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치유/내적치유

[스크랩] 내적 치유

davidtheking 2010. 12. 20. 01:55

목 차



제 1 장하나님 나라와 내적 치유 ‧ 13제 2 장원마음과 드러내기 ‧ 35제 3 장열등감 ‧ 61제 4 장죄와 죄의식 ‧ 89 제 5 장인간관계와 사랑 ‧ 107제 6 장 심리적 방어와 신앙생활 ‧ 125제 7 장십자가의 치유 ‧ 147 제 8 장용서를 통한 성장 ‧ 161제 9 장치료의 예수님 ‧ 183제 10 장치료의 성령님 ‧ 199제 11 장치료의 하나님 ‧ 211제 12 장구원과 치유 ‧ 239


머리말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다. 모태신앙으로 그 누구보다 예수님의 구원과 치유를 많이 들어온 나 자신이 정신의학을 하며, 나와 환자들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치료해 보려고 그토록 애써 왔건만, 진정 예수님 속에 그토록 깊고 완전한 치유가 있는 지를 오랫동안 몰랐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기회를 통해 예수님과 성령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도록 하셨고,그 이후 나에게 찾아온 평안과 치유는 과거에 내가 정신의학에서 추구하고 경험해 온 치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 좋은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이 신앙적 치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영적치유, 크리스찬 상담, 내적 치유 등 이에 관련된 전문서적과전문가들을 접해(마침 그 당시 미국에 머루르고 있던중이라 이러한 자료와 상담가들은 어렵지 않게)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뚜렷한 해답은 없었다. 신앙과 마음의 부분적인 접목은 있었지만, 성서적 치유와 세속적 치유의 팽팽한 대립같은 것을 여전히 느끼게 되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나를 광야와 같은 삶으로 인도하셨다. 내 속에 그토록 큰 아픔과 추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두려움, 열등감, 욕심, 인정과 사랑에 굶주린 마음, 미움 들........., 하나님은 이를 계속 드러내셨다. 무척 아팠지만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를 하나하나 치유해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상함의 하나하나의 현장 속에서 깊이 경험하도록 해 주셨다. 지나고 보니 지난 몇 년간의 세월은 하나님께서 내적 치유의 실제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이리저리 나를 인도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경험한 사건, 만난 사람과 환자들,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치유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유를 통해 그동안 내적 치유 세미나를 갖도록 허락해 주셨고, 이제 부족하지만 이를 적은 책자를 통해 정리할 수 있게 되니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너무도 크심을 새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치유는 본질적으로 지식을 통해 되어지는 것은 아니며 나의 마음에서 부딪혀야 한다. 치유는 치유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성령의 현장적인 역사이다.
이 책이 내적 치유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촉발제가 되었으면 하며, 결코 내적 치유의 전부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은이소개
이 성 훈 : 연세의대 졸업. 신경정신과 전문의. 미국 베일러 의대 및 캘리포니아 대학 얼바인 정신과 연수. 연세 의대 정신과 교수
현재: 연세의대 정신과 외래교수, 연정 뇌기능 수면 연구소장,
연정신경정신과 의원장

제 1 장 하나님 나라와 내적(內的)치유

우리의 마음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지만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신6: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듯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마음이 차지하는 비율은 큽니다.
신앙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에는 열매가 없을까요? 아니 왜 부족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되어지지 못하고 멈추어져 있거나 영양이 결핍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성경은 심리학 서적도 아닌데 ‘마음’이란 단어가 919번이나 나옵니다. 올바른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을 가만히 살펴보면 마음의 문제가 굉장히 많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의 문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은 매일매일의 생활속에 많은 갈 등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 생활속에서 이런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새벽 기도, 수요 예배, 주일 낮과 밤 예배, 철야 예배에 나가고 심지어는 각종 부흥회와 기도원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막상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이것을 신앙 안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쩔쩔매게 됩니다. ‘기도하라’, ‘말씀을 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듣고 그렇게 해보지만 잘 되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마음이 오히려 더 산란해지고 복잡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경우 누구에게 털어놓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내적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마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도 한번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열심히 봉사를 하다가도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대부분도 마음의 상처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마음의 조그마한 상처가 곪아 터져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 눈덩이같이 커지듯이 사소한 문제들이 오랜 시간 쌓이게 되면 결국 교회가 갈라지는 일도 생기게 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도 못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어 세상까지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과 마음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의지적인 면이 너무 강조되거나 어떤 종교적 행위가 중요시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마음의 상태를 무시하게 되는데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의지적 믿음과 종교적 행위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와 감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분이 조금만 좋아지는 것 같으면 쉽게 성령충만이라든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의 깊은 본체를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거나 누가 말을 그럴 듯하게 하면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누가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면 저 사람은 사단이다. 사단이 들어가서 저렇다고 단정짓곤 합니다. 좀 좋으면 다 성령이요, 좀 나쁘면 다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의 문제를 너무 쉽게 이분화시키려고 합니다.
마음의 문제가 생기면 그 의미와 뜻을 잘 파악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데, 단순히 이분화시키다 보니 마음의 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그냥 덮어 버리게 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마음의 문제가 쉽게 무시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종교적인 행위와 신앙 생활의 결과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가난한 과부의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과시적인 면이 있고, 또 열심히 봉사를 하지만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자기의 열등감을 봉상받으려고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그 동기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가 있지 않음을 본인도 모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겉으로 보면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 무의식적인 동기가 드러나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 누구보다도 거룩하고 경건했던 바리새인들의 실체가 어느 때 드러났습니까?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들의 거짓과 더러움이 다 드러났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인 동기와 본질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만으로 신앙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신앙의 겉부분을 중시하다 보니 내면의 것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적인 영향으로 자기 감정대로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천박스럽게 여기고 죄악시 합니다.
그래서 마치 코미디언들이 우울하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TV에만 나오면 웃어야 되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에만 오면 성령 충만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한테 시험들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집에서는 인상 쓰고 있다가도 교회에 오면 억지 웃음을 하고 다닙니다.
신앙 안에도 때로는 마음이 아프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고뇌에 차서 괴로워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회에는 죄인들, 슬픈 사람들, 고민 있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항상 깨끗하고, 웃고, 즐거워하는 사람들만 있게 되니까 조금 더러운 옷을 입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왔다가는 그냥 나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진정으로 이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와서 위로받고 평안을 얻고 기쁨을 얻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치유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마음이 어려울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 누구든지 와서 위로받고 평안을 얻고 기쁨을 얻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은 성경에 있습니다.
치유라는 것은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경우에 따라 단번에 회복시켜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복은 우리가 상실한 그 과정을 하나하나씩 다시 밟아서 원인적으로 치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얼마나 치밀하고 차근차근하신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즉시 보내셔서 단번에 이루시면 되는데 그렇게 하시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마치 모든 기업과 자손을 단숨에 차고 넘치게 주실 것처럼 부르셨지만, 그가 아들 이삭 하나를 얻는 데 25년이난 걸렸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금방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 같았는데, 왜 40년간 방황을 하게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렇게 많이 싸우게 하십니까? 이런 많은 시간들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벌써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다 일러 주셨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종살이 할 것과 그 다음에 해방될 것 등을 미리 400년 전에 다 계획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오셨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과 회복을 당신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태를 잘 아시고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마13장에서 천국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 나오는 것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천국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씨앗으로 비유하고 인간을 밭으로 비유했습니다.
씨앗은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고 밭에 씨만 뿌리면 될 것 같은데 밭, 즉 나의 마음에 따라 자라나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밭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것이 잘 자라기도 하고 덜 자라기도 하고, 또 하나님 나라로 향해 가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하고, 끝까지 가기도 하고, 중도에서 잘못되어 시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씨앗이 많이 떨어져도 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으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가시들로 인해 상처가 많고 돌밭으로 인해 메마르고, 혹 겉으로 보기에 시원한 아스팔트 도로가 좌악 펼쳐져 있는 것 같지만 그 곳에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돌멩이들을 다 긁어 내고, 가시를 다 쳐 내고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아스팔트는 걷어 내고, 딱딱한 부분을 일구어 옥토로 만들지 않으면 우리들의 마음에 천국의 복음이 자라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자랄 수 있도록 마음밭을 일구워 내는 작업, 이것이 곧 내적 치유입니다. 내 마음에 복음이 들어 왔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내립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셨지만 거하실 집이 없습니다. 마음 속에 성령의 충만함이 없고 그것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지만 받아도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즉 자신의 마음밭을 가꾸는 농사를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꾸준히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밭을 옥토로 가꾼 사람에게는 말씀 하나만 떨어지면 절로 자랍니다. 자신이 변화되고 그로 인해 가정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밭은 안 보고 이리저리 씨만 얻으러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씨를 얻으면 무엇합니까? 자기 마음밭이 옥토로 일구어져 있지 않으면 신앙, 즉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인들은 남에게 전도하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말로는 전도를 하지만 자기한테 있는 가시와 돌멩이로 인해 오히려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런 마음밭이 딱딱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합니까? 그래서 내적치유는 중요한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난 후에는 어떤 후유증이 남을까요?
죄라는 것은 육신의 독한 병에 후유증이 따르듯이 그 뒤에는 항상 후유증이 따릅니다. 죄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큰 병입니다.
첫째로, 마음에 굉장히 큰 상처들이 남습니다.
죄라는 것은 마치 운석과도 같아서 작아도 땅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는 큰 자국이 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진 흔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양심으로 인해 괴로워집니다. 죄를 미워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죄지은 자신을 자학하고 미워합니다. 또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둘째로,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지나 않을까, 어떤 죄에 합당한 댓가를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이때 만약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자신을 벌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셋째로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죄의 문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었지만 이러한 상처들이 미해결의 문제로 무의식중에 남아 있습니다. 또 성장하면서 환경과 부모, 형제, 친구, 이웃들에게서 받은 여러가지 상처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의 마음밭을 길에 돌덩이 위에, 가시덤불 위에 만들게 하는 이유가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친 마음밭으로 만들고 맙니다. 즉 열등감과 자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게 됩니다.
넷째로 그 마음 가운데 불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의식적으로는 하면서도 막상 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습니다.
자기가 취할 수 있는 방도를 먼저 행하여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에 의지할 것을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돈과 권력과 지식 들에 의지해 보려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 외에도 의지할 수있는 끈을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시는데도 우리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를 못 하고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이런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상처가 온전히 회복될 수 없습니다.

