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믿음으로 얻는 칭의(III)
믿음으로 얻는 칭의III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믿음은 신자에게 축복이 전달되는 매개체이다.
이 구절에 비추어볼 때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야만 구원받는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한 의문점을 찾아보자.
(1) 회개나 사랑 또는 다른 은혜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용서의 근거가 되는 믿음 때문에 칭의나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믿음을 매개체 또는 도구로 하여 의롭다함을 얻을 뿐이다.
왜 다른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믿음이 그 수단으로 지정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믿음의 본질과 효과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믿음이외의 다른 작용은 칭의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새 언약)로서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하게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믿음은 성화를 이루는 자연스러운 수단이기 때문에 칭의의 수단으로 정해졌다.
믿음은 우리를 돌이켜 순종하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귀향의 축복을 얻는 수단으로 정해진 것이다.
믿음은 믿음이 아닌 어떤 임의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참된 순종의 근거가 되는 믿음 자체 때문에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믿음이 용서의 매개체로 정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용서는 단순히 믿음 그 자체 때문에 우리 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원칙에 입각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막1:15)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 믿음이 그 본연의 것으로서 즉 거룩함과 하나님을 향한 약속의 순종으로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연약의 보증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2)의롭게 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부정적인 면부터 살펴보자.
1)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용서받기 전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우리의 죄는 믿을 때에 비로소 용서된다. (번제단과 속죄 소)
그런데 용서되기도 전에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믿는 것으로서 모순이다.
우리는 죄가 용서되었다는 증거를 갖기 전에는 용서되었음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죄가 용서된 것이 사실일 때에 비로소 용서되었다는 증거를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발휘할 때에 비로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닌 다른 것을 믿는 것이다.
2)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믿는데 잇는 것이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 구원)
의롭게 하는 믿음 또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행사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을 권리가 없다.
3)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데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그러면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9,10)}
또한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주신 기록을 믿는데 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이 의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는가?
그는 자신의 아들을 갖게 될 것을 믿었다. 그것이 전부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믿음은 그 사건에 달려있는 큰 축복 즉 세상의 구세주이신 메시아가 그에게서 나게 된다는 큰 축복을 믿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핵심이었으며 이 언약의 성취는 그가 아들을 갖는 것에 달려 있었다.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은 “만 백성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
그 언약의 총체는 “네 안에서 만 백성이 복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히브리서 11장에는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들이 믿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그들이 믿는 것에 의하여 암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벨을 예로 들어보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양의 첫 새끼의 피를 드린 것으로 보아 그는 속죄와 “피를 흘리지 아니하고는 죄 사함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인은 오만한 불신자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예물로서 땅에서 난 곡식을 제물로 드렸을 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용서의 근거로서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속죄를 부인하면서도 의롭게 하는 믿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빛의 근원이 태양인 것처럼 계시의 총체와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즉 그의 신성과 속죄를 중심으로 한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과 다른 성경 기자들이 구원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요5:39, 히1:1,2, 눅24:44)
신, 구약 성경, 그리고 모든 상징과 징조들은 그를 가리키고 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은 장차 오실 메시아였으며 신약시대 성도들의 믿음의 대상은 이미 오신 메시아였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고전15:3-4)
“먼저”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을 복음 중 “으뜸 되는” 교리로 전파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새롭고 산길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음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히10:20)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으로 을 발견 할 것이다.
이 진리는 인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이다.
우리는 다른 많은 서신들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성화의 주요 원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 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이것만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다.
믿음의 행위들은 많다.
그 행위들은 올바르며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기록을 믿는 것 외에 의롭게 하는 믿음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새 언약의 보증이신 중보자)에 관하여 계시해 주신 것을 명백하게 믿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의 행위이다.(율법의 행위와 대조)
“그러나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그의 속죄를 굳게 붙잡고 용서와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서 그를 붙잡는 것이다.”
기도 안에도 믿음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 효과적인 기도를 드릴 때 믿음이 발휘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의롭게 하는 믿음이 아니다.
(3)우리는 언제 의롭다함을 얻는가?
사랑(하나님의 사랑에 반응 하는)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즉시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 사함이 예비 되어 하늘의 큰 도장으로 봉인되어 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의 행위로서 복음이 제시되어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즉시 은혜로운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4) 우리가 칭의를 얻은 상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추측하는 것 외에는 알 도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얻었는지에 대하여 성경에 계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롭다함을 얻은 자의 특징들을 규정해 두셨으며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선포하셨다.
1)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모두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령과 교제한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시며 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다.
성령은 그들을 성부와 성자께 인도한다.
그리고 그들 안에 성자를 계시하시며 성부를 계시하신다.
이러한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죄 속에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는가?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등등의 것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식의 문제이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
3)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고 말씀 하셨다.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도 말씀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느낌, 죄 사함을 받았다는 느낌,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체험의 문제다.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로운 상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실제로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는 큰 평안을 누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추측할 수는 없다.
언젠가 마음이 대단히 감미로운 평안의 상태에 있었을 때 온 세상이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경험이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주여 족하오며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의롭다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용서의 행위가 이미 일어난 곳에는 정죄의식이 남아 있을 수 없다.(롬8:1)
4) 우리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우리도 하나남의 사랑하는 자녀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저절로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낄 것이며 아버지라 부르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양자의 영을 주실 때 얻는 것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은 상태의 증거이다.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후사인 것을 알고 행동한다.
우리는 그것을(칭의) 가지고 있는가?
지금 죽어도 두렵지 않은가?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언약의 훈계를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슨 근거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저가 과오에 빠지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 책하리로다.”
당신은 채찍의 징 책을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깨우시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시는가?(요1서1:9)
하나님께서 당신을 채찍으로 다스리고 계시는가?
그러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자녀로 취급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징 책을 받고 있지도 않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을 근거가 없다.
의롭다 함을 받은 증거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실제적인 특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신뢰가 없는 불신 상태에는 덕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의 권리 인바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주장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이다.
의롭다함을 받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더 나아가 마음의 거룩함을 향해 도약하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예비 되어 있다.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벧후1:4)
우리의 것인 그 특권에 가까이 가서 이 거룩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 되어 있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굳게 붙잡자.
우리가 칭의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선을 행하고 많이 기도하고 심한 고통을 견뎌도 소용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면 즉 복음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정죄와 진노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몇 년 동안이나 괴로움으로 신음해도 여전히 비참한 상태에 거한다.
지금 진노 상태에 있는가?
우리의 기다림과 신음이 아무리 깊어도 그것은 우리를 조금도 선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더 많이 뉘우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 나오라.
더 많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믿지도 않으면서 기도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정죄 받은 반역자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으로 즉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마음에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닌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10:9)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말씀 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에 관하여 계시해 주신 중대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믿고 그것에 영혼을 의지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을 의지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 나가기 전에 애를 쓰며 기도하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없다.
이제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영혼을 주님께 맡기자.
“주여 몸과 마음의 능력을 다해 저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당신 뜻대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를 사용하시고 처리하소서.
당신이 옳게 행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이 옵니다.”라고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