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복음] 모세의 법이 새언약의 법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완성하기까지
서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모든 인류는 첫 인간의 조상인 아담에 의하여 죄를 가지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스스로 양심과 도덕,철학,윤리,법을 통해 죄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죄는 점점 인간의 모든 곳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창6: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죄악이 관영한 이땅에서 보잘것 없는 한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었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열국의 아비로 칭호를 얻어 믿음의조상이 되게하여 430년후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로 한나라인 이스라엘을 세우게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당시 아브라함의 삶역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는 납득하기는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을당시 씨족사회가 중심이 되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들의 가계를 보면 오늘날의 가족관계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은 이때까지 죄를 죄로여겨 법적으로 심판을 당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힘의 논리에 의하여 살아가던 시대였고 그 힘의 우두머리에 의해 각 부족이나 국가마다 부분적인 삶의 방식인 질서를 위해 지켜지는 나름대로의 방식과 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운데 셈의 후손인 노아의 십대손인 아브라함의 가계를 보면 우선 그의 아내 사라는 배다른 이복누이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자식을 위해 하갈을 취했으며 말년에 그두라라는 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롯은 어떻습니까?
음란한도시에 살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살아나온후 그는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뒤에 그의 두딸이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해서 근친상간을 가져 자식을 낳아 모압과 암몬이라는 두나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는 처음 라헬을 사랑하였지만 삼촌라반의 욕심에 의해 그 언니인 레아와 먼저 결혼시키고 7년뒤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라헬과 우여곡절끝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집안의 친두자매를 부인으로 거느리고 살다가 이 두자매의 끝없는 질투심으로 결국 자신의 여종까지 야곱에게 주어 4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살게 되어 열두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열두명의 아들들이 사실상 이스라엘열두지파를 이루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열두아들중에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역시 자기 며느리 다말과 관계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할만한 요셉은 어떠한가요?
믿음으로 30세에 애굽의 국무총리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지만 그의 아내는 애굽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삼아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세상 보편적 씨족사회문화가 자손이 귀하여 한나라를 이루기위해서는 자기의 형제가족이나 친족끼리 하는결혼제도임을 알고 있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가계도까지 이런 세상적 친족관계를 통해 자손을 번창시키는 것이 오늘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때는 얼른 받아들이기가 힘든 대목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런 가족제도에 마음을 두지않았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성적타락과 수치심으로 본다면 여기 이 아브라함의 가족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악함과 어리섞음과 연약함까지 모두 알고있기에 이러한 삶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여호와하나님을 찾는 아브라함을 눈여겨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만을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그들의 가족관계나 드러나지 않는 보통의 일상생활의 삶은 어떻게 살았을지 몰라도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헌법이나 나름대로 윤리와 도덕을 기준을 삼고 본다면 이들의 가족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의 삶도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다하여 어떤사람이 아브라함과 같은 방법으로 두명세명의 부인을 둔다면 성적음란이나 간음죄등 여러 죄를 물어서 정죄하고 말것입니다.
세상의 모든법은 이처럼 각 역사마다 인간의 뜻에 맞도록 항상 필요에 따라서 변모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민주주의 시대에 살면서 일부일처제가 헌법에 정해져 있기에 그외에 다른부인을 두게되면 간음죄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러한 삶이 좋다고 하여 열명의 아내를 둔다고 할지라도 현재 법이 허용치 않으면 그사람은 간음죄를 범한 죄인이 되고 마는것이며 우리가 아무리 한명의 아내외에 다른아내를 안둔다고 할지라도 이세상에 자기 열명의 가족들밖에 없으면 친족결혼이나 근친관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수 밖에 없습니다.
본론
율 법
오늘날 각나라마다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각나라마다 시행하는 법은 제각기 다 다릅니다.
내가 어느나라에 있는가 따라 자신은 자기가 사는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그 의무를 지키지 아니하고 법을 어기게 되면 그 사람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한국에 사는 사람인데 미국의 법을 지킬의무가 없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법을 지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사람이 한국법을 지킬의무는 없는것입니다.
법은 이처럼 모든인간을 사회생활에 있어서 질서를 지키고 정상적인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지만 어길때에는 가차없는 죄값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국가가 정한 그 법아래 매인 구속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나라의 시민이면 그 나라가 정한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가 부르면 군대에 달려가야 되고 의무교육을 받으라면 초중고의무교육을 마쳐야 하고 세금을 내라고 하면 내야합니다.
이를 어길시에는 죄값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세상법은 그것이 영원한것이 아니라 항상 유동적이고 자주 변한다는 것입니다.
가족계획법이 달라지기도 하고 교육법이 달라지기도 하고 어떤법은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법은 새로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세상 모든 법은 정확한 기준점이 없이 사람의 필요에 따라 다수결이나 공감대에 따라 항상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필요에 따라 대처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법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하여 애굽을 벗어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선민백성으로 지켜야 할 율례와 규례를 세우고자 하는데 이율법을 잘지킬수 있을것인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너무 많은 문제들로 인해 소동이 있었고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의 억울한 문제에 해결해주느라 질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를 세우기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시는 율례와 규례가 필요한것을 알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항상 올바르게 이끄신다는것을 알고 있기에 율례와 규례를 주시면 우리가 이를 다 지켜 행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십계명을 주어 특별히 돌판에 기록하게 하셨고 세부적인 율례와 규례를 주어 613가지의 율법조항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처음 이계명과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같이 감격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지나온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선포되어진 말씀을 통해 죄인줄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을 보면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온전히 지키며 살려고 결심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선포한지 얼마되지도 않아 백성들은 점점 말씀과는 다르게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광야에서 당장에 먹고사는일이 힘들어지자 조그만일에도 시비가 붙고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마실물이 없어 불평하였습니다.
