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 복수, 화해>
- “때때로,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게 가서 “의혹을 밝히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면하기 전에, 당신은 주의 깊게 당신의 동기를 점검하고 당신의 기대를 평가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은 그들과 화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두 가지 별개의 과정
- 용서와 화해는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용서는 일방적이다. 용서는 전적으로 우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결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해는 상대방의 참여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화해를 “일으킬” 수는 없다.
- 용서와 화해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별개의 과정이다. 우리는 화해가 없이도 용서할 수 있다. 용서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에 필수적인 것이며, 언제나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화해는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며, 가능한 언제든지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만, 화해가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 쌍방향 도로
- 화해는 쌍방향 도로이다. 두 사람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서로 “공감”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양쪽이 모두 화해를 원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양쪽이 각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각자의 감정을 처리하고, 둘 다 회개와 용서의 작업을 거쳤을 때만이 화해가 일어날 수 있다.
- 화해는 쌍방향 도로이다. 한쪽에서만 용서를 흘려보내는 경우에 화해는 가능하지 않다.
- “나와 내 친척, 이전 친구들 사이에 갈라진 틈은 나의 교만을 삼키고 먼저 화해를 청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 내가 비난을 조금 받는다 하더라도, 너그러운 제안은 나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One Day at a Time in Al-Anon)
☞ 사랑의 형태
- 용서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형태이다.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 파괴적인 성향을 깨달은 데서 솟아나는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사과하고 회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무조건 관계를 “원상복귀”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 사람들은 어떤 불가능한 보상을 해야 하거나 어떤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처벌 받아야 한다는 충동으로 갈등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용서를 획득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보상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절대로 보상을 통해서 용서를 획득할 수는 없다. 용서는 사랑의 행위로서 값없이 주는 것이며, 겸손의 행위로서 값없이 받는 것이다.
- 우리는 값없이 받은 것에 대해 값을 지불할 수 없다. 용서와 화해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행동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행했을 때 상대방이 우리를 용서하고 화해를 위한 문을 열어 준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실패나 잘못된 행동을 더 적나라하게 깨닫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화해는 상호 수용에 기초하고 있다.
- 화해는 상호 용서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호 수용도 요구한다. 수용은 다음과 같은 것에 기초한다.
• 서로가 자기 자신들을 수용할 수 있다.
• 서로가 자신의 실패를 시인하려는 자발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
• 서로가 틀어진 관계를 치유하려는 갈망을 갖고 있다.
• 서로가 자기 합리화를 하고자 하는 욕구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 서로가 상대방을 처벌하려는 욕구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 서로가 무조건적인 용서의 사랑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 용서 없는 화해
- 우리는 화해 없는 용서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우리는 진정한 용서 없이도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에 그럴 수 있다.
• 다른 사람의 행동이 야기한 고통을 “간과”할 때
• 우리가 상처 입었다는 것을 부인할 때
• 변명할 수 없는 행동을 변명할 때
• 만일 말한다면 관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때
- 우리는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진실을 부인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덧입히면서 까지도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먼저 관계에 불화를 가져온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설득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한다.
- 그런 접근 방법을 취하면 “화해”하기는 쉽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은 전혀 화해가 아니다. 화해는 용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딜 수 있으려면 먼저 양쪽 모두가 용서의 작업을 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표면적인 용서’에 대해 말했다. 표면적인 용서는 오로지 거짓된 화해로 이어질 뿐이다.
☞ 부모를 학대한 딸
- 화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반드시 직면(confronting)이라고 하는 주제가 등장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직면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용서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중요한 문제이든 다른 것과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 숨겨진 것들을 빛 가운데 끄집어내어 다루는 것이 중요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가족 비밀, 가족 신화, 부인이라고 하는 산더미에 묻혀 있어왔던 심각한 학대 행위들은 당사자들에게 직접 가서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 그러나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직면하는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고 직면이 어떤 영향을 가져오게 될지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동기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보복이나 앙갚음의 충동, 원한, 앙심이 있다면 뿌리를 뽑는 것이 중요하다.