내적 치유에서의 주의 사항
첫째, 남을 생각하지 말고 우선 자신의 문제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적 치유를 하다 보면 아픈 부분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점점 치유의 과정이 싫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극복해 넘겨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절대로 크게 아프지 않습니다. 약간의 두려움이 생길 정도이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치유는 되지 않습니다. 치유는 회피하려고 할 때 바로 결정적으로 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회피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자신의 문제보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 투사(projection)라고 합니다. 책을 읽다가 혹은 강의를 듣다가 다른 사람의 문제로 생각되거나 적용된다면 그 문제가 바로 나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둘째, 이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내면을 보지 못하도록 여러 외적인 사건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셋째,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치유의 음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경우는 영적인 싸움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실 집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치유이며 거기에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넷째, 기본적인 내적 치유가 우리를 단번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적 치유를 받으면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내 속에 감추어진 쓴물들이 올라와 더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더 나빠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치유는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다섯째, 사명을 가지고 직접 간접으로 사역에 종사하거나 원하는 분들에게는 내적치유가 더욱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신이 치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곤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이름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상처를 줄 때는 매우 큰 것이 되고 복음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여섯째,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지 꽤 오래되었지만 신앙이 안 자라고, 성경 공부나 교회 봉사도 남다르게 많이 해 왔지만 내면의 평안과 성격의 변화가 없다면 그 분들은 반드시 내적 치유가 필요한 분들입니다.

제 2 장 원마음과드러내기

마음이 상한 자
범죄 후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변질되었습니까?
가) 상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61장 1절의 말씀에는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마음이 상했다고 하였습니다. 원어의 의미는 ‘깨졌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감싸 주셨는데 죄로 인해 하나님 품을 떠나는 순간 마음이 땅에 떨어져 깨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는 관계로 되어 버렸고, 결과적으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버림받는 것입니다. 욥은 다른 사람이 다 버리고 떠났을 때도 개의치 않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절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란 말씀에 나타났듯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버림받음’이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배가 고프고 사랑이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두렵고 굶주린 마음으로 남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은 또한 열등감을 가져오며, 점차 불신감이 생기면서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또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려 합니다.
그 다음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있는 것은 죄의식이며 죄의식은 항상 자책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자책감이 커지면 나는 못난 사람이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열등감으로 발전합니다.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죄만 있는 것이 나니라 마음이 병들어 가게 되는 데 즉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게 되고 죄의식과 같은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생긴 원마음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도 원마음은 있습니다. 굶주린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유전되며 이로 인해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삽니다. 굶주린 마음 때문에 서로에게 나눠 주지 못하고 채우려 하다 보니 남의 것을 빼앗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또 남에게 상처를 주어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또 원망과 분노와 열등감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삽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마음이 죄로 인해서 깨어진 후 이 원마음을 고치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고치러 온다는 것은 영어의 표현을 빌린다면 ‘broken heart'한 것을 ’bind up'한다. 즉 ‘깨어진 것을 하나로 묶어 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 서로 상충이 되며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굶주린 마음이 있으면 서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원심력, 즉 마음의 원천적인 갈등이 생깁니다. 누구에게 다가서고 싶은데, 원망과 두려움과 열등감이 있어 다가가지 못합니다.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먹지를 못 하니까 더 배가 고프게 되는 것이 인간의 원천적인 갈등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산산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깨어진 사람은 내가 너로 사랑한다고 해도 믿지를 못 합니다. 한 번 튕겨보고는 그냥 도망 가버리고 맙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까 하는 열등감과 죄의식 때문에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 합니다. 그리고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원망과 화로 가득 차게 됩니다. 또 내가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가까이 가지를 못 합니다. 마음 졸이고 두려워하며 영원한 갈등 속에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깨어진 것이 묶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굶주림을 묶어 주시기 위해서 무한하고 풍성한 것을 준비하고 계신 데도 우리가 열등감과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지를 못 하고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길 원하십니다.
날마다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가는데 왜 예수가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깨진 마음 때문입니다.
즉, 상한 마음 때문에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길 원하십니다. 고친다는 것은 깨진 것을 수리해서 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을 아무리 부어주셔도 모두 새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는 굶주리게 되고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엇는 거입니다. 이 그릇을 고치는 것이 바로 치유이며 그래서 치유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상한 마음의 치유가 중요한데도 치유되지 못하는 것은 상한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매일 굶주림과 두려움, 외로움과 미움, 그리고 열등감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굉장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들 감추고 사는데 그것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달리 내세울 것 하나도 없이 자존심 하나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다든지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조금이라도 하면 평소에는 무던해 보이던 사람이 분이나서 어쩔줄을 몰라합니다. 어떤 심한 열등감이 마음 속 무의식 가운데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많은 상한 감정들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상한 마음을 항상 지니고 산다면 제대로 살아갈 사람이 거의 없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죄인인지 몰랐는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내가 죄인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것은 이전 부터 우리 마음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못 느끼면서, 감추면서 살았던 것 뿐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을 만남으로써, 이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평생 상한 마음을 느끼면서 살 수 없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가죽옷(무의식)을 입히셔서 그 죄를 가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가려도 그 상한 마음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못 느끼면서 살게 된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식이나, 남편, 또는 물질(승용차, 아파트 등)이나, 명예등으로 자신들의 열등감을 보상받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을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무력함과 열등감이 드러날까봐 조바심을 내며 괴로와 합니다.