만나를 내려주니 고기먹어본지가 오래됐다고 항의 합니다.
이전의 습관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가족간에 성행위가 다시 성행하였습니다.
함께 공동체생활을 하다보니 다시금 비정상적인 성문란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의 불안이 가중되다보니 다른나라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성행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이런일로 인해 누가 누구를 정죄하는 일이 없었고 다만 자신의 마음가짐만 바르게 할뿐이었는데 어느누군가가 율법을 어기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정죄하며 화풀이 하듯 돌로 쳐서 죽여버립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었지만 하라와 하지말라라는 이 조항속에 매여서 여기에 누구라도 법을 어기거나 죄를 짓게되면 긍휼함이나 사랑이 없이 가차없이 죄값을 물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심판만이 있을뿐이었습니다.
이전에 조상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명의 부인을 거느리고있어도 롯처럼 성적문란한 도시에 살아도 유다처럼 근친상간의 죄를 범해도 야곱의 아들들이 여동생을 범했다는 이유로 한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살인을 저질러도 마음의 양심의 판단에따라 이일이 옳지않으면 하지않거나 원하면 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율법이 정확하게 그 기준을 제시하니 모든 사람들이 613가지의 조항가운데 여러 수십가지가 죄에 걸려 넘어져 항상 성막안 제단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짐승의 피가 강같이 흘렀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양심으로만 판단했던 옳고 그름이 모세이후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마라라고 정확하게 제시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 율법에 매여서 이건 해야되 아니면 말아야되?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되? 하며 율법에 끌려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아담의 범죄로 죄를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세계가 제각각 다르다 보니 자신들의 원함과 자신들의 계획과 이루고자 하는 욕심이 항상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과 어긋나서 해야할 말씀은 불순종해버리고 하지말아야 할 죄악들은 남몰래 저질러 마음의 죄를 안은 고통속에 살아가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는 모두가 동참하여 한공동체를 이루었지만 막상 택한 선민백성으로서 지키고 살아야 할 율법이 주어지자 자신들의 일상적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죄로인한 육신의 소욕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누르고 늘 범죄하며 죄악된 삶을 살았습니다.
속죄제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대로 처리하자면 모두다 죽음을 당할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속죄의 제사법를 만드셔서 죄를 범한자는 속죄제의 규례대로 자기의 죄를 대신할 흠없는 어린양이나 염소를 통해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는 넘기는 안수를 한뒤에 피흘려 죽이면 죄가 사함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처 속죄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1년중 7월10일에 대제사장이(아론) 모든 백성을 위한 대 속죄제를 드리게 되는데 그때 모든 백성들은 일년동안 미처 속죄하지 못한 죄를 모두 사함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속죄제는 말그대로 죄는 사람이 지었으나 자신의 죄값을 흠없는 수송아지에게 안수하여 넘겨서 칼로 피를 내어 죽게한뒤에 그피를 번제단과 성소앞에 뿌리고 모든 내장의 기름은 번제단위의 불로 태우고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다리와 내장은 진바깥재버리는곳인 정결한 곳에 가져가 불로 나무외에 살랐습니다.(레4장)
한편 대속죄제는 먼저 대제사장이 수송아지로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로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두 염소를 취하여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로 드리고 하나는 아세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대제사장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려 속죄하고 피를 취하여 동편에 뿌리고 속죄소앞에 일곱번 뿌려 자기와 자기 권속을 위하여속죄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는 속죄제로 드린 한 염소의피를 취하여 속죄소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
이로인해 이스라백성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사함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사셀염소 (뜻:1.속죄염소,보내버리는 염소, 2. 제거하다라는 뜻을 가짐, 3. 황량한 지역 협곡을 의미함, 4. 죄가 사망의 장소로 보내어진뜻을 가지고 있다.)로 정하여진 염소는 제사장이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두어 광야로 보내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신후 세상죄를 지고가는 (아사셀) 어린양이 되셔서 광야로가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3년뒤에 온세상죄를 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가지셨다.)
이로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죄의 고통으로 부터 풀려나온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죄를 지을때 마다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죄를 고하고 흠없는 수송아지나 염소나 양을 속죄제로 드려 자신의 죄를 사함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속죄의 생활및 여러 제사로 드려지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이제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그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이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은 죄를 지을때마다 속죄받기 위하여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를 속죄제물로 형식적으로 드리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그들로 인해 오는 종교세등 수입이 엄청나씨에 진정으로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재산과 부를 축척하여 막강한 권세까지 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타락한 신앙을 통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시대시대마다 참된 선지자가 나타나 거짓된신앙을 버리고 여호와의 길로 돌아오라 외쳤지만 오히여 하나님의 참된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를 거짓이라 하여 핍박하였습니다.
또한 타락한 제사장들과 거짓 종교지도자들의 편에선 거짓 선지자들이 마음의 평강을 주장하여 달콤한 말로 백성들의 마음을 죄로 무감각하게 만들어 이스라엘은 형편없이 죄악으로 신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고 선민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새 삶으로서 사는 기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 율법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아래 머물고 마는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결론은 하나입니다.
잘아시는 대로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위해 지켜져야할 율례와 규레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율법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기위한 사랑을 이루는 언약이 아닙니다.
