 그 훌륭한 선교사의 죽음을 인디아 전체가 애도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기도에 대한 미성숙한 반 진실이 가져올 수 있는 고통을 보게 된다.
-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기도로 치유하시느냐가 아니라 이 치유를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어 내시느냐 인 것이다.
-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대개의 방법은 인간 최고의 지식과 의학기술을 십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온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다(창 1장28절).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일을 하기까지 기다리시며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거의 모든 치유를 행하시고 계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도구를 젖혀두시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치유를 하실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 이것은 예외이지 규칙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 예외를 규칙화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비록 인간들이 인류의 큰 재앙과 병고 때문에 수세기 동안 기도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치료법을 개발하여 세상을 정복하기까지 기다리고 계신 듯하다. 그래서 마마를 제거하는 백신이 개발되었고, 당뇨병엔 인슐린이, 소아마비엔 소오크 백신, 그리고 수백만의 생명을 건진 항체들이 개발된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것들이 개발되기 전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자연의 법칙과 이차적 요인 안에서 일하시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신앙과 기도 그리고 자만
-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진정한 성숙이 없이는 우리는 자만(presumption)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이 추측이라는 단어의 동의어는 뻔뻔스러움이다. 기실 우리는 우리의 걸음을 과하게 떼어놓고는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도록 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최소한 열한 번 이 자만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2장10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약성경에 있다. 모든 면에서 자만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죄로 규정되어 있다. 구약의 여러 상황에서 그 형벌은 죽음이었다. 시편 기자는 지혜롭게 기도하기를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19편 13절)라고 했다.
- 예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사탄의 시험을 견디실 때에도 자만의 행동으로 아버지를 시험하거나 시도하는 것을 거절하셨다. 반진실과 성경의 잘못 인용에 기초를 둔 많은 미숙하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들이 참 믿음 대신에 위험하게도 이런 자만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이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생각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 캐더린 마살은 그녀의 책 「항상 하나님을 마나며(Meeting God at Every Turn)」에서 2년에 걸친 자신의 결핵 투병기에 대해 쓰고 있다. 그녀의 순례 행적과 ‘풋내기의 얕잡아 보인 자만’으로부터 ‘믿음과 참 신앙을 가장한 자만’ 사이의 그 차이점을 보기까지 어떻게 하나님이 그녀를 한걸음씩 인도해내셨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느리고 확실한 치유의 시작은 그녀가 이 기도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없었다. “주여, 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평생 나를 쓸모없는 것으로 두신다 해도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좋아지든지 나빠지든지 저는 저 자신을 당신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오직 당신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문제
- 응답되지 않은 기도에 대해서 잠깐이라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잠시 우리가 기술했던 성경적 원리가 대부분의 우리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겐 확실치 않게 혼동되는 것들이 수두룩하게 있다. 성경 안에서조차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많아서 이런 때에는 성경도 큰 도움이 되어주질 못할 듯 보이지만 같이 직면해보기로 하자.
-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기도했으나 거절당한 채 죽었다.
- 하박국은 성루 위에서 “오, 주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라고 부르짖었다.
- 시편기자는 그의 우울을 호소했다.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방해가 되는 그의 ‘육체의 가시’인 육체적 장애를 없애주기를 세 번 기도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그것의 최고가 되며 그가 최고로 만들어지기 위한 ‘족한 은혜’를 약속받았다.
- 레너드 그리피스는 만일 바울의 나머지 일대기가 20세기 현대어로 씌어졌다면 이렇게 씌어졌으리라고 말했다.
“그 일 이후 바울은 흥미를 잃었으며 교회에서 멀어져 갔다······. 그의 가시는 그대로였으며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뭔가 잘못된 듯싶어 기도에 대한 많은 책을 읽었다. 분명히 그는 기도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천막을 만들어 파는 일로 되돌아갔다. 그는 죽기 전까지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다. 매일매일 평온하고 편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종교로부터의 모든 의무를 벗어던진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는 않았다.”
- 이것은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고통이 될 때에는 우리 자신이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기도를 주제로 한 고전의 일부를 인용하여 응답되지 않은 우리 기도의 이유들을 살펴보자.
- 우리가 바른 것을 구하지 않은 이유에서이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고 있다. 로마서 8장26절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그리고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썼다. 우리는 자주 마치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것같이 구하나, 우리는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 최악의 것을 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 중 진정한 요구에 응답하시기 위해 우리가 기도에 구한 것으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
- 기독교 역사상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고전적 삽화는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이다. 그는 「참회록(Confessions)」에서 어머니 모니카가 자식이 이태리로 떠나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기를 밤새워 기도했음을 얘기하고 있다. 모니카는 자신의 아들이 더더욱 타락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의 영향을 벗어난다면, 특히 환락과 유락으로 가득한 이태리로 간다면 손 쓸 수 없을 만큼 변할까 봐 굉장히 우려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아들은 이태리로 떠나버렸다. 거기서 그는 위대한 설교자 암브로스를 만나 올바른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 그의 어머니가 그가 가 있지 않기를 바라던 바로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신비한 사실을 이해했던 어거스틴은 후에 감사의 기도를 적었다. “주님, 주님은 어머니의 소원을 들으셔서 그분이 구한 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소원대로 나를 만드셨나이다.”
