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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적 아이 (5) - 어른 됨을 가로막는 어린아이의 좌우명

davidtheking 2010. 1. 8. 16:59

<어른 됨을 가로막는 어린아이의 좌우명>


- 성인이 된 사람들이 복음의 놀라운 기쁜 소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토의 지도에 의해 살고 있다. 그들 중 몇은 성경의 진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의 삶은 설명한 진리와는 반대되는 모토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지만 살기는 미성숙한 좌우명이나 맹서에 의해 살고 있는 것이다.

- 어릴 때의 모토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참 아들과 딸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된다고 말했다(롬 8장9절, 14절). 성령님께서 당신의 삶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가, 아니면 당신 과거의 어린 마음이 인도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 둘의 혼합일지도 모른다. 이 둘은 너무 닮아 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당신을 죄책감이나 자기 정죄의 압박감에 끌어넣는 미성숙한 양심의 소리일 수 있다. 때로 이것은 회심이나 심지어 성령 충만으로도 변화되지 않는다.


♣ 조건 붙은 관계

- 비극적인 것은 이런 많은 일들이 가정 안에서조차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부모의 역할 안에서처럼 더 필요한 곳은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에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불완전하고 지극히 조건적이며 변덕이 심하고 흠으로 가득 차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려는 욕심이 과해서 조건부라는 것으로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때도 있다.

-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랑과 애정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수준에서 그들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 조금만 더 잘하게 되면 인정하고 사랑하리라 약속한다. 그러다가 사랑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희망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 현재 이룬 성취 정도는 낮추어지거나 묵살된다. 우리는 “사랑한다. 조금만 더 잘해다오”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번번이 “좀 더 잘하면 사랑해주지”라거나 “네가 좀 더 잘해야만 우린 너를 사랑하고 기뻐해주마”라고 들려지게 된다.

- 바로 이런 조건 붙은 관계와 행동 성향이 그가 성장하여 그의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루어냈어도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만족해 본적이 없으며 자신의 노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칭찬을 자랑스레 받아들이지 못했다.

- 슬프게도 이 모든 것이 그의 신앙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그의 내부에 있으면서 채찍을 들고 더더욱 빨리 맷돌을 돌리도록 재촉하는 파라오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하였다. 그러나 시도하고 노력하고 아무리 애써 보았지만 다 해내지는 못했다. 더 성숙한 삶에 관한 책을 읽어도, 부흥회 같은 것을 한 번 더 참석 해봐도, 더 깊은 헌신을 위해 제단을 한 번 더 찾아와 봐도 그의 신앙생활은 ‘좀 더 잘한다면’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영적인 좌절을 맛볼 때면 내부의 목소리는 “잘해봐, 아직 충분치가 못해”라며 꾸짖었다.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좋은 선물, 특히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아버지로 가르치셨다(마 7장11절, 눅 11장13절). 봅은 말하기를 그가 아무리 찾아도 없었으며, 구해도 받지 못하였고, 손마디에 피가 맺히도록 두드려도 자기 비하와 자기혐오의 메아리만 들렸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더 잘해봐’라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하나님이며 즐거움 아닌 억누름의 복음이 되었다.

- ‘더 잘해봐’라는 모토만큼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함을 훼방 놓는 것도 없다. 이 거룩함의 본질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에 대한 깊고 순수하고 성숙한 사랑이다. 이 더 잘하라는 모토의 시스템은 하나님, 이웃, 자신 이 셋에 대한 모든 사랑을 합선시켜 놓는다. 이것은 당신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25-32절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섬기되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던 맏아들처럼 하나님을 미워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올바른 자애심 없이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대신에 당신을 미워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 콤플렉스

- “그러나 이 일이 거듭나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실 때에 씻겨 우린 확실히 깨끗하게 되는 거죠?” 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는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과 ‘자라감’의 총체적인 과정을 성격 콤플렉스 측면에서 살펴보자.