율법은 모르고 행했던 알고 행했던 이전의 모든 육신적 행위의 모습을 죄로 정하여 더욱 죄됨을 알게하고 인간의 육에서 올라오는 소욕을 율법으로서도 감당치 못해 오히려 죄의 종노릇 하는 자가 되어 율법은 그 기준으로 하여금 죄를 더욱 죄되게 만드는 몽학선생 노릇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인간이 듣고 온전히 지켜질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꺽어도 육신아래서 난 모든 사람들은 육의 소욕에 따라 율법을 범할수 밖에 없다면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폐기처분 하시든지 아니면 이 율법을 다른 방법으로 완성시켜 이룰수 있는 또다른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뜻이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뜻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처음부터 우리가 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순종하는 백성들의 습을 보기위해서 이 율법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느누구라도 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수 없는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613가지의 수많은 조항중에 이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범한것으로 여겨 죄를 지은것으로 우리를 고발하기때문에 아담의 지은 범죄가 그 이후 출생한 모든 자들에게도 그 피를 이어받아 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인간의 노력과 정성으로서는 이 수많은 율법을 온전히 잘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지킬수 없는 율법을 주셔서 우리에게 주셔서 지키라고 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노력해서 이 율법을 잘지키고자 하는 정성을 보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앞에 자신이 어느것 하나 온전히 지켜 행할수 없는 연약하고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앞에 설때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절대로 하나님의 이 거룩한 말씀을 단 한가지라도 지켜 행할수 없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보게되니 지금까지 저는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율법은 그 누구도 지킬수 없고 행할수도 없기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자신이 얼마나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악한것인가를 보게해주고 알게해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율법을 지키라고 하신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이어받은 우리들이기에 너희들의 그 육신에 속한 모습으로는 아무리 수많은 자기 노력과 수고로도 이룰수 없는 무력한 자임을 알려주기 위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인간중심의 옳은 생각)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하지말라 라고 하신것은 아담과하와의 죄를 이어받은 타락한 우리들이기에 육신의 소욕에 따라 기어코 자기 욕심에따라 하고야 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선악의 열매를 먹지않았다 할지라도 하와가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육신의 소욕에 이끌렸습니다.
이미 이끌린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불신하게 되어졌을때 하나님에 말씀에 의해 이끌려서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행하여 영광과 기쁨이 되어 이루고자 하는 완벽한 죄가 없는 자기 의지가 사단이 심어논 인간중심의 생각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하고는 정반대로 자기의지의 육신의 소욕에따라 이루고자 하는 원함이 이미 돌이킬수 없는 마음의 죄가 되어 그것이 선악을 아는 열매에 손을 대어 따먹은 범죄행위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15)
사단의 이 말을 하와가 그 나무를 보게되었을때 그때부터 그 선악을 아는 열매가 먹음직 스럽고 보기에도 좋고 정말 지혜를 얻을만큼 탐스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와가 이미 그 마음에 사단의 말을 받아드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와가 마음에 받아들였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말을 더 자기의 기준에 옳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범죄적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된다는 이말은 피조물인 여자에게는 엄청난 유혹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보좌를 탐내다가 쫓겨난것과 너무도 유사한 내용입니다.
결국 이사실은 사단이 저지른 그 행위가 그대로 인간에게도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다는것.....그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 라고 말씀하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앞에 광명한 천사가 자신도 그와같이 되고자 하다가 사단이 되어버렸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다스릴려고 하다가 죄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선악을 아는 열매에 입을대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단의 유혹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육신의 소욕을 이룰수 있도록 부채질하는 이 유혹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마음에 두게 되면 이미 그 사람마음에는 죄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기회가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육신의 원함을 욕심으로 채우게 되어 범죄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사단에 의해 넘어진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다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사람 아담에게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것 처럼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의만을 지니고 있어야만 행할수 있는 이 율법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라와 하지말라라는 계명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선악을 보여주시면서 인간으로서는 지킬수도 없고 이룰수도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 주시면서 하나님중심의 선과악을 지켜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전적 부패되어 있는 자란것을 안다면 즉각 여호와 하나님 우리는 이계명을 지킬수 없습니다.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당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생활을 할 뿐입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말하기를 이것을 우리가 다 지켜 행하겠나이다 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아담에게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지말라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죽으리라 라고 할때 아담이 순종하고 지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과 선악을 아는 열매 사이에서 이땅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하와를 통해서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 사단이 심어논 인간육신의 자기 중심적 의로하여금 613가지의 선악의 기준이 얼마 못되어 육신의 소욕에 따라 불순종하며 죄를 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택한백성으로서 얼마든지 잘 지켜질수 있는 줄 알았지만 그들의 육신은 하라는 계명에는 끊임없이 핑계를 대며 불순종했고 하지말라라는 계명에는 하고자 하는 육신의 욕구가 흘러나와 기어코 범죄를 저지르게 되어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되어 그들은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실때 까지 벗겨지지 않는 마음의 죄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가장 더럽고 추악하고 악한것이 죄로물든 인간의 마음임을 보셨습니다.(사59:1-2, 렘17:9)
새 언 약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닌 마음의 돌이킴을 가질수 있도록 선지자들을 통하여 새언약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렘31:31-34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마음에)두며 그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노력과 정성과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려고 애를 썼지만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의 행위로 정성을 쏟고 노력하고 지켜서 율법의 모든기준대로 산다는 것은 실패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행위는 보지않으시고 속중심 즉 마음으로만이(영으로)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수 있는 새언약의 법을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나아가는 모든것은 무익한 것이라 버려져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고 나는 어떠한 육신의 행위로도 그것이 비록 세상을 구하는 선이라 할지라도 육신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치 아니하신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째로 이렇게 하기까지는 철저하게 난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하며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발견하여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자란것을 느껴 마음의 무너짐을 우선 가져야 합니다.