- 직면이 가져올 영향과 관련해서, 우리는 직면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생각해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직면이 정말로 상황을 더 호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과도한 압박을 가함으로써 이미 상할 대로 상한 관계를 더 단절시키고 악화시킬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직면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변화를 촉진할 것인가, 아니면 가로막을 것인가?
- 다른 사람들을 직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 그들은 의연하게 일어나 자신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을 “책망”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직면이란 과거의 정서적 속박에서 독립하는 선언이며, 전 세계에서 “내게 일어난 일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나는 다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돌격하여 “격퇴”하려고 한다. 그것은 그다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다. 효과적인 직면이 되려면, 사려 깊은 준비를 해야 한다.
☞ 성직자를 직면한 여성
- 잘 준비된 직면은 놀랍도록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 모든 직면이 그런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이 그렇게 잘 해결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그들이 매 단계마다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항상 자신들의 동기를 점검하고 각 단계가 끼칠 영향을 저울질 해보면서 다루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 “직면은 사실과 감정을 단순하고도, 본질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앙심을 품은 공격이나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멀리하거나 바꾸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다. 당신이 상대방을 직면하는 목적은 그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The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분노는 직면을 하기 전에 해소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당신은 상대방을 처벌하거나 보목, 또는 위협하거나 고통을 주기 위해 직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면은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처리하지 않음으로써 계속적으로 곪고 있었던 과거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마감하는 방법이다.”(H. Norman Wright, 「Always Daddy's Girl」)
☞ 의혹을 말끔히 없앤 딸
- 그릇된 행동의 피해가 막심할 때에는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사소한” 상처라 할지라도 신중하게 직면한다면 유익이 될 수도 있다.
칼라는 몇 주 동안 우리 상담실을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몇 몇 문제에 대해 자신의 부모를 직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녀가 성추행이나 신체적 학대와 같은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가 무엇을 직면하고 싶은지 물었다.
- “아,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다루는 것만큼 그다지 심각한 건 아닌데요.” 그녀는 말했다. “제가 부모님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어떻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잘 모르겠어요.”
- 칼라와 나는 그녀가 부모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번의 상담을 했다. 또한 그녀는 다음 상담이 있을 때까지 몇 가지 기초적인 문제들을 좁혀 가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검토해보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러한 직면을 통해 부모에게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 이것은 칼라에게는 특히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녀의 주된 불평 가운데 하나는 그녀의 말을 진정으로 들어 주기 위해 시간을 내거나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들어 줄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과소평가 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대개 헛기침을 한 뒤 내뱉듯이 “그 문제라면 엄마한테 가서 얘기하렴.”이라고 일축해 버리곤 했다. 사실, 칼라는 부모님들을 직면하게 되면 역시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 “그런데 왜 당신은 여전히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 전, 제가 인격체로서 어느 정도 성숙해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싶어요. 제가 부모님들에게 한 말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하실 지는 그분들에게 달려 있죠. 그래서 전 잘 반응해 주길 기대하진 않아요. 내가 말하는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어 주기만 해도 더 바랄 것이 없죠.” 나는 그러한 시간을 마련하는데 동의했다.
- 내가 그녀의 부모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그녀가 묘사한 그대로였다. 나는 잠시 그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그들이 편하게 느끼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했다. “칼라는 두 분과 나누고 싶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는 일종의 해석자로서 상대방이 말할 때 모든 사람들이 경청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칼라 쪽을 향해서 말했다. “시작하세요.”
- 부모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주지 않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칼라가 말하는 동안, 나는 부모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상처를 입고 화가 났는지 말했지만, 상처와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알려 준 것뿐이었다. 그 어떤 분노의 비난이나 판단도 없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부모님이 듣고 있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지 묻기도 했고, 그러면 부모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마침내, 칼라는 부모님 각자와 일대일로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했다. 그 순간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계속해 나갔다. 말을 끝마쳤을 때, 그녀는 부모들에게 자신이 나눈 내용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들 모두 그녀가 그렇게 느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 딸이 진정으로 어떻게 느끼는지 생각지도 않고 행동하거나 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잘 경청하지 않았던 점을 시인했다. 상담시간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모두 포옹하고 서로를 따스하게 껴안았다.