나)우리의 원마음을 물질을 통해 감추고 살아갑니다.
사실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통장에 돈이 없으면 좀 불안해집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주실 줄 믿고 있지만 그래도 통장에 얼마 만큼은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다) 대인관계를 통해 깨어진 부분을 보상받으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세상과 일과 물질과 자식과 사람들에게 붙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나의 빈 곳을 채워 주고 보호해 주고 보상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사람들에게 바랍니다.
사람들 속에서 보호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열심히 충성합니다. 친구는 똑똑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만 골라서 사귑니다.
이렇게 자기 주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또 그런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안전해지고 확실히 보호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살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라) 심리적인 방어 기제들로 자신을 감추려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신념, 지식, 이상을 믿으며 추구하기도 합니다.
“나 외에 이 세상의 다른 것은 믿을 것이 없으니 나의 신념대로 나만 옳게 살면 되지 않느냐? 하는 식의 자기 의를 아주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최대의 긍지와 자존심으로 생각하며 삽니다.
이 사람들은 얼핏 옳게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누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경우 참으로 무섭게 변합니다.
자기가 세운 의의 기준에서 남에게 해도 안 끼치고 그렇다고 도움도 안 받은 소위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자존심은 참 무섭습니다.

포로된 자
포로된 자란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더 의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다른 것이 없고 그저 남들이 하는대로 좇아서 합니다. 세상 일에 중독이 되어서 포로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 일에 포로된 우리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갇힌 자
갇힌 자는 포로된 자와 거의 비슷한 뜻이지만 그 상태가 좀더 심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포로는 매여 있기는 하지만 외면적으로 보면 자유롭습니다. 세상에 사는 것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는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포로된 것입니다. 그러나 갇혀 있다는 뜻은 완전히 그 자유마저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꼼짝없이 갇혀 움직일 수도 없는 묶임의 극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성경에서는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은 오래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면 모두 심한 학대와 종살이에 지치고 묶여 갇힌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인간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상한 마음을 고치시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럴려면 철저히 가난해져야 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 있는 한 가난하지 않습니다. 배우자와 자식도 있고, 좋은 직장도 있고, 돈도 꽤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니고,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을 철저히 감추고 외식하기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몹시도 싫어하셨습니다. 그들은 위선자들 이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철저히 위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착하여서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질투심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꾸미거나 숨기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모습도 어른들처럼 억지로 감추려 하지 않고 드러냅니다. 안 그런 척하다가도 누가 옆에서 다그치면 금방 시인합니다. 아이들은 싫으면 그냥 싫고, 욕심 나면 그냥 욕심 나는 대로 행하고, 기분 좋으면 또 그냥 기분 좋은대로 합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철저히 위장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상대일지라도 이해 타산의 관계가 있다면 몇 번이고 웃음 띤 얼굴로 악수를 청합니다. 어른들은 몇 개의 가면을 지니고 살지만 어린아이들은 착하지는 않더라고 감추지는 못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시고 모든 것을 드러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을 때 드러내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우리를 아프게 하십니다. 몸이 아플 수도 있고 마음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은 곧 드러내는 것으로 그 안에 감추어질 것이 없습니다.
그 빛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서 완전한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준을 통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게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마치 가슴 속에 암덩어리를 지니고서도 x-ray가 투과하지 못하게 앞에 납덩어리고 막아 놓고 자신은 이상없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똑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생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시고 가장 어리석은 자로 보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우리를 노출시키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혹시 더 다칠까봐 조심스럽게 우리의 문제를 여시며 우리가 감당 못할 때는 오히려 덮어 주시고 숨겨 주시는 자비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십니다. 강제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가능한 스스로 조금씩 자신의 상한 마음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분이기에 오래 참으시며 이를 기다립시다.
절대 두려워 하지 마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준비해 주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3 장 열등감