내가 행한것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옳은일이든 그른일이든 모두 죄악된 행위였으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범한 죄악만을 회개하는것이 회개가 아니라 아무리 옳은일을 하고 선한일을 했다하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돌이켜야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네째로 이러한 죄악된 자신임을 알아 세상과 결별하여 주님께로 돌아서서 내 죄악을 씻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함을 얻기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이제부터 수고와 노력과 정성과 공로를 드려서 받는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은 그 무엇이든 어떤것이든 무익하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이 나와 온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이러한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다 갚으시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사람 각자 개개인은 이것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기만하면 비록 자신은 (나는) 은혜의 구원을 받기위해 아무것도 한것이 없으나 그분이 나를 위해 죄씻음과 중생즉 거듭남의 은혜를 이루셨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은혜로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구원받았다라고 외칠수가 있게 되는것입니다.
구원은 단지 내가 죄악에서 벗어나 영원한 지옥의 죽음을 당하지 않고 천국에 올라간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구원은 이렇게 죄로 죽을수 밖에 없는 자신을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죄사함받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앞에 나아가게 하여도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게끔 예수님이 먼저 부활하시어 그 부활의 의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의롭고 거룩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되어 자녀로서 기쁨으로 만날수 있게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인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 이말씀이 선포되어 졌을때 처음엔 이런말씀을 하는 모든 참된선지자들을(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가두고 핍박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었지만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자는 오실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비록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는 율법을 지켜 행하며 그 가운데 살아갈수 밖에 없었으나 마음이 꺾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죄와 고통을 풀어줄 오실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드문현상이지만 다윗왕이나 참된 여러선지자들은(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감동으로 환상이나 기도가운데 보게되어 시23편이나 이사야 53장이나 렘31장과 같은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분명히 증거하는 말씀이 선포되어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선지자들에게 오시리라 약속한 대로 이천년전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약속대로 육신의 옷을 입히시고 독생자하나님을 성령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이땅의 죄악을 멸하시고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왕으로 오셨고 선지자로 오셨고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그리스도의 3중직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를 안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 모두 사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어린양 속죄제물이 되시려고 내려오셨던 것입니다.(요1:28)
거룩한 하나님이 더러운 육신의 옷을 입고 인간이 되셔서 이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인간과 같은 똑같은 삶을 사셨으나 예수님은 육적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난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능력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없으셨고 사단의 유혹은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것이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흠없는 짐승이 바쳐져야 하는것처럼 세상 모든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죄없고 흠없는 예수님이 되셔야만 되었기에 예수님은 이땅에 오실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셔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고한대로 모든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육신의 고난가운데 진행되어졌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30세가 되었을때 대속죄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모든 죄를 넘겨 받기 위하여 이세상죄를 담당하기 위한 세례안수식을 이땅의 마지막 제사장인 세례요한에 의해 거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무런 죄가 없으셨기때문에 죄사함을 받는 세례를 받아야할 할 아무런 필요도 없었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자신의 죄를 씻기위한 세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넘겨받기위한 안수세례였습니다.
요단강가에서의 안수세례식후 하늘의 음성을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기뻐하는 자란것을 알려주셔서 이예수님의 세례가 하나님의 의와 계획속에 이루어진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세례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하시며 자신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은 온세상 죄를 넘겨받아 지고가시는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때 이미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이루어진 요단강가에서의 주님의 세례로 나와 우리의 모든 세상죄가 주님께로 넘겨지게 되었습니다.(율법의 요구대로 이루시고자 하는 은혜의 법아래 완성= 정확하게 다시 말하면 사실상 이때 모든 세상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주님께 넘겨진 상태임)
그리고는 주님은 또다시 율법의 요구대로 속죄에 필요한 아사셀염소가 되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세상죄를 지시고 사단으로 하여금 구속의 사역을 이루지 못하도록 시험을 받으셨을뿐만 아니라 3년동안 광야같은 세상에 다니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병자를 고쳐주며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당연한것은 모든 세상죄가 다 주님에게 넘겨졌기에 주님은 죄의 결과로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이 주님 자신에게 다 넘겨진 사실을 알려주고자 우선적으로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담대히 말할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사함뿐만 아니라 육체의 연약함을 풀어주고자 죄의 권세로 악한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그러한 병자들에게 주님이 그것도 다 넘겨받으셨기에 말씀과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의 법칙에 있어서는 이때 우리의 모든 죄가 다 넘어갔기 때문에 저와 우리모두의 모든죄가 예수님에게 다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가 자신에게 다 이미 넘겨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만나는 자들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죄를 풀어놓을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죄사함이 이루지 못했습니다.
