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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얻는 칭의II
복음의 칭의란 무엇인가? (부정적인 면)
(1) 복음적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아니다.
복음 아래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자기의 변명으로 제시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신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누구라도 의롭다 함을 얻는 보편 구원론이 아니다.
죄인들이 복음 아래서 의롭다 함을 얻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이나 의를 자신에게 전가함으로써 자기들이 율법에 대해 의롭다고 간주하는데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잘못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모든 인간이 그런 것처럼 또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죄 사함을 룰(형식)적인 것으로 알고 행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기계적으로 하실 수 없었으며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시고 제사가 되시고 대 제사장(중보자)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레1~7장)
주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며 영혼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 그리고 이웃을 주님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 이것이 곧 주님의 의무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의무를 행하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기까지 순종 하셨다고 말한다.
이 순종(아버지께서 맹세하고 보증하신 새 언약)이 바로 우리의 이익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것이 우리의 이익으로 전가된다면 우리는 어째서 회개하고 율법에 순종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중 아니 삼중의 예배를 강요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보증인으로 하여금 율법에 순종하게 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당하게 하신 다음 또 다시 우리 스스로 회개하고 순종하도록 삼중의 예배를 강요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순종(새 언약)외에 또 다른 순종이 전가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은 자비로운 율법에의 영원한 순종뿐이다.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순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값없이 주시는 용서를 받아야 한다.
(2) 믿음으로 얻는 의란 믿음이 개인적인 성결의 대용품이란 뜻이 아니다.
또한 임의적인 규정에 의해 믿음이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순종을 대신한다는 뜻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칭의는 개인적으로 거룩해야할 필요성을 없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임의적으로 면제 시키시고 그 대안으로 믿음으로 제시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으며”(엡4:18)“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엡2:1)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하심과 공의의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어 행동하셔야 했다.
그의 백성들의 죄를 무시될 수 없다.
공의는 죄를 심판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만일 죄에 대한 벌책 적 귀추로부터 백성들이 구원 받으려 한다면 그 죄에 대한 벌책 적 귀추를 만족시키는 어떤 적당한 방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있을 수 없다.
죄를 속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필수 사항이다.
공의를 무시하고 은혜를 베풀 수 없었다.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해야 한다.”(롬5:21)
구속을 성취한 근거 위에서만 은혜가 행사 될 수 있다.(롬3:24)
유일한 해답은 중보자 안에서 이다.
바로 믿음, 믿음 그 자체로 간주될 뿐 다른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의로 여김을 받았다.
그것은 그 자체가 의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며 그 의의 행동은 뒤에 성육신이 풀어준다.
그것은 마음과 생활의 거룩함을 낳는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 거룩함 대신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 자체가 된다.
(3) 이신칭의란 죄인이 선한 행위나 개인적인 거룩함이 없이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믿기만 하면 의로워진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칭의가 선행이나 거룩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생각하는데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크게 강조한바 있다.
그러나 그 말은 바울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칭의를 얻기를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오류를 지적하여 항의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칭의가 율법의 행위가 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칭의에는 선행이 필요치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율법적인 행위는 기대나 두려움에 기인한 행위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기인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에 옳지 않은 이론이 침투해 들어왔을 때에 야고보는 그 문제를 채택하여 그들이 바울을 오해했던 점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1-24)
이편지의 사상은 바울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고대 교회 중 일부는 그 이유 때문에 이 사상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말한 행위와 야고보가 말한 행위가 다른 것임을 간과했던 것이다.
바울은 율법적인 동기로 행해진 행위에 관하여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믿음이나 믿음의 의로움에 근거하는 선행(하나님의 사랑에 반응 하는)을 줄곧 강조했다.
그는 율법의 행위나 율법적인 동기에 기초를 둔 행위들이 칭의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를 부인했다.
그리고 야고보가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만 또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행위가 어울려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친 것도 동일한 가르침이었다.
또는 바울이 표현했듯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도 동일한 사상이다.
복음의 칭의란 무엇인가?(긍정적인 면)
복음적 칭의 또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와 용납됨에 있다.
사람은 믿음과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그들이 이 율법을 근거로 용납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행위 때문에 마치 그들이 의로운 것처럼 취급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실 때 택하시는 방법이다.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됨으로 믿음으로 인정된다.(요17:21참조)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즉 새 언약의 보증 안에 있다.{같기도 신앙(7)참조}
죄인들이 용서받고 용납되며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은 이런 것이다.
즉 그들이 회개하고 믿고 거룩해지면 그들의 과거의 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 될 것이다.
