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국 교회 안의 영성운동의 흐름
1. 오순절적 영성운동(순복음, 알미니안, neo pentacostalism)
한국 교회 안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영성운동은 오순절적 영성운동이다. 이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성령을 받는 것에 초점이 있는 영성운동이다. 성령을 받아서 능력 있는 일꾼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이다. 영적이고 능력이 충만한 사람은 곧 성령의 사람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도 고치는 능력의 사람이다. 영적이고 능력이 충만한 사람은 곧 성령의 사람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도 고치는 능력의 사람이다. 영적이고 영성이 충만한 목회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목회자인 동시에 죽어 가는 교회를 살리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까닭에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은 영적인 권능의 목사인 동시에 영성이 깊은 목사라는 등식이 거의 형성되어 있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물론 처음에는 순복음 교회를 비롯한 오순절 계통의 교파에서 중심적으로 시작된 운동이지만 현재는 한국의 거의 모든 교파에 영향을 미쳤고, 거의 모든 교파 안에 이 흐름의 운동을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영성운동의 예배나 집회는 대단히 뜨겁고 정열적이다. 기도를 할 때에는 손을 하늘로 올리고 주여 삼창을 전체가 큰 소리로 합창을 한 후에 큰 소리로 정열적으로 기도를 드린다. 대단히 뜨겁고 정열적인 반면에 상당히 시끄러운 단점도 있다. 조용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상당부분 거부감을 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하나님이 귀가 머셨나라는 비판을 자주 듣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성운동은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인다는 신념이 기초되어 있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정열적이고 뜨겁고 또한 무언가 얻으려고 하는 영성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건강을 얻고, 가난에서 해방되어 부를 얻고, 명예도 얻고, 기적도 행하고, 죽어 가는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은 성공에 대한 소망과 많이 결부되어 있고, 축복이 이 영성운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 영성운동은 대중성을 갖고 있고 다수의 대중을 모으는 힘을 발휘했다. 반면에 이 영성운동은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고, 다른 형태의 영성운동에 비해 사회의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고, 개인적 욕망과 욕심이 영성과 결탁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무당출신의 초대교회 이단자였던 몬타누스 의 극단적 신비주의를 모토로 하여 신 오순절주의가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 6:24)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늘 유념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헌금봉투를 보고 예언사역을 하거나 은사적인 면만 치중하는 영성사역은 한국 전통의 무속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2.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한국의 개신 교회 안에 오순절적 성령운동에 식상한 사람들이 대안적인 영성운동으로 도입해서 많이 확산시켰는데, 현재는 하나의 중요한 영성운동의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영성운동이다. 이 운동을 도입한 사람들은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상대적으로 저급하다고 생각하고 고상한 형태의 영성운동을 추구한다는 자부심이 내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영성운동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악을 억제하고 죽이고 성화에 이르려고 하는 영성운동이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보면 이 운동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데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명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영성운동이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이 뜨겁고 정열적이고 반면에 시끄러운 특징이 있는데 이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대단히 조용한 특징을 갖고 있는 운동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주간 동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명상하면서 성화에 이르고자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또한 오순절적 영성운동이 무언가 얻으려고 하는 영성운동인데 반해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오히려 버리려고 하는 영성운동이다.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명예에 대한 욕심도 버리려고 하는 영성운동이다. 가슴을 세상 적인 욕심으로 가득 채우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가난함에 이르고자 한다. 청빈을 중요한 삶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가난한 마음 속에 진정한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영성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성 프랜시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가난한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한다.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외견상 불교적인 영성과 닮은 점이 있다. 명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이나 세상에서 초연해지려고 하는 특징이나, 모든 것을 버리려고 하는 것들이나, 내적 욕망을 억제하고 죽이려는 노력 등은 불교 승려들의 수도적 삶을 연상케 한다. 이 영성운동의 문제점은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근본이유와 언제나 결부되는데 율법주의의 폐해 및 복음의 기쁨과 세상성의 중요성의 상대적 약화 등이 언급될 수 있다. 진정한 영성은 은둔의 영성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되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수도원의 영성과 치유사역은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과 함께 개신교에도 혼합되어 왜곡괸 영성신학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치유는 부활의 치유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치유이다.
3. 해방의 영성운동
해방의 영성이라는 개념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개념이다. 억눌려 있는 사람들, 불의로 신음하는 사람들, 제 1세계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제 3세계의 사람들, 이들을 억누르고 있는 잘못된 질서를 타파하고 이들을 해방시키는 역사 속에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이다. 이 해방의 영성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교회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구체적인 정치적 운동으로 나타난 바 있다. 한국의 교회 안에서도 해방의 여성운동은 과거의 독재정권 치하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권 및 정의와 민주화 운동 속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히 한국에서는 민중 신학이 발전하면서 해방의 영성은 민중의 영성과 결합되었고, 민중을 의식화시키고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주체의식을 갖게 하고 역사를 바꾸는 영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민중주체의식은 민중의 영성의 하나의 상징적 개념이다.
해방의 영성운동은 오순절적 영성운동이나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이 인간의 내적 영역, 종교적 영역과 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반해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 운동이다. 즉, 이 운동은 사회적 역사적 차원의 영성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은 정치운동으로 변질될 위험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영역이 단지 인간의 영적 영역, 종교적 영역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역사적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큰 장점이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한국 교회 내에서는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적, 혹은 복음적인 교회가 그다지 반기지 아니하는 영성운동이다.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러한 신학과 심리학적 치유가 만나면서 최면술적인 내적치유를 가지고 모 상담연구원의 치유가 그렇다.