- 그 다음 시간에 칼라를 만났을 때, 그녀는 한층 더 자란 것 같았다. “그 동안에 모든 게 포옹했을 때처럼 매끄럽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정말 꽤 잘 지냈어요. 어머니는 조금 상처 받은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어요. 아버지하곤 거의 다 풀어진 것 같고요.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무너진 것 같아요. 제가 아버지에게 저와의 관계를 허락한 것처럼 말이 예요.”
- 칼라의 이야기는 중요한 점을 말해 주고 있다. 누군가를 직면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직면은 기대와 연관이 있다.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직면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서 거의 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가장 효과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기꺼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마주칠 마음이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 부인(“난 절대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
• 반박(“하지만 네가 요구했고, 유혹했고, 날 충동질했잖아.”)
• 축소(“넌 이것을 정말 지나치게 크게 만드는군.”)
• 애매모호성(“확실해? 난 그와 같은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 기대를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때때로 직면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우리가 가장 우려했던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중요한 관계의 실질적인 변화는 강도 높은 직면을 통해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는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 있는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는 기반 위에 주의 깊게 생각하고 작지만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을 계획할 때 더 자주 일어난다. 코를 막고 눈을 막고 뛰어든다면, 우리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Harriet Goldhor Lerner, 「The Dance of Intimacy」)
☞ 크리스마스를 취소한 아버지
- 제임스의 아버지는 큰 교단에 속한 교회의 목회자였다. 어느 크리스마스 날, 그의 아버지는 9살이었던 제임스가 그들이 살고 있던 남부 도시의 빈민들과 비교해서 너무 많은 장난감과 옷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미리 한마디 설명도 없이, 그의 아버지는 주일 설교 단상에서 제임스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없을 것이라고 광고했다. 그가 받는 어떤 선물이든 가난한 아이들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임스의 아버지는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배달해 주었다.
- “많은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놀라운 그리스도인인지 말했어요.” 제임스는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전 여전히 장난감을 원했다는 것예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한 번도 선택권이 없었어요.”
- 성인이 된 제임스는 어린 시절의 다른 고통스러운 기억과 더불어 그 경험을 다루어야 했다. “전 아버지가 제게 한 일에 대해 어떻게든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제임스는 말했다. 그는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너무 괴로워서 지원그룹에 참석했다.
- 지원그룹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복수심”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한 남자는 부모에게 재정적인 낭패를 가져다주기 위해 사용했던 계략을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자동차 타이어에 구멍을 내는 유치한 공상을 말하기도 했다.
-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제임스는 복수심은 치유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정상적인 부산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용서로 가는 길을 통과하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 내가 성인으로부터 성추행이나 신체적 학대를 당했던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언젠가 “복수”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충동은 다소 충격적인 복수에 대한 공상이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나타나는 그러한 욕구는 우리 모두 안에 보복 욕구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지 보여 줄 뿐이다.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건강한 것은 아니다.
- 이와 비슷한 감정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깨닫기 시작하면서, 성인들에게서 나타난다. “나는 용서 할 수 없어요.” 그들은 이를 뿌드득 갈면서 말한다. “그건 인과응보에요.”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다른 식으로 표현할지도 모른다.
- “그에게는 교훈이 필요해. 그리고 난 그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사람이야.”
- “그녀에겐 모든 것이 너무 쉽기만 했어. 그녀는 힘든 현실을 더 겪어봐야 해.”
- “난 그녀가 거기에서만 끝나도록 할 수 없어. 나에겐 그녀를 뜯어 고칠 의무가 있어.”
- “난 하늘이 그에게 벌을 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 그런 사람들에게는 처벌 없는 용서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태도는 정의를 표방한 것 같지만, 단지 겉만 번지르르한 정의일 뿐이다. 그것은 보복심과 분노의 얼굴을 가면으로 포장한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진정한 용서는 복수심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는 그를 용서할 거야. 하지만 그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해”라고 말하는가? 참된 용서는 “하지만”이나 “그러나” 또는 또 다른 조건들을 그 위에 첨가하지 않는다. 용서는 “이 상처는 완전히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 “용서에 반대하는 설득력 있는 논쟁이 있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피할 구실을 만들어 주면 안 되기 때문에 용서는 공평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용서는 약함의 표시이지 강함의 표시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용서를 “걸인의 피난처”라고 불렀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복수로는 결코 공평한 점수를 따낼 수 없다. 복수는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를 끝없는 보복의 에스컬레이터에 묶어 버린다. 간디는 옳았다. 만일 우리 모두가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정으로 살아간다면, 전 세계는 눈이 멀어버릴 것이다.”