이제 복음 아래서의 칭의가 율법 아래서의 칭의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율법적인 칭의는 실제적으로 무죄하며 그렇기 때문에 책망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적 칭의는 용서와 용납을 받아 의로운 자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근거는 그의 순종이 아니라 다른데 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말했을 때 그는 엄밀하게 율법적인 의미에서 칭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얻는 칭의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율법적 칭의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사람이 의로운 자처럼 취급받는다는 것에 대해 말했다.
복음적 칭의가 가져오는 효과, 또는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겪는 상태는 어떤 것인가?
(1)우선 용서받은 사람에게서 율법의 형벌이 면제된다.
용서의 첫 번째 효과는 집행을 막고 없애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형벌을 면제 해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형벌에 관한 한 그 사람은 범법 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율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는 완전히 형벌을 면제 받았다.
그러므로 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용서받는 순간부터 두려움이나 형벌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된다.
형벌은 전혀 그에게 부과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실제적으로 면제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효과는 이 모든 불리한 일 들을 면제해주며 범법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용서받은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한다.
그는 새로운 관계를 다시 찾으며 율법에 관한 한 하나님 앞에서 마치 무죄한 것처럼 취급된다.
그것은 그를 실제로 무죄하다고 간주하거나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과거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3) 또 다른 효과는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즉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 취급받는 관계를 가져다준다.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으며 하나님의 상속자로 인침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회복한다.
(4) 마귀의 올무 및 죄로 말미암아 연루되어 있는 모든 혼란으로부터 완전히 구출되는 데 필요한 은혜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용서만 하시고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죄에서 벗어나도록 버려두신다면 그러한 용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속의 계획에서 우리가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과 조력이 완전히 보장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다면 사단의 속박과 죄의 얽매임을 부수는데 필요한 빛과 은혜와 도움을 보장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실 것이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상하기 쉬운 어린 마음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과거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범죄 했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엎드려 울며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다.
그들은 자신이 죄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크게 기뻐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옛 습관과 본래의 세력들의 압박을 느끼기 시작하며 그것을 극복하려면 많은 노력(율법의 행위가 아님)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종 낙망하여 “이렇게 많은 원수들을 만나는 데 그들을 이겨낼 결심이 견고치 못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롬7:24) 라고 외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탱해 주실 것이다.
원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갈라지고 만물이 없어져도 두려워 떨거나 안팎의 원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5) 칭의는 마치 우리가 전혀 범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신적 속성을 동원한다.
우리에게 아직도 죄가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의롭다함을 얻기만 하면 지혜로우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장되어 있다.
그러한 도움을 받는데 왜 두려워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고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계시며 그의 신실하시고 영원한 벗으로 보장되어 있다.
복음적 칭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율법적인 칭의와 다르다.
율법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이 결백할 때에만 유효하다.
그가 율법을 위반하면 그 즉시 칭의는 효력을 잃는다.
그러나 복음이 죄인을 의롭다 할 때에는 위의 경우와는 다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하)
이제 전혀 새롭고 독특한 관계가 성립된다.
죄인은 행위의 계약으로부터 이끌려나와 은혜의 계약에 속하게 된다.
이제 그는 절대적이고 무죄한 순종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가 범죄 해도 이제는 율법아래 다시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약의 은혜를 받는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으면 그는 자녀의 대우를 받으며 잘못된 것을 교정 받고 훈계를 받으며 겸손하게 되며 다시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이 말은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그 마음을 결코 바꾸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이 영원히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을 위험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범죄 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진심으로 죄를 버리고 해방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도와주실 것이며 죄에 대한 확실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여 범죄 하게 한단 말인가?
*이런 교리 때문에 어떤 사람이 담대하게 범죄 한다면 그것은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그가 죄를 미워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사랑한 적도 없고 다만 위선적인 회개를 했을 뿐임을 보여준다.
*혹시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기적인 사랑이었을 뿐이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죄를 미워했다면 자신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이 벅차 엎드려 눈물을 흘릴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과 그를 위해 항상 준비해 두신 은혜로우신 도움을 주셨고 또 그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방황하였음을 깨달을 때 그는 더욱 겸손히 땅에 엎드리지 않겠는가?
(6) 복음적 칭의는 새 언약의 훈계를 보장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길을 잃으면 언약의 훈계를 사용하여 그를 다시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시편 89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대신 다윗을 시켜 이렇게 말씀 하셨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의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 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시89:30-34)
그러므로 신자들이 범죄 하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범죄 했을 때보다 더 신속하게 하나님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죄인은 제멋대로 풍족하고 부하게 살아도 죽음의 속박을 받지 않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이나 세상 것을 쫓는 다면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로 그를 때려 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징계를 받아 돌이킨 사람은 다윗처럼 말 할 것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
(7) 그것은 성화의 모든 수단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화되도록 보증해 준다. 그러므로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천국에 합당하게 되어 실제로 구원될 때 까지 굽히지 않고 인내하며 순종할 것이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