- 콤플렉스의 의미는 ‘인격 전반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억눌려진 욕구와 기억의 묶음’이다. 유해한 아동기의 모토와 연관시켜볼 때, 콤플렉스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의 공격이라 하겠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로 식욕, 안락, 안정, 성욕, 가치 있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 소속감, 사랑받고 사랑하고자 함, 살아야 하는 목적 등 하나님이 주신 욕구들을 대면하게 된다.

- 또한 우리는 자라가면서 차차 이런 큰 욕구들에 맞는 의미들을 터득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감정적 메커니즘 또는 욕구의 성취와 극복의 방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행동, 즉 잠재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영혼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나이(아무도 그때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에 이르면, 우리는 욕구 성취의 추구와 삶 운영에 관한 기초적인 패턴을 갖게 된다. 이런 감정적 메커니즘이나 패턴은 건강하건 안하건 여건이 좋건 나쁘건 상관없이 생성되며 뒤섞일 수도 있다.

- 콤플렉스의 의미를 삶과 그에 따른 욕구에 적합하지 못한 방법이나 패턴으로부터 야기된 건전하지 못한 메커니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콤플렉스란 강한 감정적 공격력을 가진 건전하지 않은 메커니즘-욕구와 반응과 느낌과 생각-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서 어릴 때의 모토나 맹세가 형성화된다. 그것들은 과거의 병든 공격력을 담고 있는 캡슐 형태와도 같다. 이제 당신은 어째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이런 콤플렉스를 자동적으로 치유하지 못하고 병든 아동기의 모토를 조정하지 못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폴 투니어는 그의 명저 「개인의 확신(The Person Re Person Reborn)」에서 이에 대한 것을 비유로 확실히 얘기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혁명이라고 얘기했다. 새로운 왕자가 쿠데타로 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를 환호하는 군중들 가운데는 이제 권력을 잃은 옛 정부의 지지자들도 있었다. 처음 볼 때 그들은 가장 열심 있는 모습을 취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진실하게 바뀐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새 정권을 붕괴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을 수 있는 적군이다. 그들은 그 왕자가 승리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다시 머리를 들어 권력을 뒤집을 찬스가 오기 전까지는 그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 투니어는 얘기하기를 이것은 우리 마음속 깊이 묻혀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 가장(假裝)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숨어 있으면서 우리의 승리감을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아직 항복한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정체를 벗기기 전까지 그들은 우리의 승리감을 파괴시킬 것이다. 그들의 정체를 벗기는 과정은 매우 느리며, 때론 의학과 심리학 그리고 영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그는 말한다.

- 여기 삽화(揷話)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성화 작업과 꾸준한 치유가 필요한 감정이나 콤플렉스를 어떻게 가지게 되는 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몇 년 전 나는 위대한 신학자 다니엘 스틸이 이것과 거의 같은 삽화로 성화의 깊은 면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도 소위 ‘연약함’으로 인해 애태울 수 있음을 설명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책 「이정표에 대한 논고(Milestone Papers)」에서 그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곳엔 이 나라의 시민들 중 내가 질색하는 옛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관계를 끊어버렸다. 즉 무시, 안면 불식, 오해, 오류, 부주의, 실패 등 연약함이란 이름의 대가족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는 그들의 추방에 대해 자주 표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거주권을 주장하였다. 그들 얘기는 자신들과 꼭 닮았으면서도 도덕적으로 전혀 판이한 ‘죄’라 불리는 외국인과 혼돈되어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과 오랜 동안 평화롭게 살고는 있지만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진 못하고 있다.”


- 우선적으로 “좀 더 잘해”라는 모토에서의 병든 내적 공격으로 파생된 콤플렉스는 두 가지이다. 먼저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며 자기 비하로 채우는 열등 콤플렉스가 있다. 또 우리가 이룬 것보다 더 잘 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다고 느끼게 하며 자기 무시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완벽 콤플렉스이다. 대개 이 완벽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들을 ‘완벽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들의 업적엔 완벽만이 있어야 한다.