누구나 죄인이듯이 우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바로 이 열등감의 문제를 치유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더라도 이 열등감 때문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내려 주셔도 내가 열등감 속에 사로잡혀 있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히 그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서도 두려워 벌벌 떠는 종처럼, 자녀의 영이 아니고 그저 벌벌 떠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왜 힘이 없습니까? 왜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 있는 열등감, 그것이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이란 무엇일까요?
열등감이란 자기가 자기에 대한 평가를 너무 낮게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니 지혜가 없도다’라는 말씀이 너무 자기를 비하시켜 자신에 대해 아주 낮은 개념과 평가를 갖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지능지수가 평균치에서도 훨씬 이상인 학생이 열등감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이 없다’라는 생각만 할 때 그 학생은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다가도 중요한 시험이 닥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를 푸는 데 긴장이 되서 생각이 잘 나지 않자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조급해지면서 굉장히 당황하게 됩니다. 성적이 평상시에는 아주 우수한 학생인데도 정작 중요한 시험에서는 번번히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뻔히 아는 문제인데 자기가 왜 동그라미를 틀린 답에다 치고 나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열등감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틀리면 어떻게 하나, 내가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집중이 안 됩니다. 지적인 능력은 마음이 안정이 되어야 제 실력이 발휘됩니다. 집중이 안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머리가 있더라도 좋은 성적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데 있어 인간의 두뇌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고 마음의 안정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머리는 뛰어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자신감을 가지고 열중하면 어떤 부분에든 성공을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남보다 비상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감과 용기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무리 비상하다 해도 내가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이 있으면 그 좋은 머리,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그저 길에다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귀한 달란트가 자기 것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남자들의 경우 간혹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될 결정적인 시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감이 없거나 열등감이 있으면 여러가지 좋은 조건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결정을 하거나 또한 적시에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배우자가 있더라도 내가 열등감을 갖고 잇으면 자신감이 없고 “내가 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진정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누리지 못합니다. 남들이 “당신은 좋은 아내, 혹은 좋은 남편이 있어서 행복하시겠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불안합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아내, 적당한 남편이었으면 했는데 너무 자기 기준보다 높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이 열등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어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자꾸 부정적으로 나가다 주어진 것마저도 잃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도 열등감은 작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시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셔도 우리에게 열등감이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을 뭘 보고 사랑하실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데! 죽도록 고생을 하고 댓가를 치러야 용서를 받을까말까인데! 하면서 받아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등감을 깨닫고 정복하지 않는 한 풍성한 삶, 승리의 삶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열등감은 이처럼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열등감은 언제 형성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부터 그러니까 태아에 있을 때 부터 부모의 태도로 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점점 더 자리를 잡게 됩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이 평가해 주는 것에 기준을 두고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남들이 나를 평가해 주고 대해 주는 것에 따라서 자기가 자기 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주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줄을 자기도 무의식 중에 느끼기 때문에 “나는 괜찮은 사람이구나”하는 개념을 갖습니다.
어려서부터 미움을 받고 자라면 “나는 나쁜 사람이구나”하는 열등감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심코 해 준 말 하나하나가 아이의 자아 개념을 형성시킨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올바로 교육하지는 못 하면서 교회에만 무턱대고 나가라고 하면 아이는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크게 망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잘 양육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등감은 버림받을 때 생깁니다. 또 열등감은 다만 쫓겨난다라는 행위적인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여러가지 심리적인 경우도 포함합니다. 이런 경우 나는 가치가 없고 환영받지 못할 나쁜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상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 잃어버렸을 때에도 열등감이 형성됩니다.
열등감 하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생각합니까?
신체적인 조건이나 환경을 많이 생각합니다. 어떤 신체적인 장애, 또는 키가 작거나, 살이 너무 찌거나 말랐거나, 코, 눈, 입 등이 못생겼다는 외모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득ㄹ이 고민하고 열등감을 많이 갖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의 재산, 자신의 학력 등 주변의 환경으로 인한 열등감 또한 많이 갖습니다. 내가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고, 대학교는 나왔는데 이름도 없는 삼류 대학을 졸업했고, 아직도 방 한 칸짜리 전세집에서 살고, 우리 아빠는 아직 자가용도 없고, 우리 아이는 삼수를 하고 있다는 등의 눈에 보이는 환경과 재산을 가지고 비교할 때 우리는 열등감을 느낍니다.
또한 누구로부터 무시당하든지 버림받는 그러한 경험으로 부터 열등감이 생깁니다.
불행한 가정환경은 자녀들을 열등감적인 사람들로 키우게 됩니다. 너무나 무섭기만 한 아버지, 술만 드시면 온 식구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 하루종일 화만 내고 욕을 해대며 나를 미워하는 어머니, 항상 바쁘서 밖으로만 돌아 다니시며 나에게는 전혀 무관심한 부모님, 하루도 부부싸움을 거르지 않는 부모님 등, 그런 밑에서 자라는 자녀는 누가 봐도 버림받는 경험을 직접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 없이 다 해 주지만 감정의 교류가 없고 사랑의 만남이 없는 가정 속에서 자란 아이는 상대적으로 배척을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또 열등감을 느낍니다.
또 아이에게 평소에는 잘 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감정적인 폭발을 자주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평소에 아무리 잘해 주어도 예측할 수 없이 비이성적으로 폭발을 하는 것은 아이에게 굉장히 큰 상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커서 남을 믿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도 긴장을 합니다. 아이는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잃은 채 성장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좋은 환경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라도 그 시절의 아픈 상처와 기억이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갉아 먹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은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어도 내 마음에 받았던 그 상처는 아직도 나에게 열등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 안에서 치유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으면 지금도 영향을 주어서 그 당시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내의 경우 남편이 아무리 잘해 주어도 남편을 괜히 의심하게 됩니다. “남편이 과거 아버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술을 먹고 들어와서 이유 없이 나를 때리지는 않을까? 하는 식의 의심이 계속 들게 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영향을 줍니다. 아버지가 굉장히 엄하시고 무섭기만 했습니다. 하나님도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런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조금 늦으면 목사님이나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처럼 야단을 칠까 봐서 두려워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긴장하게 되고 자유가 없고 안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을 평생 그렇게 믿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이제까지 말씀드린 나쁜 조건과 이유만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과잉보호’하게 되어도 흔히 마마보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아이에게는 굉장히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알아서 하질 못하니까 자신감이 없어지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게 되지를 못합니다. 결국 아이가 스스로 살아 보려는 기회를 빼앗아 버림으로써 낮은 자아감을 갖게 하고 이로써 심한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부모가 나이에 맞는 과제를 스스로 할 수 있게 선택권과 믿음을 주어야 됩니다. 과잉 보호는 일단은 편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결국 열등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과잉 보호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과잉 보호를 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먼저 우리 내면에 어려서 받은 상처와, 그것을 보상하고 싶어하는 기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이에게 자기가 못 한 것에 대한 욕구를 채우려 합니다. 특별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세상에 자기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자녀는 자기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녀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자녀한테 반영됩니다. 즉 자기가 보기에도 자신이 불쌍하니까 자기하고 닮은 애를 자신처럼 보호해 줌으로써 아이를 통해 자기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려서 부모한테 사랑받지 못한 것, 지금 남편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모두 다 아이에게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내면에는 아이를 사랑해서라기 보다 자기가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외적 내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열등하게 만들지만 사실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구원받고 주님 안에서 열등감을 해결하고 나면 더 이상 문제가 없습니다. 전에는 내 학력, 내 환경이 두려웠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자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만 깊이 경험하면 예수님이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을 더 기억하십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못된 짓만 하다가 거지가 된 탕자가 자기 아버지 집이 그리워 회개하고 돌아 오는 것, 그 한 가지를 보시고 그 동안 잘못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녀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잘하는 것은 안 보이고 잘못하는 것만 보입니다. 잘못한 것, 실수한 것,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아주 예민하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하는 것 하나를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부모는 잘하는 것이 아홉 가지라도 잘못하는 것 한 가지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아이에게 야단을 치고 벌을 세웁니다.
허구헌날 그 한 가지 때문에 야단을 맞으니까 아홉 가지의 능력이 있는 아이인에도 이것 때문에 아이가 열등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정을 못 받는 것, 미움, 불신, 나는 안 된다는 부정적 사고에 빠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언뜻 알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과잉 보호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젖먹이처럼 품으시고 젖을 먹이시고,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지시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니까 철저한 과잉 보호를 하시는 것으로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세상의 어느 부모보다도 완전하시고 치밀하시지만 항상 그 원칙대로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거친 광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그 속에서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십니다. 문제는 보호의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보호해 주시지만 올바른 믿음을 성장시키시기 위해 그 보호를 다소 푸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열등감이 많은 경우 책임을 전가합니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여자이기 때문에, 집이 가난해서’ 라는 등의 말로 환경을 탓합니다. 물론 환경도 중요합니다만 이렇게 환경만 탓하고서는 열등감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전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라고 하는 이상은 치료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원인의 일부분이지 전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상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눅15:4-6절에 아흔 아홉 마리의 건강한 양과 열등한 양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흡 아홉 마리를 돌보지 않으시고 이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찾은 즉시 야단을 치시는 것이 아니고 즐거이 어깨에 메고 내려와 벗과 이웃을 불러 즐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열등하게 숨어 있는 우리, 자신감 없어 숨어 있는 우리를 이렇게 찾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 보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반기시고이렇게 즐기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읍시다.

제 4 장 죄와 죄의식

상한 마음과 죄
상한 마음은 크게 굶주린 마음과 버림받은 마음이며 깨어진 마음입니다. 굶주린 마음에는 사랑받고 의지하고 보호받고 싶은 갈증이 있고, 배척받은 마음은 두려움과 열등감과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상한 마음이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무엇인가로 자꾸 채우려고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이 있기 때문에 그냥 일용할 양식만 채우면 되 는데도 그 외의 것을 자꾸 쌓아두게 되는데 바로 끊임없는 욕심입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 죄는 세상 속에, 육체 속에 있는 것을 즐기는데 성경은 ‘세상의 정욕’과 ‘성령의 열매의 반대로 나오는 육체의 일’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즉, 투기하고 미워하고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등을 자꾸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생긴 본질적인 죄가 상한 마음과 또 이런 죄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몸소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모든 욕심과 정욕들을 십자가에 함께 못박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용서를 받고 돌아 왔는데도 고멜처럼 또 죄를 지으러 나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 배척받은 마음과 굶주린 마음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이후 잘못되어 나가는 것
첫째, 감추는 것입니다. 여러가지로 감추는데 어떻게 감춥니까? 선한 일을 통해 보상하려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써 충성과 온유를 맺어 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죄를 감추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선과 봉사와 희생은 늘 피곤합니다. 누군가 여기에 좋지 않은 자극을 주면 금방 반응합니다.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자기에게 똑 같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지적함으로써 자기는 느끼지 못하지만 자기 문제를 감추려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써 하는 일과 내가 감추기 위해서 하는 일은 과정과 결과를 보면 드러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그 과정이 즐겁고 신이 나고 또한 그 결과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감추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가 힘이 듭니다. 또 조그만 장애가 있으면 굉장히 힘들어지고 시험이 듭니다.
둘째, 죄를 짓고 나면 사단이 쓰는 전략이 있는데 죄의식입니다.
과잉된 죄의식은 초자아가 너무 팽대해서 그 사람을 짓누르기 때문에 병적 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의식을 느끼는 자체보다 그 다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가면 잘된 것이고 예수님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를 지은 나를 예수님 앞에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무엇을 하든 기필코 예수님과 멀어지게 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어떤 것을 통해서든 예수님과 가까워지게 만듭니다.
인간의 감정이 경건한 신앙생활에 무조건 무익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마치 신체에 있어서 통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픈 신호가 없으면 우리 몸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뇨가 심한 사람은 신경이 마비되어서 밤새도록 뜨거운 온돌방에서 자다가 뜨거운 줄 모르고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신체가 이같은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 통증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 세계에도 통증이 필요합니다. 미움과 욕심과 외로움 등이 생기면 바로 마음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입니다. 그때는 두려워 할 것 없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조건 의지적으로 억누르려고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실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앞으로만 가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죄책감으로 숨기려 하고 의지적으로 억누름으로 의식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자꾸 키운다는 말이 있는데 ‘자꾸 키우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욕심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을 인간적인 의지로 억압한다고 해서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서 자라며 실제로 더 커집니다.
마음 속에서 미움이 커지면서 누군가가 집을 짓게 됩니다. 누구의 집입니까? 사단이 거할 집 입니다. 그 집으로 사단이 들어와서 확실하게 자리잡고 나면 그 다음에는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도 자꾸 미워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원한이 됩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도 이런 부정적인 문제에 당면하면 흔들리게 되는데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선한 방향으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고 더 깊이 치유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생기고 미운 마음이 생길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집사가, 권사가, 장로가 이러하다니 하면서 자책 하고, 숨기려 하고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드러내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애통하고 상한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치유받고 해결해야 합니다.
치유받고 회복되어서 죄와의 관계를 청산하려 하지 말고, 죄를 느낄 때마다 놀라지 말고, 숨기려하지도 말고, 우리 주님 앞에 항상 통회하며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죄의 문제를 포함한 신앙 생활의 여러 문제도 결국 이 상한 마음에서 옵니다. 채워지지 않은 것들과, 열등감과, 두려움 속에서 옵니다. 하지만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나의 속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고, 불신과 두려움이 치유가 되면 죄와 죄의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열등감과 죄의식을 치유하시고 우리를 받아 주시고 하나님의 크신 것으로 채우시려는데 자꾸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용서받았지만 품꾼처럼 불쌍하게 살아 갑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저 용서받는 것으로 끝나는 개념이 아닙니다. 놀라운 회복을 통해 풍성한 것이 상한 마음에 채워져야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 고멜이 죄를 지었습니까? 그것은 호세아의 진정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로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풍성한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죄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 5 장 인간관계와 사랑