모든 세상죄가 어린양되신 주님에게 넘겨진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율법의 요구대로 이 죄의 값인 사망이 이루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죄사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속죄제로 드린 수송아지나 염소가 죄값에 의해 피흘려 죽듯이 우리 주님도 반드시 넘겨진 죄값에 따라 죽어야 만이 비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죄사함의 은혜를 입을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죄를 지은 백성은 자신을 대신하여 속죄제로 드려진 수송아지가 죽은것을 확인하고 그피가 단뿔에 발리워지는것을 확인해야 비로서 자신의 죄가 사해진것을 믿고 집으로 기쁘게 돌아갈수 있듯이 예수님도 우리의 죄만 가져가셨을뿐만 아니라 그 죄값에 따라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죄가 주님에게 넘겨진 사실을 말씀을 듣고 안다고 해서 내 마음의 죄가 다 사라지고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룰려면 넘겨진 세상죄가 제사장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피를 흘려 죽고 그 죽은 육체는 버려져야 완전히 죄사함의 증거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십 자 가
그리하여 우리주님은 또다시 율법의 요구대로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율법의 속죄제사법대로 인간의 죄를 넘겨받은 흠없는 짐승이 사람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어 태워지고 영문밖에 버려지듯이, 예수님 그때 당시 나라의 반역죄나 노예들에게만 가해진 가장 무서운 사형틀인 십자가에 타락한 제사장들에 의하여 주님이 못박혀 피를흘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속죄제사가 끝났음을 골고다 십자가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3;11-12)
이제 이렇게 되어질때 저와 우리모두의 죄를 대속한 주님의 그 죽음의 골고다의 형장이 증거물이 되어 죄사함의 확신을 갖고 십자가앞에서 마음의 죄짐을 내려놓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모든 사람들은 모든 죄짐을 내려놓기 원한다면 제일먼저 십자가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가져 갔었어도 그 죄가 사해진 증거가 없다면 지금까지의 어떠한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도 무효이고 아직도 우리는 죄가 우리마음에 그대로 남아 오실메시야를 다시금 기다리며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지키고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를 넘겨 받으신후에 그 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함으로 온세상죄의 종지부를 찍어 영원한 마침표의 증거물로 십자가에 남겨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때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나와 우리모두의 육체와 그 육체안에서 범해졌던 모든죄가 그곳에 못박혀 죽어 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볼때 주님과 함께 죽어진 나의 모습을 보게되어 그동안 눌렸던 모든 죄짐이 다 풀려나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난 죄사함받은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서 얻을수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열과 신음으로 죽게되었을때 하나님께서 불뱀과 똑같은 구리뱀을 장대에 매달아 그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산다고 약속하신것과 너무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불뱀에 물려 고통스러워하는데 뱀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말씀에 마음을 꺾지 않고 보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고통속에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화신인 뱀이지만 뱀소리만 들어도 두렵고 치가 떨리지만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믿음을 가지고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바라보자 라고 하여 구리뱀을 본자는 다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구리뱀을 계속 그곳에 남겨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구리뱀을 만들었다고 해서 불뱀이 사라진것이 아니라 불뱀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나타났고 계속해서 불뱀에 물린 사람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사람은 한번도 아니고 두번 세번 여러번 물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사람이 여러번 물려도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만 쳐다보면 살았습니다.(민21:9)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이와같습니다.
아무리 수없이 많은 죄악을 저질렀고 앞으로 또 수없이 많은 죄악들을 저지르고 산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는 나와 우리와 세상모두의 죄악을 사하고도 남음이 있는 영원한 속죄제사이기에 그 어떤 자라도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앞에만 가게되면 모든 죄짐을 다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자신이 죽어진 옛모습을 바라보면서 육에대한 무가치를 깨달아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여 주님께 모든것을 맡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또다시 죄의 불뱀이 나의 손과발을 물고 입을 물고 눈을 물고 가슴을 물고 머리를 문다할지라도 우리는 날위하여 돌아가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앞에 가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의 고통을 다 내려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이루어진 예수님의 세례는 바로 나와 우리의 모든 세상죄가 주님께로 넘겨진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확증이 되기 위하여는 바로 실제의 경험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사함의 증거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다 자신과 모든 세상죄를 다 못박아 버렸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 가면 비로서 날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엄청난 경험을 합니다.
말로 표현할수 없는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고 또감격하여 몸부림치게 될것입니다.
이전에 말로만 듣고 알았던 주님의 사랑이 이론과 지식에 의하여 추상적으로만 알았던 우리 주님의 그러한 사랑이 십자가 앞에만 가면 실제의 경험을 갖게되어 이세상 언어로도 표현할수 없는 엄청난 주님의 사랑을 갖게 될것입니다.
두개의 교차된 그 나무십자가속에 주님홀로 못박히심을 당하였지만 주님은 온인류의 죄를 넘겨받아 함께 못박아 버렸기 때문에 아담이후 세상끝날까지 온 인류의 육체의 죽음과 죄가 그 십자가안에 잠들어 있으며 그 위에 주님의 붉은피가 다 덮여져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죄가 넘겨져서 자신이 원하던 원치않던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세상에 아무리 착하고 평생을 법없이도 살만큼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아담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더럽고 추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인해 태어난 인간은 아무리 평생을 선을 이루며 살았다 할지라도 육신에 의해 나왔기때문에 하나님앞에서는 악하고 죽임을 당할 존재로 보십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안의 구속안에 들어와 있지 못하면 인간의 어떠한 선도 어떠한 의도 어떠한 옳음도 어떠한 정의도 하나님앞에서는 전부 죄악일뿐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누구든 즉 선한사람이든 옳은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나쁜사람이든 육신가운데 태어난 자신이 죄악덩어리임을 알고 주님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은 나의 죄짐을 풀어놓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앞에 나아오기까지의 모든 전생애의 삶을 나의 육체와 함께 땅땅땅 못을 박아버린것을 보게 하여 이런 자기 자신을 믿지도 말고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말고 완전히 무익한 자로 여겨서 자기를 부인하고 버리고 포기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전생애의 삶이란 이전에 지은 잘못과 범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온전히 잘 살았다고 여기는 옳은 삶이나 선한삶 훌륭한 삶까지도 다 말합니다.
사실상 회개도 우리의 지은죄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게 살아왔다고 여기는 삶까지도 회개를 해야 전 생애를 주님께로 돌이키는 삶으로 방향을 돌릴수가 있습니다.)
다시한번 말합니다.
십자가앞에 나아가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십자가엔 주님과 함께 죽어진 나의 옛모습과 나의 정과 욕심까지 못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박혀진 내 모습위에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나를 뒤덮혀 나의 모든 몸은 그 피로 인해 붉게 적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 이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 드립니다.)
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바로 우리의 죄가 사함받았다는 증거가 되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때 마다 저와 우리모두의 죄가 사함받으신 그 증거로 하여금 내 옛몸과 정과 욕심으로 지은 모든 범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음을 마음으로 보게되어 주님께 감사와 그 은혜로움의 눈물만을 흘리게 될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제사입니다.
