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령 안에서의 기도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지만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한 두 번 경험한 사람은 많지만 계속 그런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역시 적은 듯 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넓은 의미로 보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경험하고 있고 현재도 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도가 주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넓은 의미의 성령 안에서의 기도로는 너무 막연합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성령 안의 기도는 성령께서 자신을 이용하여 그분의 기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써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또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내용을 알려주고 이것을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전제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고 기도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뜻을 우리가 깨닫고 그에 따라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우리가 기도한다면 이는 가장 바람직한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어떤 사람들은 황홀경(trance)에 휩싸이거나 비몽사몽의 상태가 되어 몰입되는 기도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의 강한 힘에 휩싸여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도하게 되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현상은 성령 안에서의 기도의 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강한 임재 속에 몰입되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신비적 현상 만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고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런 현상 속으로 몰입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런 영적 환경에 몰입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주 금식하기도 하며, 긴 시간의 방언기도를 무작정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황홀경에 들기 위해서 인위적이 방법을 개발하고 훈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어떤 장소에서 이런 영적 현상에 들어가기 쉽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장소를 고집하고 찾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 방법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적 현상이 아니라 성령의 인격 속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격이란 성령님이 자신을 다루시는 뜻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다듬어가십니다. 성령님의 이끄심은 기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에 관여하여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뜻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다듬으신다는 말은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기도의 제목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소망을 하나님에게 드러내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성령님은 우리가 행하고 지켜야 할 것들을 끼워넣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의 의지와 소망을 우리는 자신의 말로 기도하게 됩니다. 보통 10여분이면 이런 내용의 기도는 끝납니다. 생활이 단조로운 사람은 기도 제목이 별로 없어서 10분도 지루할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제목이 끝나면 이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할 차례입니다. 성령님이 자신의 생각 속에 성령님의 뜻을 불어넣으시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자신의 생각(heart)을 이용하여 그분의 인격을 드러내주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방언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무렵에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묵상으로 들어갑니다.
방언 기도로 들어가면서 바로 생각과 방언기도가 헛돌기 시작합니다. 방언 기도는 하면서 생각은 온통 세상을 떠돕니다. 생활 속에서 경험한 다양한 인상들로 인해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들어옵니다. 이렇게 생각이 통제되지 않고 기도와 분리되면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묵상으로 기도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떠오르는 잡념으로 인해서 집중을 하지 못합니다. 잡다한 생각이 묵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훈련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제대로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령님의 강한 임재로 이런 것들이 통제되고 일방적으로 이끌려 기도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그런 기도를 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 안의 기도에 대한 체험판입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면 이제부터는 그런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이 통제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방언을 하면서 그 방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생각은 재빨리 자신의 통제를 벗어납니다. 방언에 귀를 기울이면서 속으로 이 방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령께서 깨닫도록 도와주시기를 소망하십시오.
방언 기도를 하면서 계속 귀를 방언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귀를 방언에 기울이고 마음은 성령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채우십시오. 이렇게 기대하면서 계속 귀를 기울이면 어느 순간에 생각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말은 마음의 귀 즉 생각을 방언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중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에 지금 자신의 입으로 하는 방언의 내용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점점 넓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했던 머리 속에 이제는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제목에 대한 성령님의 생각이 자신에게 전달되면서 자신은 이제 비로서 하나님의 뜻(the heart of God)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인격을 배우는 방법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며 그 뜻을 이해하고 나면 행동이 바뀌게 되고 가치관이 변화되며 페러다임의 변화가 따라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에서 얻게 되는 유익 중 성령의 인격을 따르는 것입니다.
묵상 기도를 하는 사람 역시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가두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구성기도를 마치고 나면 성경을 펴고 묵상할 말씀을 선택합니다. 그 말씀을 형상화하고 이미지를 생각 속에 불어넣습니다. 다른 생각이 스며드는 것을 차단하고 이미지로 생각 속을 채웁니다. 계속 그 이미지를 곰곰히 살피면서 생각이 떠오르기까지 바라봅니다. 얼마 가지 않아 주님이 주시는 생각이 마음 속에 스며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우리 육체의 생각이 그 자리를 가로채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생각을 부여 받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 디스크 정리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방언 기도이든지 묵상 기도이든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고 하나님을 향해 정신을 모으고 5분 정도 기다리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각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스며드는 생각이 마치 시냇물이 흘러 드는 것 같아서 성경은 이것을 “river of flow” 즉 “생수의 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이 우리의 심령 속으로 주의 말씀이 흘러 들어옵니다. 이 생각에 따라서 기도하며 기도한 것을 마음에 담아 그런 생활을 하기로 작정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의 관문은 구성기도가 끝나고 방언기도 또는 묵상기도로 이어지고 난 후 약 5분 내지 1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잡다하게 떠도는 생각을 어떻게 통제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초월 명상이나 불교의 선수행은 생각을 비우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말씀 안으로 자신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몸에서 빼어내어 성령의 검인 말씀 안으로 밀어넣는 행동인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방언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넣는 것입니다. 즉 방언에 귀를 기울여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지요.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의 이미지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이 한 가지를 예로 적용하였습니다.
말씀을 형상화하는 일 즉 이미지를 구성하여 이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성된 이미지에 집중하는 것이 생각을 통제하는데 보다 수월합니다. 이런 행동은 여러 차례 실수를 통해서 점차로 익숙해집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기까지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에 방해가 되는 것은 조급함인데 특히 기도응답을 받아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이 자신이 한 기도를 듣고 응답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섭니다. 할 말은 많고 응답 받아야 할 일이 많은데 한가하게 이미지나 만들면서 묵상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은 사치스러워 보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여야만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실 것이며, 그렇게 간절히 아뢰어야만 기도가 상달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내로 기다리지 못하면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성령의 인격 안에서의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성령의 인격을 닮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본질이신 인내를 닮지 않고는 절대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한 두 번 맛베기 판으로 경험하는 그런 기도를 성령 안에서의 기도로 생각하고 그런 경험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평생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하나의 축제적인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동일한 간구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 기도를 행하였습니다. 주님은 동일한 간구를 끝없이 행하였던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한 가지 기도 제목을 여러 달 또는 여러 해 동안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성령 안에서의 기도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일한 간구는 그 기도 제목에 해당하는 환경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동일한 간구를 통해서 우리는 그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이런 까닭으로 해서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기도가 성령 안에서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들에 대한 이해를 넓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정말로 주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그 일에 쓰임 받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주권적인 역사하심에 그 의미도 모르면서 사용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며, 그리고 이 일에 쓰임 받는 주의 백성은 이 일로 하나님에게 구체적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아는 것이 주님에 대한 헌신의 첫걸음입니다. 특히 주의 일로 부르심을 입은 사역자에게는 주님의 주권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자신의 일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주의 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분명한 자각은 오로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곳을 아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일과 자신의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았으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변명하는 사람이 분명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마지막에 당할 비참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그런 사람들에 속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바르게 인정하는 것이 주의 백성들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장봉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