사 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사랑을 해야 되고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 본질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사랑의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이성간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남녀간의 뜨거운 마음뿐만 아니라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 친절하고 너그럽게 베푸는 마음, 긍휼, 동정, 박애 등의 마음인것입니다. 수많은 인간 관계 속에는 어려운 일들도 참 많습니다.
왜 이런 많은 문제가 생깁니까? 신앙 안에서 이런 인간 관계를 해결하지 못하면 많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당합니다. 상한 마음이 치유되지 않는 한 인간 관계도 계속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신랑이신 예수님
사랑은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것처럼 자라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발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한 마음 때문에 어느 사랑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이사랑 저사랑 찾아다닙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상적인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능력이시며,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불안하고 열등감이 생겨서 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못나가는 것입니다. 보고도 의심하고 기사와 이적을 바라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심지어는 믿음에 조건을 달고서 신앙 생활을 하고 끊임없이 고멜처럼 도망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에게 만만한 대상이 되어 주시고, 안전한 사랑을 주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낮아 지셨습니다. 바보같기도 하고, 무능력하게도 보이고, 양처럼 순하셔서 내가 좋다면 언제든지 달려 나오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분입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채로도 갈 수 있고, 죄를 지은 다음에도 찾아갈 수 있는 분입니다. 언제 어느 때든지 항상 기쁘시게 맞아주시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을 때 그분은 허기지고 상한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굶주린 마음을 채워 주시고 버림받은 마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으로 채워졌을때 더이상 방황은 없습니다. 우리 모든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자기를 어려워하지 말고 때로는 친구로서 대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수가성의 여인처럼 허기지고 갈증 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방황을 했는지 돌이켜봅시다. 우리가 굶주려서 욕심을 부리다가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서로 미워하고 원망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수가성 여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몸으로 간음을 하였습니다. 정욕을 채우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고멜과 다를 바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항상 주님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 6 장 심리적 방어와 신앙 생활

상한 마음들은 신앙 생활에까지 끈질기게 따라옵니다. 믿음 안에서 문제점들이 다 드러나고 치유를 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신앙 생활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앙 생활 속에서 상한 마음을 드러내고 계속적인 치유를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점점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더 굳어져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치유를 거부해 버리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심리적 방어 기제
주님을 못박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주께서 택하신 백성들이었습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혹시 나에게 바리새인과 같은 면은 없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내게 오실 때 내가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못박지 않을까 근신하며 깨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아픈 마음과 병든 마음과 죄를 숨기면서 살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이런 문제점들을 드러내길 원하고 계시며, 그 드러냄을 통해서 치유하길 원하시는데 그 속에는 어떤 심리적인 방어 기제가 있기 때문에 감추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속에 이러한 문제들을 교묘히 숨기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가) 억 압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억압된 상태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매우 경건하고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내적으로 억압된 생활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치유적인 복음과는 반대되는 종교 생활입니다. 신앙 생활을 통해서 좀더 자유로와지고 치유를 받아야 되는데, 오히려 더 억눌리고 구속되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신앙 생활입니다. (분노, 미움, 음욕, 정욕, 세상에 대한 욕심 등) 자체는 죄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느낌조차 생기지도 못하게 억압하려고 합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하며 살게 되는데 그래서 육체적으로도 무리가 오고 또 정신적으로도 뭔가 표현을 하지 못하니까 답답해집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서 자유롭고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분을 품지 말고 ” 이는 하나의 반사적인 감정입니다. 연약하고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자꾸 억누르다 보면 그러한 느낌이 내 머리 속에서는 없어진 것 같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어지면서 오히려 힘이 더 세어져서 결국 나중에는 엉뚱한 곳에서 터질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은 내가 표현해야 할 감정을 표현 못할 때 나타나는 병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어떤 문제점을 느끼고 도망가고 싶고 숨기고 싶을 때 그것을 빨리 예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가슴 속에 채워지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면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잘 봐주지 않는다 해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누구보다 더 좋은 것을 예수님께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마음이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한 마음, 두려운 마음, 배고픈 마음 모두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억누르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에 무조건 억압하고 억누르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표현이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자기를 표현하지 못해 종종 화를 내는 것은 억압을 푸는 것이 아니고 폭발하는 것으로서 역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항상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데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억압이 되어 폭발하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자유케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나) 동 일 시
어렸을 때 아이들은 가장 가까운 부모들을 흉내내면서 자라고 닮아 갑니다. 그들은 부모의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처음부터 자기 주체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통해서 부모가 주는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커 나갑니다. 진정한 신앙 고백을 해서 성령을 받아 변화되었습니다. 나의 부족한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끌어당겨서 내가 강해지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내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무능함이 하나님의 것을 이용해서 능력 있는 종으로 과시되어지고 하나님이 아닌 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신념과 배짱과 적극적인 생각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싶은 적극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또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데 사람들이 고난의 십자가가 없는 영광의 부활만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데 그것은 자기 고백이 없는 미성숙한 믿음입니다. 먼저 자기 열등감을 십자가에 내려 놓고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환상이 깨지고 부족한 면이 보여지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당겨 내가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 안에서 죽는 것, 나는 하나님 같은 능력이 없다는 것,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내 속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 나와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다) 반동형성
심리적인 용어로 ‘반동형성’이라는 방어 기제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운 감정이 반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좋은 표현이 되어 나옵니다. 즉 겉으로는 겸허하게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강한 반발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굉장히 이기적이고 감추기 위한 잘못된 봉사와 겸손이 있습니다. 감추기 위해서 하는 봉사와 겸손의 경우는 자기 자존심이 살아 있습니다. 겸손한 것 같은데 어떤 때는 그 자존심이 살아 있어서 누가 그 자존심을 건드리면 아주 불끈합니다. 그렇게 봉사를 열심히 하고 겸손하시던 분인데 그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폭발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진정으로 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서 남의 사랑을 받고 남을 오히려 조종을 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해 주었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말을 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희생은 자기 요구가 없습니다. 조건이 아닌데 어떤 경우는 조건이 있습니다. 아주 온유하고 겸손하며 양보만 하는 사람,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참기를 잘 하는 사람도 그것이 성령의 열매인지 본래의 성격인지 차이를 두어야 합니다. 온유는 있는데 절제가 없다든가, 희생은 하는데 화평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거기서 희생은 자신의 성격이며 자기가 만들어 내는 열매입니다. 성격대로 신앙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기질대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열등감을 채우고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내 속에 욕심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일들은 온전한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라) 보상 심리와 취소 심리
육신에 묻은 때가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속에 어떠한 더러운 것이 있습니까?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과 훼방입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들이 가득하니까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외양을 깨끗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는 송장이 썩어 가는데 바리새인들은 겉에다 회칠을 깨끗하게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내 속이 더러울 수록 겉으로 더욱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내 속이 무질서할수록 겉을 더욱 정돈하려고 합니다. 반듯한 것, 깨끗한 것, 완벽한 것, 의로운 것, 이런 것을 지나치게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취소시키고 위장하고 덮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지적하셨듯이 깨끗하게 하려는 너희 속에 더러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과 도덕을 찾을 때 그 속에 그 만큼 더 비도덕적이고 율법을 어기고 싶은 나의 욕심이 있고 죄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완벽하려는 사람은 그만큼 완벽하지 않고 너무 도덕적인 사람은 그 속이 그만큼 비도덕적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서 바리새인들은 물론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나의 의와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절대 완벽해질 수 없습니다.

