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내적 아이(3) -기억의 치유
<기억의 치유>
♣ 잠재의식
- 과거의 문제아가 확실히 나타나는 부분은 그 자신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곳, 즉 우리의 기억에서이다. 당장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끼겠지만 내 생각으론 그것은 좀 과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 무의식에 대한 과대 강조의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동책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전가가 목적이 아닌가 하다. 아직 그 의미에 끌린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무의식은 실체나 어떤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당신 인격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기술적 묘사인 것이다. 당신 마음의 잠재의식층을 뭐라 부르든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혹 기억해 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게 된다. 그것들은 당신의 기억의 창고에 쌓이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놀랍고도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인 동시에 위대함이기도 하다.
- 무엇보다도 더 멋진 사실은, 당신이 성령님께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한 잠재의식을 정결케 하며 기억의 창고를 채우도록 허락한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당신 인격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으로 만들 실제적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 잠재의식은 악과 비극도 만들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잠재의식은 고통도 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어릴 때의 고통스런 기억과 연관이 되어있다. 이런 기억을 우리 마음 밖으로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실제적으로 기억은 더 깊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데까지 묻혀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경험하고 표현 못한 감정이 상처받았을 땐 표현 될 길이 막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채로 묻혀 엄청남 완고함과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
- 우리가 그런 잊혀진 고통으로부터 자유하다 생각한다 해도 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즐거운 기억들이 마음에 채워지듯 그렇게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아픈 기억이 우리 의식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꼭꼭 잠그게 된다. 결국 그것들은 우리 마음의 문을 통해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변장을 하여 우리 인격의 다른 문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런 기억을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그 엄청난 노력은 우리 에너지의 상당량을 소모하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8시간의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도 아침에 일어나기를 밤에 침대에 들어갈 때만큼 피곤해 한다. 왜인가? 밤새도록 인격의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전투로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버렸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아픈 기억의 해결되지 않은 긴장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그의 인내와 에너지 고갈에 다다르면 감정 분열의 유력한 후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육체적 쇠약이나 질병의 충격으로 더 약해졌거나 이와 더불어 과거의 뼈아픈 사고와 연관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가 오랫동안 덮어두려했던 기억들은 살아나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 잠자고 있던 그 과거의 아이가 깨어나면 개인의 행동, 반응, 외모, 행위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감춰졌던 감정들은 다시 살아나 깊은 우울, 분노, 걷잡을 수 없는 정욕, 열등의식, 고독, 거절당한 느낌으로 표현되어 진다.
- 그런 고통스런 기억들은 회심의 경험이나 성령 충만으로는 자동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은혜 안에서의 성숙으로도 꼭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기억들은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에게 있어 실제 성숙이란 없다. 이것은 마치 한 인간의 어떤 부분이 냉동되어 있거나 타임머신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그의 몸이 자라고 정신은 성숙해가지만 특정 부분은 아직 얼어 있는 것이다. 인생의 유년기에 갇혀 그는 소년인 채, 그녀는 소녀인 채 남아있는 것이다.
- 불행히도 그런 기억들은 우리의 평범한 기도로는 미치지 못할 부분인 것 같다. 어떤 때는 기도가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듯이 보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신이 마치 모래수렁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과 같다. 내가 믿기로는 이런 상황에선 특별한 중보기도와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황되는 것은 그의 현재 생활에선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이 기독교 친구들은 “아직 죄된 생활을 하는군.” 또는 “회개해야 할 죄가 있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기 일쑤다.
- 반대일 수도 있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 같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가장 많은 노력을 하는 신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전심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노력한다. 그들의 친구들도 그에게 도움이 될 성구들이나 책자 그리고 수많은 충고를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들의 분노를 부채질할 뿐, 그들은 삶에 지치고 실망하게 된다.
- 절대 이런 사람들을 탓하지 말라. 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엔 아무 이상이 없다.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확실하며 그들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완전히 그분께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늘 그 안에 살아있으면서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계기가 없는 한 표출되지 않는 그 내적아이가 문제인 것이다.
♣ 치유의 기도
-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시키는 기도이다. 즉 그들의 아동기와 십대 때 일어나 그들의 성숙을 막고 있으며 성장의 한 단계를 묶어두고 있는 그런 경험들을 치유시키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모든 기억은 치유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린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기억조차 못하게 되나요? 아니면 기억이 지워지는 건가요?” 그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기억들의 감정들 -쓰라림, 아픔, 두려움, 증오, 상처, 정욕 -들이 사라지게 된다. 그것들을 버림으로 그것들의 위력이 있던 의미들이 상실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작동 중지되며, 더 이상 성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누군가 묻기를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립니까? 우선 그런 아동기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지나간 경험인데, 그 먼 과거의 아이에게 현재의 기도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대답한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장 29절)
-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수없이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장 8절). 침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요 1장15절)고 했다. 유대인들은 어느 날 예수님을 비웃으며 얘기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장57-58절).
- 나사렛 예수는 시간의 장벽을 뚫고 역사 속에 들어오시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시간으로 33년 동안 사셨다. 그러나 시간은 제한된 개념이다. 그것은 나와 당신이 순간마다 때마다 현실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그렇게 셋으로 나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신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 이다 …….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니…….”(시 90편 2, 4절).
- 우리 주님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처받은 우리의 내적 아이를 돌보실 수 있는 영원한현재이시다. 예수님께선 목마르도록 사랑받고자 원했지만 받아볼 수 없었던 아이를 사랑의 팔로 안으시고 위로하실 수 있다. 그분은 겉으로는 이해받은 것 같으나 그런 적이 없었던 아이를 이해하실 수 있다. 그분은 진실로 무조건적이고 수용해주는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 아이를 안심시키실 수 있다. 그분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꽉 차있는 아이를 용서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정죄감과 모멸감을 존귀함과 청결함으로 바꾸실 수 있다. 그렇다. 예수님께선 상처받고 아픈 기억을 가진 양을 당신의 팔에 안고서 치유해주시는 부드럽고 영원한 목자이시다.
- 치유가 필요한 아이는 이 넷 중 하나 꼴이다. 상처받은 아이, 미움 받은 아이,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아이, 그리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우리를 거의 최면적인 압박과 고통으로 붙잡고 억누르는 기억들은 거의 깊은 감정적 고통, 혐오, 증오 또는 수치심의 기억들이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의 복합이기도 하다.
- 증가 추세에 있는 갖가지 형태의 성적 학대들은 강간, 동성연애, 실연 또는 근친상간의 기억들과도 연관되어 있다. 또 평상시엔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어떤 때는 거의 기절할 만큼 충동적이고 강압적인 정욕을 경험한다. 그들 마음의 벽에 그려진 추한 그림들은 그들을 죄책감과 우울 그리고 자기 파멸로 몰고 가게 한다. 또는 그들이 배우자와 가져야 할 의미 있는 관계에서의 성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