- 이 둘이 어째서 항상 샴의 쌍둥이처럼 연관되어 있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훨씬 더 잘하지 못함을 알 때는 만족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들을 꾸짖고 열등감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들의 값어치가 그들의 훌륭한 업적에 따라 좌우된다는 생각이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선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낮은 자존감과 빈약한 자기 가치의 확인 보증이 반드시 따르게 된다.


♣ 성숙을 향하여

- 「상한 감정의 치유(Healing for Damaged Emotions)」에서  낮은 자존감, 완벽주의, 우울의 치유에 관해 여러 장에 걸쳐 자세히 설명했다.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병든 공격의 심각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제적인 방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 우선 이것의 실체를 살펴보자. 이것은 하나님의 목소리도 아니고 양심의 목소리도 아니며(이 둘의 모두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신의 아동기와 십대로부터의 거짓임을 알자. 또한 이것이 바로 명백하고 단호하게 직면하여 뿌리 뽑아야 할 부분인 것이다! 당신이 건전한 최고에의 추구와 능력과 이성을 뛰어넘고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넘는 어떤 기준에 따른 비 건전한 수고의 차이를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기본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히 5장 13 - 6장1절). 다른 번역으로는 “저희들의 훈련된 능력으로 선과 악을 구별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훈련과 연습이 영적 어린아이 됨에서 떠나 성인으로 자라감에 기본임을 설명하고 있다.

- 이것을 혼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혀 기뻐할 수 없는’ 내적 아이가 당신을 불가능한 목표로 밀쳐내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실로 요구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줄 수 있는 당신이 신뢰하는 친구나 목사 또는 기독교 상담자가 필요하다. 때로는 그런 감정이 극심해 잘 훈련받은 상담자와 함께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무자비한 내부의 목소리와 시끌벅적한 아이를 어떻게든 ‘무능케 하리라.’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 성령님과 협력하여 “좀 더 잘해” 콤플렉스에 따라다니는 양극단의 감정 진폭을 좁히도록

노력하라. 나는 이 문제로 고통 받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상담하면서 그들이 ‘모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태도를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의 세계는 단지 완전한 흑색 아니면 완전한 백색 두 색으로만 되어 있다. 그들은 완벽함을 이루어 내거나 완전히 실패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감정적 극단 내지는 영적 극단으로 유지시키며, 자신들을 ‘영적인 요요’라고 일컫는다.

- 베드로의 변덕과 영적 높낮이를 여러 방면으로 도우셨듯이 그분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당신을 도와주고 계신다.


♣ 로저와 바브의 경우

- 정기적인 가정예배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게 되었다.

- 그들은 “좀 더 잘해”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완고한 기독교 가정 출신이었고, 그녀는 비신자 가정 출신이었지만 기본적 환경은 거의 같았다.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우수한 업적을 나타내면 그들은 인정이라는 대가를 받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거나 아주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게 되면 그들 부모는 그들을 걱정과 실망으로 대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겠니? 아마도 부모인 우리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겠니?” 이런 것은 평범한 것이었다. 그들 부모의 안정과 자존감이 그들의 성공적인 업적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므로 “좀 더 잘해”의 의미는 “네가 실패하면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라는 것으로 그들 성격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들이 결혼 첫해, 그 어렵고 많은 적응을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바로 맞았다. 그것이었다.

- 그 후 그들은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의 고통과 요구에 대해 깊이 나눌 수 있었다. 특별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로저와 바브가 어린아이 같은 행위를 버리도록 해주었고, 하나님 외엔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함을 서로에게서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몇 개월 동안에 나타난 그들의 비약적인 성장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 그들은 그들 가정의 몇 대에 걸쳐 나타난 악순환을 물리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그들은 나에게 얘기하기를, 그들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해할 ‘새로운 세대, 시작의 기쁨’이라고 했다.


출처 : 회복중에 있는 사람들
글쓴이 : 白松(이철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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