마) 합 리 화
행할 수 없는 선행을 율법을 가지고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마) 지 적 화(知的化)
질문을 하는 이유는 내 마음 속에 무엇인가 막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풀어 보려고 자꾸 지식화, 지적화합니다. 그런 분들 속에는 사랑을 받고 싶고 뭔가 두려움과 불신이 있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에 대해서 따지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 드러나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인데 오히려 그 말씀을 통해서 내 것을 감춥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문제를 합리화시킵니다. 말씀은 많이 아는데 마음이 열려져 있지 않고, 말씀을 통해 한번도 자기 마음이 강하게 부딪치지 않지만 성경 공부에는 열심히 쫓아 다닙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성경은 많이 알았지만 예수님의 거듭난다는 말씀을 이해 못 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지적으로만 알면 복음이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복음이 진정으로 그 사람 마음을 깨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고 진정으로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됩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 투 사
투사는 자기가 열등하다고 느끼면 괴롭기 때문에 밖에 있는 다른 것에 핑계를 대는 행위입니다. 가장 많은 경우가 피해 의식인데 이 속에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자기가 열등해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 때문이라고 원인을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7장 1-5절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바로 우리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눈에 들보가 있는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통해 자기 문제를 감추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한다는 것은 내 속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나중에 나도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 속에 믿음이 없을 때 다른 이의 믿음 없음을 책망합니다. 신앙 안에서 먼저 믿은 사람이 늦게 믿은 사람을 많이 책망합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연약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실족케 하는 대부분이 비판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초신자들을 보호해 주어야 하고 먹여 주고 재워 주어야 되는데 오히려 많은 것을 요구하고 짐을 지워 주려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이제 겨우 기어다니기 시작한 아이에게 자꾸 일으켜 세워 뛰어다니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 7 장 십자가의 치유

십자가는 용서와 새 생명을 줍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자기를 학대하지 말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이 주신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들었던 나, 상한 심정의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라는 것은 과거의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 주셔서 내 속에 있는 새 사랑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두려움과 결핍된 가운데 있었지만 새로운 생명 가운데 있으면 태초에 하나님께 지음받았던 그 생명대로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 영원히 채워집니다. 예수님의 보호하심과 믿음과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 속에 우리의 진정한 치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생명은 용서받은 새 생명이요 하나님 아들로서의 생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의 기준으로 그 생명을 비난하고 야단치고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생명, 비록 겨자씨만큼 작고 보잘 것 없는 생명일지라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고 품어 주어야 되는 생명인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십자가 앞에 연합하여 죽는 경험이 치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와 연합하여 내가 죽고, 또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연합하여서 내가 사는 경험이 우리를 치유합니다. 평생 그 십자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이고 예수님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일상의 기도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의 놀라운 보혈과 부활의 생명력이 매일매일 싹트는 치유의 생활이 예수님 만나는 그 날까지 계속되길 간절히 간구합니다.
제 8 장 용서를 통한 성장

우리의 거듭난 생명이 성장하지 않으면 계속 과거의 상한 마음에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거듭남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않을 때에 계속해서 상처받은 마음과 옛사람에게 종살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원리를 꼭 배워서 경험하고 앞으로의 우리의 신앙이 늘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장의 원리
치유하려면 먼저 상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과거로 부터의 끊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의지나 힘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서 그 세상의 중독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되는 것이 치유의 과정이며 그렇게 치유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상한 마음, 굶주림, 욕심,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에 의지하면서 살던 자신입니다. 그런 옛사람 속에 있던 모든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경쟁심이나 질 수 없다는 승부욕과 인정받고 싶은 의욕 때문에 아주 많은 일들을 하며 열심히 삽니다. 그런 열정과 성실함이 있지만 그건 다 세상에 속한 장점입니다.
가끔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사람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엔 응원단장이니, 무슨 서클의 회장이니 하면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입니다. 옛날에 여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아름답고 예쁘던 멋쟁이 친구가 평범한 이웃집 아줌마처럼 수수해졌습니다. 알고 보니 모두 예수를 믿고 나서 이렇게 매력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이전에 세상에서 가졌던 장점과 매력과 능력을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와서 행사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왜 그러 일들이 생길까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이미 상한 마음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의 성격으로 고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격은 매력도 되고 능력도 될 수 있지만 그 대부분은 상한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감추고, 보상하고,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자기의 성격대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던 휘황찬란하던 것들은 없어져야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능력이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도 바울의 능력을 꺾으심으로 바울은 상한 마음을 치유받고 하나님이 주신 것만 가지고 성령의 열매와 함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광야의 은혜
무엇이든 쌓아 두면 바로 그것에 종노릇하게 됩니다. 돈을 쌓아 두면 그것을 내가 부릴 것 같지만 그 돈의 종이 됩니다. 내가 미워하는 감정을 쌓으면 그 미워하는 감정의 종노릇을 합니다. 뭐든지 쌓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광야에서의 교훈이고 하나님의 양육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은혜로 모든것을 주십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면 됩니다.
율법과 성막, 이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통해서 가르치지만 더 중요한 율법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성막을 통해서, 제사를 통해서, 피흘림을 통해서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용서를 깊이 체험함으로써 내가 내적으로 더 회복되고 행위적이고 비은혜적인 모든 문제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용서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용서를 온전히 안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갇힌 자입니다. 용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갇혀 있습니다. 비판과 투사. 남의 나쁜 점들을 비판하며 용서해 주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죄가 자기 속에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속에 용서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 안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안 받아들인 것입니다. 종살이 시키고 있고 자기를 가두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철저히 체험하고 나면 상대방이 나한테 빚진 것, 서운하게 한 건, 상처 준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출애굽을 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지만 주님의 생명 가운데 성장하지 못하고 자라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속에 용서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세상식으로 하던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봉사, 섬김으로 새로운 일들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어린아이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바라고 하나님 것만 바라야 합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에 은혜와 용서함 가운데 하십시오. 묵상을 할 때도, 새벽 기도를 나갈 때도 억지로 하지 마시고 은혜와 용서함 가운데 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제 9 장 치료의 예수님