(Lewis B. Smedes, 「Forgive and Forget: Healing the Hurts We Don't Deserve」)
☞ 복수는 쓰다
- 잘못을 범한 자에게 정의를 적용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앞에서 말한 성직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젊은 여인의 이야기는 그러한 좋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상처들은 법적 대응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 자신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다루는 문제들이다. 누군가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해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최선책인 것은 아니다.
- 목회자의 아들이었던 제임스는 어린 시절의 고통을 다루고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을 다루기 시작했다. 몇 개월 지난 뒤, 그는 지원그룹에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복수’하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요? 우리는 용서할 수 있기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 옛말에 “복수는 달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실은, 복수는 우리가 이미 맛 본 쓴맛을 되풀이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깊이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특히 복수심을 항상 불러일으키는 쓴 뿌리는 더더욱 아니다.
☞ “과거를 과거”로 끝내기
- 나는 가능하다면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화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화해는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한쪽이 아무리 간절하게 그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 앞에서 살펴본 대로, 화해는 양쪽이 자발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가능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온전히 용서하는 마음과 화해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찾아갈지라도, 그러한 노력이 거절당하고 말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이러한 역동관계를 여러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 때때로 화해를 하려는 노력을 권장할 만하지 않을 때가 있다. 신체적, 성적 학대, 그 밖에 여러 가지 학대를 당한 경우에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위험하며, 그들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이 과거의 일로 직면을 당하면 망연자실하게 되는 허약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적어도 직면과 화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과거는 과거”로 끝내는 것이 가장 현명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용서의 과정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 상대방이 더 이상 생존해 있지 않을 때
- 물론, 상대방이 더 이상 생존해 있지 않기 때문에 직면과 화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가장 일반적인 예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들과 화해하고 싶은 때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조차도 직면의 역동성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 글렌은 아버지의 무덤에 갔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으면서 자신이 바랐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말했다. “아버지가 제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글렌은 말했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전 제가 말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었으니까요.”
• 마리아는 벽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초상이 담긴 큰 액자를 보고 말을 했다. “전 아버지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본 게 기억나요.” 그녀는 말했다. “마치 내가 아버지의 영혼을 보려고 노력하듯이 말이죠.” 그녀는 몇 개월 동안 수차례 그렇게 했다. 마침내 그녀는 “아빠, 전 아빠를 용서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아트는 어릴 때 살았던 전원풍의 통나무집으로 돌아가 보았다. 그는 집주인에게 어렸을 때 그곳에서 살았었다고 설명하고 한번 둘러보게 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나무 사이로 거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는 걸으면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말했다.
• 펠리샤는 부모에 대해 긴 사망자 약력을 썼다. 자신이 받았던 그릇된 취급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녀는 행복했던 기억들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 자체로도 치유가 되었다. 고통스러워하던 때에는 상처가 된 기억 밖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안드레아는 교회에서 자기가 잘 알고 깊이 존경하는 부부에게 대리 부모로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실제 부모로부터 겪은 일을 그들에게 대신 말했다.
- 이런 기술에 가장된 요소가 있어 보이는가? 우리는 이러한 방법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얼굴을 맞대는 직면과 화해만큼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용서의 과정을 거쳐 나가도록 도움을 주는 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 게다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이 정말로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육체와 피를 가진, 현재의 부모가 아니다. 그보다는 과거에 한때 그랬던 부모에 대한 기억 속의 심상(memory picture)을 다루는 것이다.
-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그런 기억속의 심상을 우리 내면 속에 짊어지고 다닌다. 그 사람들은 그 동안 변화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우에, 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부모는 지금의 부모가 아니라 그때 당시의 부모일 수도 있다. 위에서 제시한 방법은 기억 속의 부모를 직면하는데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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