*히8:8-13, 히10:12-18
-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
각에 기록하리라 하신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였다면 이 새언약의 법으로 하여금 이제는 십자가 앞에 설때마다 실제의 경험이 되어 주께서 날위하여 하신 구속의 사역을 믿고 받아들여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2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고 이때부터는 죄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게 되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이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란 모든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나 숙제에 대한 정확하고도 시원한 해답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나 풀어야 할 숙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태어나서 왜 죽는것이며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입니다.
많은 세상사람들은 이문제를 풀기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써보았지만 속시원하게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덕윤리 철학 종교등을 만들어 기도와 수련 훈련과 고행을 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로는 그 누구도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오늘날 4대종교라고 하는 불교 흰두교 이슬람교 기독교등만이 각자의 교리를 내세워 죽음과
죽음후의 내세관에 대하여 가상적으로 정리하여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사람들의 자기 생각과 자기 주장에 따라 편이 갈리고 파가 나뉘어서 서로 자신이 믿는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여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고 가르쳐줘야 할 종교단체들이 서로 시기,다툼,미움,등 죄를 지으며 죽음을 부르는 종교전쟁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란 모든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나 숙제에 대한 정확하고도 시원한 해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위의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한번 새겨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붉은 보혈로 뒤덮혀진 십자가는 죄를 가진 인간이 죄사함을 이룰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 뜻을 모두 이룬 단하나의 유일한 서약서인 증표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예수님이 날위하여 이루신 이 엄청난 뜻이란 것을 분명히 정확히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는 어떤 증표가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모든것을 것을 이루신 것을 마음에 받아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마음에 받는것입니다.(히10:22)
대 속 죄
대속죄일에 흠없는 짐승이 사람대신 죽어서 피가 뿌려질때에 그 피는 아무곳에나 뿌려진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피는 우선적으로 제사장이 취하여 번제단의 네 귀퉁이의 단뿔에 붉은피를 발랐습니다.
이 번제단의 네귀퉁이는 지워지지 않는 금강석철필로 쓴 모든 사람의 죄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렘17:1)
그러므로 단뿔에 피가 발리워졌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완전히 처리되었음을 알리는 증표이기에 오늘날은 모든 인간이 지은 죄는 십자가의 보혈로 하여금 죄가 마음에서 부터 처리되어 사함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사실을 듣고 믿는 자는 마음에서 죄가 사라지는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히10:10)
이처럼 십자가는 죄사함을 이루는 서약의 증표요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마음에 죄짐을 모두 풀어놓는 놀라운 은혜를 이루고 있기에 우리가 이러한 은혜에 사모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내 마음에 피뿌림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이 지금껏 죄로 눌렸던 고통받은 나의 마음이 완전히 벗어날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은혜의 놀라운 내용마저도 자신이 행해서 자신의 의로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것을 다 이루셨으니 이제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섬기고 열매를 맺자고 열심있는 신앙을 부르짖습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무익한지를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연약하고 늘 실수만하는 우리들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천년전에도 그 때 당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록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기대하거나 믿지 않았듯이 오늘날도 우리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들을 위하여 우리가 할수 없는 일들을 주님이 다 이루어 놓았으니 이 사실을 다만 마음으로 믿으라고 할 뿐입니다. (마11:28-30)
무엇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 께서 행하신 그 구원사역에 관한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다만 믿으라고 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에도 이와같은 예수님의 보혈로 피뿌림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 없이도 주님의 놀라운 그 은혜를 통해서 십자가앞에 마음을 열고 가기만 하면 그곳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하신 주님의 모습과 나의 추악한 옛모습이 함께 못박혀져 있는 모습을 보게되어 내 모든 죄가 십자가의 붉은보혈에 잠겨져 있는것을 보게되어 죄사함을 받은 자신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기록된 약속의 말씀에 의하여 저와 우리 모두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며 이 말씀을 듣는 자는 자신의 마음판에 새언약의 약속의 사실로 받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안에서 이러한 십자가의 놀라운 경험이 죽는날까지 잊지않고 새기며 살아가야 할것은 바로 자신의 신앙고백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나의 죄를 위해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매순간의 믿음의 고백입니다.(이것이 듣고 믿음으로서 나타나는 역사 입니다.)
비록 우리는 그때 당시 주님의 희생의 현장에 없었지만
주님에 의해서 내죄가 넘어간것도 몰랐지만
내죄가 주님에 의해서 사함받은것도 몰랐지만
아니 애초부터 내가 죄인인것도 몰랐고 내죄가 그렇게 남들보다 많은것도 몰랐지만........
말씀은 사단에 의해 모든 인간은 죄악으로 썩고 부패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말씀은 이러한 인간을 위해 긍휼히 여겨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새언약을 선포했다고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하고 있고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어린양으로 인간을 위해 대 속죄를 이루셨으니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드리게 되면 이 고백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 죽었던 우리의 영이 주님의 생명인 영으로 하여금 다시금 회복되어(살아나게 되어) 이 믿음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에(영에) 성령이 임하여 육체의 죽음이 다하는날 까지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부
죽음후의 사흘간
주님 십자가의 희생직후 사흘동안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흐릅니다.
분명히 사단의 세력은 주님의 희생으로 인해 어둠속으로 쫓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주인이었던 죄가 십자가의 못박음으로 죄의 세력은 사라짐으로 죄사함을 얻어 광복의 기쁨을 누려야 할 터인데..... 그런데 당시 온 세상은 영광의 찬송을 부를수 만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지극히 높은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가 다시금 선포되어야 마땅하였지만 지금 온 세상은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대 전쟁에서 승리한 주님의 모습보다는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있는 주님을 잃은 슬픔에 숨죽이며 흐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망연자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과 제자들과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이름모들 사람들...그들은 그때 마음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보냈을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옵니다.