예수님의 생애
예수께서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오셨으며 그와 동시에 우리의 죄로 인해 상한 것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구원의 계획이 좋은 줄 알았지만, 우리의 상한 심령과 죄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지금껏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자신들을 사랑하시며 기적과 능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한 마음으로 인한 죄의식과 두려움과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도 불안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항상 혼자 계시면서 그 모든 것을 견뎌 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고백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처절한 고통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절규였습니다. 하나님마저 버리시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가 겪을 수 없는 그 이상의 모든 고통을 겪으시면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치유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났다고 그 속에서 나음을 받았습니다. 연약한 것을 아셨던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쉽게 나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아픔 가운데 있을 때, 원통하고 핍박 가운데 있을 때, 조롱과 멸시 가운데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겪으셨던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내가 무력함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십자가를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을 때의 그 무거운 마음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그 아픔을 다 아시고 이해하십니다. 어렸을 때 힘든 일을 겪어 본 사람들은 자라서도 그와 같은 상화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줄 압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야단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해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억울함, 버림받음, 외로움, 무력감, 좌절감, 우울함, 괴로움, 슬픔과 배신 따위의 고통 가운데 빠져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목사님도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다 이해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그 죄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될 때 예수님은 죄의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아시고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죄의 고통에 짓눌릴 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도 예수님은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커다란 슬픔과 음부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한없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리와 병든자, 창녀와 버림받은 자들과 가까이 계셨습니다. 드러낸 자, 없는 자, 고통당하는 자, 외로운 자, 슬픈 자들과 같이 있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담대히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아가서 2장을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깨우지 말라 하는 것은 환상이 깨어지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깨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실제적인 모습으로 더욱더 다가옵니다.
15절에 보면은 포도원의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작은 여우는 우리들의 상처이고 우리의 두려움, 열등감, 사단입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합니다. 3장부터는 작은 여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숨어 있던 것, 불안과 두려움이 더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자를 꿈꾸다가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
우리 속에는 이런 상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열등감이 있고 죄의식이 있습니다. 주님이 날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 자꾸 도망 갑니다.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는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 생명을 주셨는데 자신과 관계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풍성한 음식을 차려 놓고 굶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나신 주님을 옆에 두고 제자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어부가 되어 고기를 잡고 있었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과 풍성한 것이 있는데도 우리는 다시 옛날처럼 세상에서 고기를 잡고 있고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아픔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왜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닫혀진 마음 가운데 있는 상처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주님은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두려움에 평강의 치유를 하십니다. 도마처럼 의심하는 자에게 평강의 치유를 주십니다. 두려움에 평강을, 의심 있는 곳에 믿음 주십니다.
베드로는 왜 갈릴리로 갔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한 죄의식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시몬 베드로가 낙심해서 물고기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선생이라고 부를 자신이 없었지만 이제 자기 자신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을 수 없었지만 이제 자기 자신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두려움이 많고 문제가 많은 사람인 것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죄의식과 좌절과 수치심에 빠져 있는 베드로에게 야단치지 않으시고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죄의식과 낙심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의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려 하다가 자신의 문제때문에 좌절하고 실의하고 낙심할 때 예수님은 첫사랑을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를 야단치지 않으시고 다시 용기를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성령으로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엡1:20-22)
예수님은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왕으로 계시며 또 이제 곧 오실 것입니다. 현재는 성령으로써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도우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통해 함께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탄생에서부터 그 성장 과정과,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 승천 등의 모든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이 도와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족해서 하는 일마다 문제가 생기지만 그 때 예수님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를 도와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셨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에 절대 부족함이 없습니다.


제 10 장 치료의 성령님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 어떵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확신을 주시고 예수님의 일을 돕고 완성시키고 시행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밀착시키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구체적으로 연약함, 의심, 상한 마음 등 우리가 여러 가지 문제에 빠졌을 때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을 더 확인시켜 주고, 만나게 해 주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뿌리고 간 씨를 성장시켜 주셔서 더 풍성하고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은혜와 용서를 통해 생명을 성장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을 통해서 하는데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뒤에도 은혜와 율법 속에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항상 은혜가 뒤처져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시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가운데 있게 됩니다. 자꾸 율법 안에 머물게 되는 문제는 성령님께서 치유해 주십니다. 내가 용서를 받고 은혜롭다는 것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롬8:14-16(
마음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꿈인 것처럼 자꾸 노력하고 율법 아래서 어찌 해보려 합니다. 그래서 옛날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살았지만 성령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으로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것을 더 완성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 바로 성령님의 기업입니다.

치유는 기업을 얻음으로 완성되어 집니다
치유는 해방을 통해서 됩니다. 노예로부터, 사단과 애굽과 마음의 상처와 모든 과거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해방이 된 뒤, 종의 신분을 벗고 자녀의 신분으로 바뀐 다음엔 기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나안 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이며 나의 땅과 재산과 기업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것으로 풍성히 채워지길 힘써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기업을 주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완성시키십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이도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하나님의 지키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양육을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과 하나님의 의를 확고히 완성할 때 다시는 죄 짓지 않고, 다시는 연약함 가운데 빠지지 않고, 다시는 상처가 없고, 질병 가운데 있지 않는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고전13장의 사랑고, 마5장의 팔복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죄로 인해 병들게 된 우리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성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성품이 성령의 열매요 사랑이요 팔복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와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여 다시는 죄 짓지 않게 합니다.(갈5:22)
사랑은 내속에 있는 이기심과 정욕이, 희락은 내 속에 있는 슬픔이, 화평은 내 속에 있는 질투와 갈등이 없어져야 하며 오래 참음은 내 속에 있는 불안과 조급함과 상한 마음들과 병들이 치유되어 내 속에 진정한 자비함과 용서함이 있어야 하고, 양선은 내 속에 죄악이 없어져야 하고, 충성은 내 속에 이기심과 자기 중심이, 온유함은 공격적인 것들이, 절제는 나의 욕심이 없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 치유의 공동체는 많은 이웃을 치유받고 구원받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과 도우심은 완벽하시고 빈틈이 없으십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교통함 속에, 교회 속에 계시며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갑니다. 은사가 우리를 지체로서 세워 주는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각기 다르면서도 성령의 내적인 충만함 속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과 성령의 교통하심과 주님의 치유와 성령의 역사를 이루기 원할 때 주님께서 은사를 사모하고 사용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내적인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외적인 성령의 충만함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외적인 성령충만은 내적 치유와 관계 없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서로 상처를 줄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지성적인 크리스찬들이나 불신자들이 성령에 대한 저항감을 갖게 됩니다. 성령의 외적 사역과 충만함도 반드시 필요합니다만 내적 사역 없이 즉, 내적 치유와 열매가 없는 은사나 외적 충만은 오히려 성령의 본질적 사역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적인 성령의 충만만을 중요시하고 외적인 은사를 무시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외적인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치유가 확장되어 나가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연약함이 외적인 공동체의 은사와 능력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치유와 강건함에 성령의 외적 사역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적인 성령 충만함으로 내적 치유와 성령의 열매를 얻고,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외적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공동체는 다시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웃을 치유하고 구원시키고 또 성장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치유를 완성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많은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내적인 사역과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특별히 험한 세상을 살아 가기 위해서 우리는 은사를 받아야 하고, 성령의 무기인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웃과 사랑과 치유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성령님을 통한 치유의 완성입니다.


