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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그것이 죽음의 증거이다.

davidtheking 2008. 6. 27. 21:50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합니다.

 

상전을 하나님처럼 섬기라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한다.

죄의 종일 때도 하나님의 성품은 그것을 인정한다.

내가 죄의 종일 때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는 죄를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적할 수도 없게 된다.

내가 죄를 선택하여 죄의 종이 되면 죄는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그 아래서 죄의 끌림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믿음은 내가 죄의 종일 때도 , 의의 종일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종으로 오셨다.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섬기러 왔다고 했다.

그는 동일하신 분이다.

그가 부활하신 후에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나를 영원히 섬기시는 분이므로 내가 죄를 섬길 때 그는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내가 죄를 섬기든 의를 섬기든 상전을 하나님처럼 섬겨야 하는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

 

정죄감은 무엇인가?

탐내지 말라 하면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이 올라온다.

집, 차, 돈....

이것들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올라오고 속에서는 법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은 맘은 있으나 ,

탐욕을 죄로 여기는 한 " 내가 왜 이러지? " 하면서도 나는 그 아래 종이된다.

내가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죄를 내가 짓고 있다고 믿게되며 그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그가 사람으로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을 입고 오셨다는 것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몰아부쳤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을 입고 오셔서 죄 없다고 선언하여 주시려 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죄 있다고 하므로써 자신들이 자신을 정죄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죄는 바로 자기 자신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은 먹으면 죽이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먹으면 너희가 너희를 정죄하여 스스로 죽는 다는 것을 말씀하신것이며,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그것을 알게 되었다.

 

바리새인이 예수를 정죄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너희는 죄가 없다고 아무리 애를 쓰셔도 자기 스스로 자기가 죄가 있다고 믿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자기를 죄라고 선언하고 그 죄로 인하여 스스로 사망하는 것이다.

 

내가 술을 먹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는데 ,

다른 마음에서는 술을 먹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럴때,

술을 먹고 싶지 않은 것은 성령, 먹고 싶은 것은 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술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이미 하늘에 옮겨졌고 술은 죄가 먹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주님이 나를 살아주고 계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직 내가 죄의 종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이와 잇몸이 아픈 것,

이것을 이렇게 생각한다.

" 내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먹으라 하신다! 내가 주님이 주시는 것을 내 법에 의하여 골라 먹고 있다.  " 라고.

내가 주님의 주시는 모든 것을 먹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이와 잇몸이 아픈것은,

아직 죄가 불법으로 내 안에 있는 것이며 주님이 그것을 언제인가는 치워주실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주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가?

그것은 결국 내가 아직 죄의 종, 정죄를 통한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이 주시는 것을 먹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내 속에 있는 정죄가 나를 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벨리알이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쓴물과 단물이 함께 있을 수 없다.

 

나의 믿음은 내것이 아니다.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나를 살아 주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다.

내가 믿을 것은 이것이다.

정죄(또는 두려움)가 들어오면 그 정죄의 이면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되고,

모든 것을 주님께서 내게 행하고 계심을 감사드리는 것이 내가 죽었다는 증거이다.

 

술도, 잇몸도 그것들이 떠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떠날 때 까지 계속 믿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며,

죄는 이미 나와 상관이 없이 나는 의롭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들이 떠나도록 더 믿어야 하는 것은 부담이다. 자유가 아니다. 무언가에 묶여있는 것이다.

 

정죄는 그 위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그 자체, 드러나는 것에 대한 자체는 하나님이 친히 하고 계신 놀라운 일임이 내가 그의 안에서 죽은 증거이다.

내 눈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를 신뢰하고 그가 나를 삼아주셔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계속 술먹는 것이 죄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잇몸이 아픈 것은 죄가 나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몸의 가시를 빼기를 위하여 세 번 기도하였을 때 얼마나 간절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것이 유익하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환경의 변화는 없었으나 모든 기쁨 보다 더큰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가난이 언제인가는 떠날 것이라는 것은 죄가 아직도 있다는, 내안에 교묘하게 속이며 있는 정죄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 또한 주님이 하시는 것임을 감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으면 죽을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주님은 죽기까지 하나님을 믿으셨다. 그 동일한 성령께서 나를 사시도록 하는 것이 내가 참 살 길이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을 가차없이 죽일 때,

자고 일어나니 원수가 코 앞에서 다 죽어 있을 때,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갚으시는 것이다.

 

주님 제가 주님을 더 선명하게 보도록 지혜와 계시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출처 : 주님이 사십니다.
글쓴이 : 예수닮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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