그러면 위의 세 가지 영성운동 가운데 어떤 영성운동이 가장 바람직한 영성운동일까? 위의 세 가지 영성운동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영성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성령의 능력과 믿음의 역사에 그 초점이 있고, 또한 바로 이 점에 큰 장점이 있고,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닮으려는데 큰 장점이 있고, 해방의 영성운동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 영성운동이라는데 큰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의 장점들을 잘 살리는 영성운동이 우선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무조건 위의 세 가지를 합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은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신학적 근거가 너무 다르고, 또한 서로를 배격하고 있는 구조가 있기 때문에 쉽게 합쳐지지 않는다. 또한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은 이미 일부 지적된 것 속에서 느낄 수 있듯이 상당한 문제점도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 가지를 합친다는 것은 문제점도 합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는 바른 영성운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우선 개혁파 신학의 영성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개혁과 신학의 영성은 하나님 중심의 삶(God centered Life)이다. 개혁파 신학은 세상과 역사에서 이탈하는 가톨릭의 수도원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개혁파 신학의 영성은 탈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고 세상 속에서 빛나는 영성이었다. 또한 개혁파 신학은 열광주의나 신비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개혁파 신학은 광적인 영성을 바른 영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언제나 말씀 중심적인 영성을 생각했다. 개혁파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진정한 영적인 삶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이 개혁파 신학의 영성이 갖고 있는 건전성과 깊이와 중요성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개혁파 신학의 영성의 기초 위에서 이미 언급한 세 가지 영성운동의 장점을 살리는 바른 영성을 위한 신학적 체계를 형성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탈세상적이나 탈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곳 속에 깊이 존재한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신비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믿음과 사랑이 영성의 핵이다. 믿음과 사랑은 성령이 활동하는 통로인 동시에 성령의 역사의 장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은 교회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시키기 위해 힘을 다하는 교회이다.
Ⅳ. 기독교 영성과 치유의 목적은하나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구현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 영광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으로 규정했고, 바로 그 속에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지향점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개혁파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절제와 청지기직이 개혁파 신학의 중요한 영성이다. 개혁파 신학은 역사와 세상에서 이탈해서 산 속으로 가는 영성을 가르치지 않았다.
맑스 베버(M. Weber)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은 개혁파 신학정신과 자본주의의 발전과의 관계를 설명한 매우 중요한 책이다. 베버에 의하면 경제가 부강해지고 자본주의가 발전된 세계의 열강들이 칼빈주의의 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버는 칼빈주의 정신과 부강해진 경제 사이에 깊은 인간관계가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된다고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근면하게 일했다. 진정한 칼빈주의자들 가운데 근면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 칼빈주의자들은 근면하게 일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돈을 저축했다. 또한 칼빈주의자들은 방탕하거나 사치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자들이 방탕하지 않고 사치하지 않는 이유는 방탕하고 사치스럽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근면하게 일해서 돈을 저축하고 방탕하거나 사치스럽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돈을 저축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있는데서 시작된다.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저축된 자본은 이내 경제부흥의 모체가 되었고 그 결과 세계의 경제 강국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절제와 청지기직은 튼튼한 국가를 만들고 건강한 세계를 만들었다. 개혁파 영성은 타락한 자본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제 3세계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오늘의 잘못된 자본주의 구조와 개혁파의 영성을 결부시키면 안 된다. 오늘날의 개혁파 교회의 영성은 오히려 제 3세계를 착취하는 잘못된 자본주의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영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시키는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시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선교적 과제의 중요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시키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 활동하는 마귀의 활동을 종식시키고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생명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억압과 불의가 깊은 곳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적이다.
아직도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바로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자손들과 노예주의자들의 자손들이 형제적 사랑으로 식탁을 함께 하는 꿈입니다. 그 꿈은 야만성과 억압으로 가득 찬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땅으로 변하리라고 희망하는 꿈입니다. 그 꿈은 어느 날엔 가 앨리배마의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손을 맞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거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M. L. King Jr.) 목사는 위대한 영적인 인물이었고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흑인과 백인이 함께 형제적 사랑으로 식탁을 나누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킹 목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자 했던 깊은 영적인 삶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역사 한 복판에서 마귀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생명의 세계를 구현시키는데서 빛난다. 20세기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쌍벽을 이룰만한 가톨릭 교회의 영적인 인물은 로메로(A. Romero) 대주교였다. 로메로는 1977년 3월 12일과 13일 군부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한 신부가 시무 했던 교회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깊은 회심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그의 나이가 59세였다. 이 때부터 그는 엘살바도르의 고난받는 백성에게 가기로 결심했고 민중의 주교가 되었다. 로메로는 죽어 가는 엘살바도르의 국민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살인청부업자에 의해 제단 앞에서 살해될 때까지 고난받는 백성들의 희망으로,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세계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일한 사람이었다. 몰트만은(J. Moltmann)은 그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이 로메로 대주교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순교자로 칭했다.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순교한 순교자들의 삶 속에서 빛난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가난한 자를 살리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역사 속에 깊이 존재하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하나님의 영은 포로 된 자들을 해방시키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불의를 없애고 가난을 없애고 기쁨과 생명이 물결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신다. 그런 까닭에 바로 이런 하나님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그곳에 주의 영이 존재하고 있고 기독교의 참된 영성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결언
진정한 영성은 주님과의 연합이다.(요15:7) 전인적인 치유사역은 빈드시 개혁주의적인 경건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확실한 역사의식, 인격성화의 극대화, 공 동체 정신, 우상문화와의 싸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균형성 있는 영성과 치유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바른 영성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고 세상과 역사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화시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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