제 11 장 치료의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서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었고 또 모든 것들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기에 결국 상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우리를 상한 마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그와 동시에 회복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셔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태초에 지녔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키고 또 새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결국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키고 치유시키셔서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다시금 더불어 살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서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 목표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치료의 목표인 동시에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참 치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떤 형상적인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서 믿음을 갖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필요성에 의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참 치유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어렵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며 인생살이가 피곤합니까? 모두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를 해도 그것을 전부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여호와께 돌아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참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므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모든 사역이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국 치유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 드리는것, 봉사하는 것, 성경 공부하는 것, 등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 하나님의 인애를 아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를 위해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라면 그것이 가장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해와 사랑도 없이 무의미하게 가져다 주는 값비싼 선물이 정말 기쁨이 될까요? 그것은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먹을 것 입을 것이 좀 부족하고 사는 곳이 초라해도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한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천국이요 행복한 보금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선물은 사실 받는 사람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그것을 해주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만큼 그것이 큰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빠져 나오지 못할 때 내외적인 환경을 많이 탓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욥의 고통의 댓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그러므로 신앙의 가장 깊은 경지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것,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만나고, 그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묵상하는 그 속에 우리 인생과 신앙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왜곡된 하나님의 모습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왜곡된 개념을 가지고 있을까요? 모두 자기 문제와 자기의 상처 때문에 잘못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경배하지만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의미로서 우리가 만든 형상적인 하나님은 자꾸 부서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첫번째, 우리가 형상화한 하나님은 과잉 보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의 환상은 하나님과 대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성장해야 할 때는 과잉 보호 해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믿음을 더 갖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기업과 가나안 땅을 받으려면 믿음을 가지고 성장해야 하는데 어려서 항상 보호만 받으려 하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묵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검사나 경찰관처럼 용의자들을 추적하고 죄인들을 붙잡아서 심문하고 죄를 들추어 내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귀신같이 내가 잘못한 것을 들추어 내시고 찾아낸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의례 엄한 부모님들 밑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말로는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으로 하지만 자기 마음 가운데는 그런 억압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오면 늘 긴장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을 하면서 늘 긴장을 하고 조금만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하나님이 무슨 경고로 주시는 신호로 생각합니다.
세번째, 하나님을 심판자로 생각합니다.
검사같이 우리의 잘못을 고소하고, 판사같이 우리의 잘못을 판정하는 하나님입니다. 머리 속으로는 전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이런 하나님이 아주 많습니다. 내가 모르는 무의식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좀 잘못하면 아주 단호하게 절대 용서하지 않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 보혈을 다 이야기해도 그것은 머리로만 알고 있을뿐 내 마음 속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무의식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네번째, 하나님을 신비한 도를 닦은 도사처럼 생각합니다.
사사로운 문제가 생기면 그건 내 문제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습니다.
다섯번째, 하나님을 우주적인 분으로 생각합니다.
우주의 티끌보다도 작은 한 인간 인간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큰 것에 관심이 있는 분, 큰 우주의 어떤 프로그램 원칙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라는 개념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십니다. 그렇게 우주적인 차원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으시고 자신의 뜻대로만 실행시키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간과 교통하실 수 있는 인격을 가지시고 만나 주십니다. 화도 내시고 기뻐도 하시고 슬퍼도 하시고 때로는 후회도 하십니다. 인간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모른 분들은 기도를 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매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듯이 인격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데 우리는 포기합니다. ‘하나님 당신 뜻대로 하시는 분이시고, 내가 귀찮게 하면 우주를 움직이시는 데 방해만 되니까 그냥 가만히 있자’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섯번째, 하나님을 독재자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상한 마음 때문에 갖는 잘못된 개념을 하나님께 투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
첫번째,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성품 중에 전지전능하시고 주권자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버려진 마음 속에 가장 크게 있는 것이 불신입니다. 이 불신 때문에 항상 확인을 하고 이것을 내가 조절할 수 있어야만 안심을 합니다. 확인되어지고 내가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불안합니다.
‘공황장애’ 라는 병이 있습니다. 자기조절을 할 수 없을 때 심한 불안에 빠지면서 그것이 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것의 주권자시고 전지전능하시다고 하면서 진정한 삶에 있어서 왜 그렇습니까?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면 믿지를 못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있어서 하나님에게도 맡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을 때 내가 무력할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전문 해결사이십니다. 당신의 인생을 맡겨 드리십시요. 하나님이 진정으로 전지전능하시고 주권자이신 것을 삶 가운데 마음 가운데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조정하고 주관하던 것을 풀어야 합니다. 나의 죽음까지도 풀어야 합니다. 나의 죽음까지도 풀어야 합니다. 당신은 진정 우리의 주권자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있습니까?

두번째, 기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벧후3:8-9, 눅15:20, 시103:8-10)
그분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며 바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 거룩한 기준으로 우리에게 야단을 치시고 잡아 내기 시작하시면 지금 지구상에 살아 남아 있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류는 멸종되었을 것이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르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으로 그나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질책지 않으시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기다리심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한테 자기 기준, 어른의 기준을 가지고 지적하고 야단을 칩니다. 자기도 못 하는 기준을 아이에게 요구하고, 그러지 못할 때는 현장에서 붙잡아 놓고 호통을 칩니다. 아이가 몸이 자라고 지혜가 자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인 데도 기다리지를 못하고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부모가 나한테 매일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알았으니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다리셨는데 나가 있는 아내와 남편을, 자식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서로 성도들 사이에도 자비와 인자함을 지니고 기다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세번째, 마태복음 10장 29-31절 말씀 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이런 걸 다 아실까 생각하지만 나만 알고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나같이 부족하고 가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아실까? 나를 이해하실까? 버리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욥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배척감이 있었습니다. 그가 그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42장 5절) 그러면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이 무슨 얘기를 하셨길래 욥이 무릎을 꿇게 되고 이젠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까? ‘내가 너를 만들었는 데 무엇을 모르겠느냐? 네가 그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너보다 정말 못한 악어에 대해서도 이렇게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데 너의 지금 마음이 어떠하고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내가 나의 형상으로 만든 너의 머리털이 몇 개인지를 모르겠는냐는 것입니다. 나를 우리 모두를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통해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네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뵈어야 합니다. ‘아!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구나, 나를 이렇게 존귀하게 대하시는 구나!’하는 벅찬 느낌을 반드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다섯번째, 민수기 23장 19절과 호6:3을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새벽별 같다고 했습니다. 새벽별은 어둠이 밀려온 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즉시 즉시 보호해 주시고 채워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더 큰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못하고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유하셔서 더 성장시키시고, 나의 믿음을 키우시고, 더 큰 것을 주시며 내게 잘못된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늦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벌레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되는 데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도 아팠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경험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믿음으로 나오십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련과 어떠한 고통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 앞에 마음을 여십시다.


제 12 장 구원과 치유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 세 사람이 왔습니다. 이들은 몰약과 유향과 황금을 선물했습니다. 여기서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것으로 예수님의 떠남에 대한 의미이고, 유향은 향기로 죄 사함에 대해 제사장들이 주고 쓰는 것입니다. 황금은 다스리는 왕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과 치유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내적 치유 사역의 중요성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서도 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 교회에 왜 어려움이 생기는지 살펴 볼 때 치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단순한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데 너무도 중요한 것이 치유입니다. 치유를 원하시는 예수의 부르심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먼저 교회 내의 사역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분들이 좀더 성숙을 이루기 위해 각 교회에서 치유에 관한 세미나와 상담이 계속되어야 하며 교회의 선교사역과 동시에 되어져야 합니다. 가서 말씀만 뿌리는 것이 선교가 아닙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의 공동체를 통해서 치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최후 무기 중의 하나가 정신적인 문제를 통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통해서 교회와 믿음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이 정신질환, 마음의 병에 대해서 단단히 치유할 수 있는 사역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적 치유 강의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어려운 분들을 만나면 상담도 해 드리고 도와도 드리고 싶지만 길이 막연합니다. 입원시켜 드릴 수도 없고, 입원시킨다 해도 병원은 제한적이고 마음대로 내적 치유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내적 치유와 의학적인 치유를 위한 전문적인 병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안수를 할 수 있는 팀이 이런 병원을 세우고 내적 치유를 할 수 있고, 또 약물치료도 할 수 있는 병원이 앞으로 세워져야 되지 않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병원이 세워지면서 찬양 사역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또한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 은사 받은 분들이 합심하여 진정 환자들을 위해서 찬양 할 수 있다면, 치유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일반 정신 질환에도 놀라운 은혜의 치유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역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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