- 우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어느 텔레비전 설교자가 기도를 자동판매기에 비유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동전 홈에 집어넣으면 구입한 물건이 나오는 곳으로 응답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도를 룸서비스로, 또 하나님을 영원한 급사, 하늘의 심부름꾼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의 대체물로 기도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모세와 기드온의 기도를 가로막고 실제로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얘기하신 적이 있다. “내게 그런 얘기는 하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얘기하라.” 기도의 때가 아니라 행동의 때였기 때문이리라.
-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그분의 일과 우리의 일을 확실히 구별해 놓으시는 때가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고난과 순종과 훈련으로 ‘배우게 된’ 것들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모든 것이 기도로 간단히 해결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우리는 환상과 마술의 땅에 사는 영적인 아이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 그리피스는 통렬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아이가 놀기 위해 숙제를 아버지에게 부탁했을 때, 아들의 숙제를 해줄 아버지가 있겠는가? 아들을 사랑하고 그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해주질 않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 아들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그것을 대신 해주지 않고, 그를 격려하며 돕고 그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우리의 능력(ability)이 아니라 우리의 쓰여짐(availability)을 얘기한다. 그러나 우리의 쓰여짐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을 하나님이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채널로서 사용하시도록 우리가 허락해야 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최고의 것은 힘들게 얻어지고 천천히 이룩되어지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유에서이다. 상담을 많이 하면 할수록 나는 시간에 대한 경의를 더욱 느끼게 된다. 크로노스(Χρονος)는 신약에서 시간의 의미로 사용된 어휘이다. 여기서 연대기(chronology)와 측정용 시계(chronometer)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용된 말은 카이로스(Καιρος)이다. 이것은 “때가 차매”(갈 4장4절) 등 예수님의 강림에 대한 어구와 같이 바른 시간, 정확한 때를 의미한다. 나는 누군가와 상담을 하면서 단지 그들의 카이로스가 아님을 발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가 빌려 준 책과 테이프 그리고 같이했던 순서 등은 전혀 효과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는 몇 년 후 그들은 내게 와서 이렇게 얘기를 한다. “이제야 당신의 말을 이해하겠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이요. 책들을 다시 읽어봤는데, 정말 뭔가가 느껴지더군요. 우리 다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되면 관계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되어가며 성장 또한 빠르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이유로 응답되지 않은 것이다.
- 요한복음 5장6절에는 놀라운 구절이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그 누우신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사람이 더없이 간절하여져서 자기의 변명을 포기하고 타인을 탓하는 것을 그치며 오직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였다. 그가 여기까지 이르는 데에는 38년을 질병으로 지내야 했다는 말인가?
- 나는 어렸을 때 천식이 있었다. 십대 때에 악화가 되었고 대학 초년생 일 때에는 봄 학기 시험을 포기해야 할 만큼 아주 안 좋았다. 나와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치유를 위해 꾸준히 기도했고, 그 언젠가는 기름을 부으며 안수를 받기까지 했지만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 몇 년 후 어느 이른 아침, 그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은 기도책의 한 문장을 통해 내게 나의 기억의 치유가 필요함을 보여주셨다. 이것엔 내가 전에 경험하지 못한 더 깊은 수준의 누군가에 대한 용서가 따랐다. 나는 내 마음의 감찰과 기도로 며칠을 보냈다. 절대 나는 나의 천식문제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만 성령님께 그러한 분노와 아픈 기억을 처리해주시기를 간구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천식을 앓아본 적이 없다! 천식 치유를 위해 많은 기도가 드려졌었지만, 그때까지 나의 깊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기도 응답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많은 부분에 대한 사실이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유로 하나님이 주실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많은 성인들이 기도엔 ‘예’와 ‘아니요’만이 기도의 응답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자주 다른 응답을 우리에게 주신다. - 기다려라.
- 어린아이의 특징 중 하나는 기다릴 줄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즉석에서의 만족을 바라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 아직 어린아이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을 상대로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히 6장12절)이다. 기네스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기다림은 보류도니 선고와 같은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일깨우기를, 우리는 가끔 이유를 모르나 그 이유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내와 오래 참음은 하나님과의 성숙한 관계의 표시이며, 그것은 하나님은 진정 신실하심을 믿는 우리의 신앙임을 나타낸다.
- 관계 - 이것을 적용시키기에 아주 좋은 곳이 그 부분이다. 과거 위대한 기도의 서술가들은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다면 응답되지 않는 기도 같은 것은 잇을 수 없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늘 두 가지 중 하나로 기도를 응답하신다. 환경을 변화시키시든가 그것을 극복할 만한 힘을 우리에게 공급하시든가, 아니면 청원에 응답하시든가 인간에 응답하시든가······.
-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미숙한 기도의 관점을 버리게 된다. 당신은 더 이상 선물에 관심을 쏟지 않게 되며 주시는 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