세상 모든 죄의 값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치룬후 그 형벌을 사흘동안 죽음의 감금상태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은 이죽음의 시간속에서도 가만 계시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때는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에 묻혀져 세마포에 싸여 잠자는듯 사흘동안 계셨으나
영으로는 이 기간동안 주님은 옆에 있는 강도에게 말씀하신대로 낙원에 계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또한 이 사흘이라는 기간동안 주님은 지옥도 가셨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니라
(벧전3:18-19)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느 사람처럼 심판을 받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6)
이로보건데 우리주님은 죽음후 사흘동안은 낙원에 가셔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다리는 예수님이전에 죽은 구약의 모든 의인들을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하여 가셨습니다.
또한 지옥에 내려가셨던 것은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에 의하여 오시리라고 예언한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고 듣지아니하여 음부에 내려간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가 자신임을 증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자신의 의를 믿고 살아왔던 것이 얼마나 무익한것임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내려가신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죽음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죄값이 다 치뤄진 죽음의 감금상태인 사흘이 지나자 예수님은 모든 믿는자의 의와 거룩을 위하여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신앙은 우리에게 있어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근본 우리의 마음을 무너짐을 갖게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게하여 죄를 모두 씻음받게 하고 우리를 죄짐을 내려놓게하여 주님과 함께 죽어진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앙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이루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말그대로 죄사함이 확증된것 뿐입니다.
물론 자신이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아진 경험이 없이는 아무런 신앙의 첫출발도 할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신앙만으로 살때는 얼마동안은 마치 감사와 기쁨속에서 지낼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단이 십자가에서 패퇴할때 죄와 사망은 비록 주님의 발아래 짓밟혔지만 우리 인간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 중심의 (자기의)옳다고 여겨지는 사상이나 인간중심적 생각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 받았다 할지라도 다시금 우리육신의 원함을 통해서 내가 옳다라고 혹은 바르다라고 여겨지는 일들을 계속 함으로써 자신은 선을 행한다 하겠지만 주님보시기에 원치 않는 죄의 허물을 다시금 쏟을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보십시오
주님에 의해 이루신 이 십자가의 구속의 엄청난 승리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주님을 잃은 슬픈 감정에 치우치다 보니 하나도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잃은 슬픔에 애도를 하고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러한 것들을 주님을 위한 바른 자세라고 여기고 있지만 주님은 그들의 행동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육신에 이끌려 주님을 잃은 슬픔에 눈물만 흘리고 두려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주님에 의해서 내 죄가 사함받는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주의 부활신앙이 내안에 없으면 그 신앙은 다시금 새 생명으로 거듭나지도 못한채 원래의 육신의 자리에서 선과악에 대한 분명한 선만 더해져 옳게만 살려고 하는 행위주의 적 모습으로 그대로 머물며 살아갈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까지도 다 아셨습니다.
인간의 육신의 옷을 입었던 주님이신지라 누구보다도 인간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육신의 눈을 가지고서는 영적일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주님은 성육신하여 태어나면서 부터 지금껏 육체의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다 이루어 사단과 죄의 세력을 멸하여 모든 사람을 죄사함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와뜻을 몰라서 죄사함받고도 다시금 원래의 육신에 매여 살아간다면 주님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되고 말것을 아셨습니다.
결론
주님의 부활 그리고 성도의 연합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제자들에게 변화되어진 부활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약에 예언한 모든 속죄가 이루어졌음을 믿고 죄사함받았다면 이제 주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본 너희들도 이와같은 사실에 동참하게되어 연합한 자가 되어 새생명을 얻어 거듭나게 되어 너희들도 의롭고 거룩한 자가 되어 하나님앞에 담대히 서게 된다는 것을 자신을 그 증표를 세워 보여주시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살아났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만을 가지게 되면 또다시 육신에 매일수 있는 염려와 슬픔과 근심이 있기에 다시금 죄와 사망에 매이지 않도록 우리들을 주님과 같은 의와 거룩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이 부활의 사실을 듣고 받아드리면 마음의 모든 죄가 다 사라진 기쁨을 이제야 느끼게 되어 비로서 우리가 새생명을 얻어 거듭난자가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앞에 나아가도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담대히 나아갈수 있는 기쁨과 은혜와 담력을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상 믿음을 갖는다는것은 바로 주의 십자가와 부활 이 두가지를 내 맘에 온전히 받아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죄사함과 거듭남은 십자가앞에 나아가 먼저 죄사함이 이루어진 뒤에 오랜 세월을 거쳐 후에 거듭남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부활은 이천년전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저와 세상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복음의 말씀을 들을때 이 사실을 마음으로 함께 받아드림으로써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바로 저와 우리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되어 죄사함과 거듭남을 동시에 마음으로 부터 이루어 집니다.
이때 주님과 함께 죽었던 나의 옛모습이 새생명으로 중생하여 나의 영이 주님의 영으로 소생케되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할 처소가 되어 성령께서는 내 영안에 임재하시어 그 이후 새생명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이끄심따라 살아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다는것은 이처럼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의해 죽었던 우리를 새생명(중생)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거듭남)
마음에 죄가 사라진 우리자신의 모습을 경험하게 하여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진 자신을 보게합니다.
(감사)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이 소생하게되어 성령을 받아들여 이끌림을 받을수있는 놀라운 은혜의 신앙인것입니다.(영광)
중요한 것은 주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주의부활로 새생명을 얻어 우리가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거듭났다고 하지만 그 이후 죄 안짓고 살아가거나 갑자기 천사처럼 흠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게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아랑곳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사함과 거듭남은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새언약의 은혜의 선언이며 우리를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린것입니다.
믿음으로 죄사함과 거듭남은 받았지만 그래서 기쁘고 감사하지만 죄의 세력은 여전히 죽은 우리의 옛몸을 통하여 이전보다 더한 간교한 유혹으로 죄사함받아 거듭난 자들을 넘어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았을때 따라오는것은 주의 부활의 은혜에 의한 의롭고 거룩함입니다.
그러나 이역시 확증이 없으면 자신의 이전 부끄러운 모습이나 현재의 부끄러운 모습을 통해 감히 의롭다라고 말을 할수 없게 됩니다.
죄는 이미 끝났지만 주님에 의하여 우리몸을 십자가에 다 못박힌 상태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육신이 예전의 길들여진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있고자 하는 사단이 심어논 인간중심의 사상인 "자기의" 입니다.
주와 함께 죽은자가 새생명으로 거듭나서 성령에 의하여 영으로 이끌림을 받아 살지못할때는 우리는 자신의 의가 자신을 이끄는 교사가 되어 이처럼 자신이 보기에 옳고 바르고 선하다고 여기는 곳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기힘을 믿고 살아가기때문에 성령의 이끄심보다 늘 앞서나가 이러한 곳에서 우리의 실수와 범죄의 허물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를 믿고 거듭난자도 항상 죄의 올무에 걸릴 위험을 안고 있고 실지로 이러한 죄의 올무에 걸려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는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죽은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사단은 이런 죽은 죄로 하여금 다시금 우리 마음에 살아있게끔 만들어서 하나님을 멀어지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죄의 역사는 항상 사단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의 책임은 항상 사단에게 있습니다.
죽은 죄로 하여금 유혹을 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거듭난 우리들이 유혹과 죄가 우리가까이에 올때는 우리의 양심이 먼저 주의 하라는 경고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나 어느순간 양심마저도 무너뜨리고 기어코 우리육신이 그 원함에 따라 다시금 범죄에 빠졌을때는 회피하거나 핑계를 대지말고 그 즉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앞에 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할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아신 주님께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혈로 이미 사해놓으신 것을 보게 하시면서 항상 자신을 무익하게 여길수 있도록 마음을 꺾게 하실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을 통하여 들은 사실을 우리의 양심과 영으로 경험해야 할것입니다.
먼저 첫째로 첫조상 아담이 죄인이었다면 그 안에서 태어난 나도 죄인이다라는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죄의 값은 사망이라면 죄를 가진 나도 언젠가는 죽음에 이른다라는 사실입니다.
세째로 이런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죄값을 지고 죽으셨다면 이 예수님을 믿는 나도 주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진 경험을 갖게 되어 죄사함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네째로 이런 죄인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이 부활의 사실을 믿는 나도 주와함께 연합한 자가 되어 거듭난 새생명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약속이 자신의 영속에서 경험하게 될때 더욱더 영적 사람으로 성령의 이끄림을 받을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내마음의 의로움
주님의 부활!!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영원히 의롭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먼저 부활의 의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말씀이 내 마음안에 가득차야 비로서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의 법으로, 믿음의 법으로 나는 새생명으로 거듭났다라고 외칠수 있게되고, 내 마음에 죄가 사라진 의롭고 거룩한자가 되었다고 말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롭고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것은 내 마음속에 어떠한 죄라도 주님의 보혈의 은혜로 하여금 눈꼽만큼도 남아있지않는 깨끗한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까?
그것은 날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주님을 보혈을 신뢰하는 믿음때문입니다.
거듭났지만 또다시 지은 육신의 심판받은 죽은죄는 말그대로 죽은죄입니다.
그러한 죄는 또다시 심판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때문에 다시금 넘어질수 밖에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주님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죽은죄를 다시금 경험하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서먹한 것을 자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이미 처리되어진 사실을 십자가안에서 발견하고 감사해야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안에 죄가 없다는것은 바로 이런 경험입니다.
죄를 지어도 그 죄마저도 주안에서 이미 처리되어진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내 마음안에서는 정죄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믿고 거듭난자는 내 현재 더럽고 추악한 행위만을 바라보고 그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애를 써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무마하기 위해서 더많이 주를 위해 일하고 더많이 주를 위해 선한일을 하고 자기의 공로로 자신의죄를 가릴려고 하지만 그 무엇도 헛될뿐입니다.
죄를 가진자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주님앞에서는 죄의 열매일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된모습을 감추고자 위선을 행하는 불법의 행동일뿐입니다.(마7:23)
저와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더욱더 의롭게 되기 위해서 나의 모든 육신을 가동시켜 노력과 정성과 수고를 하여 선한일과 올바른일을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육신의 일이며 자기를 만족케 하는 일뿐입니다.
주를믿어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거듭남!.......중생의 놀라운 역사
이 놀라운 사실이 육신의 경험으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너무도 귀한 하나님의 선물인것입니다.
십자가에 박혀진 자신의 옛모습을 볼때는 너무도 두렵고 무섭고 소름끼치지만 그 죽음의 실체를 경험하는 자만이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가를 알기에 십자가앞에서 자기의를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는 위치에 까지 서게 되어 "나는 죽은자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었음을 고백하는 이 고백이 바로 주의 부활에 동참할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그리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로 이전에는 육신에 의지하여 살았지만 이후로는 영의 이끌림을 받아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
주님께서는 죽었던 우리의 영을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의 영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영가운에 임재하시어 성령가운데 살아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니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이제 거듭난 우리가 사는 것은 육가운데 사는것이 아니라 새로지음 받은 새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이끌림따라 사는 것입니다.
육: 내가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원함 소욕을 말합니다.
영: 주님의 지시를 따라 성령으로 이끌림받아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영이 내영을 소생시키심으로 성령으로 이끌림받아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